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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와 찬송으로 들어갑시다 (시 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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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찬송으로 들어갑시다 (시편 100:1-5)

  유대인의 제 2경전이라고 하는 탈무드에는 아키바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존경받는 랍비 아키바가 먼 길을 떠납니다. 책을 보기 위한 등잔불과 시간을 알려주는 수탉과 먼 길을 타고 갈 나귀와 성경인 토라(Torah)를 가지고 여행을 출발합니다.
여행 중에 날이 저물어서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한 집의 문을 두드리면서 “하룻밤 좀 자고 가십시다” 그렇게 부탁을 했지만 거절 당합니다. 모든 집들이 다 거절을 했습니다.

  언제나 감사만 하는 아키바는 ‘모든 것을 항상 좋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방에서 자는 것보다 노숙하는 경우에 더 유익을 줄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감사하며 마을 바깥에서 잠을 잡니다.
밖에서 노숙을 하자니까 잠이 오지 않아서 성경을 읽으려고 등불을 켰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서 불을 꺼버립니다. 아키바는 ‘모든 것을 항상 좋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불을 켜고 책을 보는 것보다 불 끄고 자는 것이 더 유익하게 해 주실거야.’ 하면서 감사하며 잠을 잡니다.

  잠을 청하고 있을 때에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나귀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그만 도망을 쳐버립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내일 내가 무엇을 타고 갈꼬’ 하면서 불평하겠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항상 좋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귀가 내게 있는 것보다도 없는 것을 더 유익하게 해 주실 거야’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합니다.

  나귀가 도망을 가는 바람에 수탉도 놀라서 멀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라고는 성경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키바는 ‘모든 것을 항상 좋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수탉이 있는 것보다도 없는 것을 더 유익하게 해 주실 거야’ 하면서 오히려 감사하며 잠을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았습니다. 마을에 들어가 보니까 전날 밤 도적떼가 마을을 습격해서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이고 물건을 다 약탈해 버렸습니다. 만약에 그 마을에서 잠을 잤다고 하면 아키바도 죽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등불을 켜고 오랫동안 토라를 읽었다고 하면 아키바는 도적에게 발견되어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나귀와 수탉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이 소리친다던지 울었을 때 아키바가 발견되어서 같이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키바를 살리기 위하여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방을 거절하게 했습니다. 등불이 꺼지게 했습니다. 나귀와 수탉을 도망가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아키바를 이렇게 지켜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항상 좋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닥치는 모든 것은 나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수단임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가 안 되고 힘들어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감사가 더 큰 감사로 연결될 줄 믿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는가 하는 첫 번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창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보다도 더 귀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있는 누구보다도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해 주셨습니다.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귀한 사람으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 우리는 그의 것이니 감사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그의 것이니 감사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우리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유아독존(唯我獨尊)이나 자존자(自存者)가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보면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24장에는 <땅과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서 18장에는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도 다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나님께서 소유권을 주장하셨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삼중적(三中的인)면에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타락해서 죄 아래 팔렸습니다.
이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피 흘려서 피값을 주고 우리를 다시 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성자 예수님의 것이요, 그리고 성령의 소유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마귀의 소유가 되어보세요. 마귀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우리의 인격을 전혀 관계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들어와서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조종하여서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고 해치는 도구로 삼을 때가 있습니다.

  칼이 주부의 손에 들려지면 온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 사용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그 칼이 강도의 손에 들려져 보세요. 사람을 죽이는 흉측한 흉물이 되어집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아주셨다는 것, 선한 일을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쓰기 위해서 준비해 주셨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같은 물건이라도 누구의 것이 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 200m-300m 쯤 서쪽을 향해서 올라가면 6.25때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가 있습니다. 그 관저 안에 있는 가구들은 내어 버려도 주워 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관하고 경비하고 잘 관리해서 다른 사람이 방문해서 관람을 합니다. 만약 내어다가 판다고 하면 상당히 많은 값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쓰던 물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에 그때에 진정한 가치가 있고 그때에 멋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의 인간은 티끌이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것으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유로써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소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내 삶을 드리고 내 인생을 바치고 내 달란트, 내 물질, 시간을 사용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소유답게 한번 쓰임 받아 보세요. 그때의 우리 인생은 정말 위대한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이니 감사해야 합니다.

  다음은 그의 백성이기 때문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탄의 백성, 마귀의 백성, 어둠의 자식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보시고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 사탄의 백성이 되느냐? 이것은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백성의 행복은 왕을 바로 만나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한 왕의 백성이 되었을 때는 나라가 안정되고 국방이 튼튼해서 어느 나라도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경제가 부강해지고 정의가 구현되고 온 백성들이 행복함에 젖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런 때가 바로 다윗을 위시한 이스라엘 4대 성군 아래서 누렸던 행복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 왕국이 도래하면 어떤 나라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가 하면 다윗이 다스리던 그때, 행복한 그때가 이 땅에 도래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당시의 백성들이 행복했으면 지금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메시아를 사모하겠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별을 국기에다가 새겨놓고 국기를 바라볼 때마다 ‘다윗이 다스리던 때와 같이, 메시아가 오셔서 이루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같은 악한 왕이 다스릴 때는 나라의 경제가 곤두박질합니다.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습니다.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왕을 잘 만나야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을 잘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때로는 지혜롭지 못한 왕을 주셔서 백성을 징계하기도 했고, 지혜롭지 못한 대통령을 주셔서 백성들을 징계할 수도 있습니다.
  백성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지혜로운 왕을 주셔서 태평성대하는 나라를 이루기도 하셨고, 또한 좋은 지도자, 좋은 대통령을 주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축복을 주시기도 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우간다의 이디 아민(Idi Amin)같은 대통령 보세요. 얼마나 악한 대통령이었던지, 자기나라 백성을 수없이 잡아 죽이고, 심지어는 백성의 살을 자기 냉장고에다가 넣어놓고 인육(人肉)을 먹었다는 말까지 있지 않았습니까? 그 나라의 백성들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내가 죽지는 않을까?’ 그러니까 그 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대통령도 있을 수 있다고요.

