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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있는 자리 / 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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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가 있는 자리 
본문 : 출애굽기 3:1~5 

서양 속담 중에 “더러움이란 자기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라는 말이있다. 연못 속에서 커다란 고기가 헤엄칠 때는 아름답지만 그 고기가 우리의 침대 위에 누워있다면 더럽다. 정글 속에 있는 코끼리는 멋있고 아름답지만 도심 한 복판에 코끼리가 걸어다니면서 실례한다면 우리의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물고기라고 더러운 것이 아니다. 코끼리라고 더러운 것이 아니다.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하고 더러울 수도 있다.

이것은 짐승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지켜야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면 추해진다. 탕자를 보라. 탕자는 자기가 지켜야할 자기의 자리가 있다. 아버지의 품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자기에게 돌아올 모든 분깃을 챙겨서 아버지의 곁을 떠난다. 처음에는 자기 마음 데로 활동할 수 있어서 좋아 보였지만 결국에는 자기의 자리를 떠난 탕자는 추한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 자기의 자리를 찾게 되자 잔치가 벌어지고, 축제가 벌어지게 되었다.

아브라함을 보라. 우상 숭배가 가득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간다. 갈대아 우르 땅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옮겨 자기의 자리를 옮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되 자녀와 땅의 복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다른 곳에 있으면 그것은 더럽다. 그 모습이 매우 추해진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로서의 자리가 있고 아내로서의 자리가 있다. 내가 누워자야할 자리가 있고 내가 앉아서 먹어야할 자리가 있다. 옆 집이 더 좋다고 그곳에 가서 누워잔다면 그 사람은 추한 꼴이 되고 만다. 옆 집의 음식 솜씨가 좋다고 그 집에 가서 살림을 차려 놓고 밥을 먹고 있다면 그 사람은 추한 인생이 되고 만다. 자기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참으로 추한 인생이 되고 만다.

어떤 아이 엄마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그렇게도 열심을 내지 않는다. 주일에 교회도 잘 나오지 않고 속회도 드리지 않아서 속장님이 늘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어느 주일날 속장님이 아이 엄마에게 미리 연락하고 함께 교회에 가자고 하였다. 주일 아침에 아이 엄마를 찾으니 나오지를 않는다. 신발이 없다. 속장이 생각하기에 오늘도 몰래 사라졌는가보다 하면서 돌아가려던 차에 아이를 만났다. 얘야 엄마 어디에 갔니? 하고 묻자 순진한 아이는 속장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창가로 가더니 창문을 열고 엄마있는 곳을 가리킨다. 아이 엄마가 교회에 가기 싫어서 창 밖에 신발을 신고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상상해 보라. 집 안에 있으면 추하지 않을 텐데 자기 집 창 밖에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추해 보이는가? 그 분이 누구인줄도 모르고 지금은 어떻게 신앙 생활하는지 모르지만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며 이렇게 추해진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산으로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신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자리는 거룩한 자리요, 행복된 자리요, 축복의 자리요, 기쁨의 자리이다.
풍수지리설이 있다. 풍수지리의 시작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으로부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연과 조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산과 물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처음의 시작은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이 이것은 효와 연결시켰다. 죽은 조상의 묘자리를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자손들에게 복이 임할 수도 있고 화가 임할 수도 있다는 하나의 신앙의 내용으로 변질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지방에 가면 지관을 보는 사람이 있다. 풍수설에 따라서 묘자리를 정해 주는 사람이다.

풍수지리설은 죽은 사람의 묘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성경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삶의 자리를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다. 악의 자리에서 선의 자리로, 불평의 자리에서 감사의 자리로, 슬픔의 자리에서 기쁨의 자리로, 불행의 자리에서 행복의 자리를 말씀하고 있다.
이같이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는 것이 복이요 아름다운 일이지만,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추한 사람이 되고 만다.

지난 주에 여수 애양원과 소록도에 다녀왔다. 애양원과 소록도는 한센병 (문둥병)을 치료하는 곳이다. 애양원의 시작은 1909년 의료선교사인 포사이스가 급히 광주로 가다가 길에 버려진 한센병 환자를 발견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위험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서 하신대로 행하려는 마음에서 그녀를 안아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서 갔다. 그 환자를 치료하여 주고, 복음을 전한다. 결국 이 환자는 주님을 영접하고 평안한 얼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길에 버려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세워진 곳이 여수에 있는 애양원이다. 1900년대 초에 이미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들어와 이러한 환자를 돌보는 선교사들을 볼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들이 선교지에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멋있는가?

