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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삶의 조건 / 시 11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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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행복한 삶의 조건
성경말씀 : 시편 115:9-15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간혹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상인으로서 불행한 삶을 자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이 행복 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 삶의 행, 불행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삶의 조건을,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삶의 조건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성도님들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위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통해서 행복한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죄 사함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우선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늘 마음이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가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입니다. 죄인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하고 나자 그만 자기들의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토록 하나님 뵙는 일이 기뻤건만 이제는 하나님의 낯을 뵙기가 두려워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음이 불안해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살면서도 더 이상 행복하지가 않았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있는 에덴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사람들은 행복의 원인을 외부적인 여건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남들처럼 출세하지 못해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진정한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망의 세력 앞에 굴복한 사람이 행복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기에 이사야서 57장 20절로 21절에는 “20)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1)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까닭은 죄에는 형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죄를 지으면 우리 양심이 가책을 받습니다. 다시 말씀하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담과 하와처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성도님들께서도 경험해 보셨듯이 불신 친지들과 만나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도 이쪽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운을 떼면 어느새 딴전을 피웁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만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큰 소리 치지만 내심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둘째로, 죄인은 고아와 같이 버림 받은 심정을 갖고 삽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으므로 늘 고아와 같이 버림 받은 심정을 갖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불신자들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고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께 대하여 스스럼없이 아바 아버지하고 부르지만 불신 이웃들은 하나님과 등지고 원수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심령이 평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셋째로, 죄인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불신 이웃들은 겉으로는 천국과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행복한 삶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욥기 22장 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하신 대로,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과 화목할 때 비로소 평안도 있고 행복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이 무슨 방법으로 죄를 해결 받을 수 있을까요? 그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타종교에서는 인간이 구원 받을만한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행위는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행이나 수양을 통해서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보기에는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높고 엄격한 기준에는 턱 없이 부족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으므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 구원 받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는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은 곧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것과 같습니다. 선물은 거저 받는 것이요 값을 지불하면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은 것이 구원 받은 공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죄 사함의 은총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죄책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등에 하나 가득 무거운 짐을 지고 낑낑대면서 길을 가는데 그리로 차를 몰고 지나가던 어느 성도님이 나를 발견하고 차를 세우고 집까지 태워 주겠다고 했다고 합시다. 등에 진 짐을 차 트렁크에 내려놓았을 때 얼마나 홀가분하겠습니까! 하물며 무거운 죄짐을 벗어던졌을 때의 행복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이유에 대하여 로마서 4장 4절로 8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죄를 짓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는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작은 것이라도 우리를 오염시키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목욕한 자가 온 몸이 깨끗하나 외출하고 돌아오면 발을 씻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일상생활 가운데서 짓는 죄를 회개함으로 항상 자신을 깨끗한 상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죄 사함 받은 자로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행복과 사랑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있을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 마음이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히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무슨 아름다움이나 아무 자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 6절로 8절에는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시다니, 세상에 이처럼 위대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신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한량없이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4장 18절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 마음속에 사랑을 가득 채울 때 두려움의 감정이 감히 침범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릇에 무엇을 가득 채우면 다른 물건을 담을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시거든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불일듯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입술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하였고, 고라 자손은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10)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성도님들의 사랑을 행실로 나타내십시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하루는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식사 대접을 위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시니 그 동네에서 죄인 취급당하던 한 여자가 이 사실을 알고는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이 광경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각을 아시고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런 다음,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인 여자와 바리새인 시문 둘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할까요? 물으나 마나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통째로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자가 인색한 바리새인 시몬 보다 더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헌신을 통해서 나타냄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언제나 함께 취급합니다. 물론, 우선순위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우선합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로 12절에 보니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본질상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하지만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이웃은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지만 그렇다고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의무이기 이전에 행복인 것과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상대방보다 내가 먼저 행복해 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가르칩니다. 사랑을 받을 줄만 알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주고 베푸는 것입니다. 따라서 받기만 하려는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요즘처럼 사랑이란 말이 흔하게 쓰이는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이란 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아가페적인 사랑을 찾아보기가 심히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자유롭고 풍요한 삶을 누리면서도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되었은즉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심으로 진실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윤리 도덕이나 신앙이 아니고 경제원리입니다. 심지어는 배우자를 고르는 데도 사랑보다는 경제적인 면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 사정이 좋으면 사랑하고 화목하지만 경제가 나빠지면 불화하고 갈라섭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산 사랑이라면 모조품 사랑에 불과합니다.

돈으로 생명을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 총수들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돈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그들은 수백 년, 수천 년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돈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사람들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 줄로 압니다 마는 이 역시 대단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산 행복은 돈이 없어지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 원리에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잘못된 지도를 보고 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결국은 실패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잠언 6장 23절에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길이라도 등불이 있으면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길을 찾아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할 때 악한 자들의 올무에 빠지지 않습니다. 환한 대낮에는 사물을 밝히 볼 수 있어서 진짜와 가짜를 분간할 수 있어 속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심령을 밝혀 줌으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어서 바른 길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잠언 16장 25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했습니다. 듣기에 좋은 말이라고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계의 책망은 언제나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삶의 원칙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하신 신명기 말씀이 이 사실을 뜻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듣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고 땀 흘려 수고한다고 반드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수고는 허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 10장 23절에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고 하였고, 시편 127편에는 “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때 세상적인 방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언제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네 번 째로,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그 생각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소나 돼지나 원숭이와 같은 짐승을 보노라면 그저 본능에 따라서 행동할 뿐이지 생각하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른이든 아이든 다 생각을 합니다. 사람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생각이 악하기 때문이요, 선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생각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생각을 하는데 악한 말과 행동이 나올 리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을 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려면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매사에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생각이 부정적이어서 행복한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매사에 잘못된 점만 찾아내서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도 행복하게 살기 어렵습니다. 행복하려면 매사를 긍정적인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장점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한 것보다는 잘한 것을 보고 칭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긍정적인 분이십니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흉악한 살인범도, 일곱 귀신 들린 여자도, 돈만 알던 세리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새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라 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무려 120년에 걸쳐서 거대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생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큰 민족의 조상과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을 적에 그 말씀을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정든 고향과 친지 곁을 길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나이가 75세나 되는 노인입니다. 무슨 수로 큰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백세에 독자 이삭을 낳았고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열 두 정탐꾼이 다같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왔을 때 열 정탐꾼은 시종 부정적인 보고로 일관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고 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보기도 전에 벌써 패배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는 절대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고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밥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가장 만만한 것을 가리켜 밥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생각이 달라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열 정탐꾼은 불신앙의 사람들이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신앙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부정적인 생각의 소유자들이었고 후자는 긍정적인 생각의 소유자였습니다.

자, 하나님께서는 어느 편을 기뻐하셨을까요? 열 정탐꾼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심으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행복을 맛보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혈통 상으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로서 행복하게 살 특권과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행복의 네 가지 조건을 실생활 가운데 적용하심으로 진실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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