이 애양원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성산교회이다. 성산교회의 교인들은 대부분이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이 교회의 2대 목사님이 손양원 목사님이시다. 손양원 목사님은 믿음의 자리를 지키셨다. 신사참배의 강요 속에서도 거부하여 옥고를 치룬다. 종신형을 선고 받아서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다가 해방으로 석방이 되었는데 1948년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에 두 아들 동신이와 동인이가 공산당의 총에 맞아 죽고, 그러나 손 목사님은 그 죽인 공산당을 자기의 양아들로 받아드린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자리를 지켰다.

육이오가 일어난다. 손목사님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 양떼를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하면서 끝까지 강단을 지키다가 공산당에 총 맞아 순교하고 만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거룩한 일이요,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요,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일이다.

여수 애양원에는 세 개의 무덤이 있다. 손양원 목사님의 무덤과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의 무덤이 있다. 5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죽음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왜 그런가? 그들은 끝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목사님은 강단의 자리를 지켰기에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감명을 준다.

애양원에서 많은 영적인 감동을 받고 그 다음 날에 소록도로 향하였다. 순천 벌교 고흥을 지나 녹동에 이르니 소록도가 눈 앞에 보였다. 소록도는 여의도의 일점오배 정도 되는 섬인데 위에서보면 작은 사슴같이 생겼다고 하여 소록도라는 이름이 붙혀졌다. 일제시대 때문에 문둥병에 걸린 환자들을 강제 수용하면서부터 생기게 되었는데 이 섬은 들어가면 죽어나오는 섬으로 알려졌다.

이 섬에 들어가자마자 안내하시는 목사님이 제일 처음 데리고 간 곳은 문둥병이 너무 심한 환자들이 모여있는 병동으로 들어갔다. 많은 분들이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요, 손과 발도 없고, 코도 없다. 뚫려진 구멍으로 호흡할 정도이었다. 들어가서 목사님이 할머니 안녕하세요, 김목사 왔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들이 일제히 일어나려고 애를 쓴다. 목사님 오셨수. 목사님 보고 싶었다고 말을 전하는데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사진.................
그런데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평안한지 모른다. 어떤 할머니는 10살 때에 들어와서 지금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일 평생을 이 병으로 고통 중에 살아왔다. 소록도에는 자살바위가 있다고 한다. 스스로 비관해서 자살바위에 올라가서 죽는 바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사람을 바꿔 놓는다. 코도 없고 눈도 없고 입도 일그러졌지만 그 모습은 마치 천사의 모습과도 같았다.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기도해 줘서 고맙다고 손을 잡고 놓지를 않는다.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이렇게 아름답다.

병상에 있으면서도 텔레비전을 본다. 볼 수 없으니 귀로 듣는다. 소록도에 있어도 육지의 되어지는 일은 훤하게 잘 알고 있다. 육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위하여 그들은 기도한다. 그렇게 모진 병에 걸렸지만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서울로 돌아와서 뉴스를 틀으니 어떤 여자가 성형외과를 찾아가서 쌍커플 수술을 하였다고한다. 수술한 쌍커플이 예쁘게 나오지 않아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아들이 카드 빚을 수 천만원 지었다. 어렵게 사는 부모가 빚의 일부를 갚아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아들은 아버지의 통장을 훔쳐서 달아났다. 부모는 너무 속이 상해서 결국 자살해서 죽고 말았다. 생활고에 시달린 엄마가 아이 셋을 아파트로 던져버리고 엄마도 자살해 죽었다. 오죽하면 그렇게 스스로 인생을 마감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스스로 죽음으로 자기의 떠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추한 인생이 되고 만다.
영등포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기차가 들어오는데 다섯 살된 아이가 기차 길로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역에서 일하는 역무원이 자기의 몸을 날려서 아이는 살려내고 이 역무원은 두 발을 잃게 되었다. 자기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은 이렇게 멋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하는 것은 그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그 기차를 타고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사의 자리를 떠나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이같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면 아름답지 못하지만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지키면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성도로서 지켜야할 자리가 있다. 성도는 끝까지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산상성회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 산상성회에 올라가서 내가 있는 자리를 더욱 확고하고 성실하게 지킬 것을 다짐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여러 가지 책임을 맡고 있다. 각 사역팀의 팀장 혹은 임원, 성가대, 교회학교 교사, 속회의 속장과 임사, 장로 권사 집사의 자리 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리가 있다. 내가 있는 그 자리를 성실히 지킬 때에 우리의 삶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벗어날 때에 추한 우리의 모습이 된다.

가정에서도 지켜야할 자리가 있다. 아버지로서의 자리, 엄마로서의 자리, 자녀로서의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잘 지킬 때에 그 모습이 아름답다. 그러나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우리를 추하게 만들고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만다. 사랑하는 성도여! 내가 있는 자리를 잘 지키자. 내가 있는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자.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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