  미국과 러시아가 지금은 현격한 차이가 나지만 그러나 한 60-70년대 까지만 해도 그 나라가 거의 대등했습니다. 오히려 우주선은 러시아가 먼저 쏘아 올리지 않았습니까? 미국에서는 우주선이 내릴 때는 태평양이나 바다에 내렸는데, 벌써 수십 년 전에 소련은 바다가 아니라 바로 땅에다가 착륙을 시켰습니다. 그만큼 국력이 있고 과학이 발달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같이 이렇게 떨어졌느냐, 당서기장 브레즈네프(Brezhnev)가 다른 나라에서 차관을 얻고 여러 가지 지하자원으로 경제발전이라든지 과학이라든지 이런데 투자하지 아니하고, 전부 백성먹여 살리는 데만 투자를 했다고요. 그때부터 나라가 완전히 처지게 되어서 지금은 미국과는 비교되지 아니하는 나라가 되고 만 것 아닙니까?
  이처럼 대통령을 잘 만나는 것, 지도자를 잘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좋은 지도자를 둔 백성은 그만큼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 1절 이하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와 간구와 도구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임금 잘 만나야, 대통령 잘 만나야만 그 백성이 편안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첫 번째로 기도할 것은 임금, 대통령, 정치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군림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착취하지 않습니다. 5절에 있는 것처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섬기고 있으니까 그 백성된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아니하고 다른 왕을 달라고 해서 섬기다가 우상숭배하고 그것 때문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말씀만 따라가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최고의 영광이요, 기쁨이요, 감사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고많은 사람 중에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다니, 아! 참으로 감사하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게 되니 참으로 감사하다. 늘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니 감사해야 합니다.

  다음은 그의 기르시는 양이기 때문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수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선하느냐? <나는 양들을 위해서 생명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양이 되어보세요. 거기에는 참 만족과 평안함과 안식이 있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목자로 삼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삶은 얼마나 복된 삶을 살았는지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삼은 사람의 고백이 바로 이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인도하는 목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여러분들을 인도하고 있습니까? 여호와를 목자로 삼고 따라가는 양은 행복합니다. 넉넉합니다. 안식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잔이 차고 넘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양에게는 언제나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텔레비전을 나의 목자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 보는 사람. 어떤 사람은 술을 나의 목자로 삼는 사람이 있어서 언제나 만나면 술기운이 아직도 안 깨어있는 사람. 어떤 사람은 돈을 나의 목자로 삼아서 어디든지 돈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은 권세를, 어떤 사람은 향락을, 어떤 사람은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며 목자로 삼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뒤에는 언제나 허무와 불평과 불만과 분쟁과 파멸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것, 나를 양으로 삼아주신 것이 감사해서 언제나 그 말씀 따라갈 수 있는 그래서 그 목자 아래서 양의 행복을 늘 누리며 찬송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요,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요, 우리는 기르시는 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은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때로 좀 힘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알게 되면, 깨닫게 되면 그때 우리는 어떤 환경 가운데서라도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감사하게 된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해 줄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찬송할 수가 있었습니다.


4. 찬송함으로 하나님께 나옵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감사할 뿐만 아니라 또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1절에 보면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여기 즐거이 부른다는 말의 원어는 <큰 소리로 소리지르라>는 뜻입니다. <고함치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에는 <환성을 울려라>고 했습니다.
2절에 보면 <노래하면서 나아갈찌어다>. 4절에 보면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며 그 이름을 송축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감사뿐만 아니라 찬송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에 들어올 때마다 감사가 넘치고 찬송이 넘쳐흘러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찬송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습니까? 기쁘고 즐겁게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98편에 보면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찌어다.> 시편 5편에는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라>고 했습니다.
시편 32편에는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자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계시록 7잘 10절에는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고 외쳐서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월드컵 때 골 하나가 들어갔을 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모든 집에서 “와~” 하니까 대한민국이 다 흔들거리지 않았습니까? 백만 명씩 모여서 함께 함성을 지를 때에 천지가 떠나가는 것같은 함성이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노래만 할 뿐만 아니라 베풀어주신  은혜를 “와~”하고 기쁘게 외치라 이 말입니다. 그것도 노래라 이 말입니다. 그것도 찬송이라 이 말입니다.
시편 63편에는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서 네 손을 들리이다>고 했습니다. 시편 134편에는 <성소를 향하여서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141편에는 <나의 손드는 것이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공동번역에는 <치켜든 손 저녁에 제물로 받아주소서.> 손을 드는 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손을 들고 찬송하는 것은 ‘내가 이 찬송을 제물로 드립니다’ 하는 뜻입니다. ‘내가 항복합니다. 내 찬송을 받아주시옵소서.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데 이 손드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제물되기를 바랍니다.>하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47편에는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시편 98편에는 여호와께서 큰 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찌어다>. 이사야 55장에는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찌어다>. 손뼉을 치면서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도 손바닥을 치면서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손바닥은 왜 칩니까? 즐거움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즐거우면 자연적으로 박수가 막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박수를 치면서 즐거움의 표시로 박수를 치면서 하나님 앞에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악기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수금과 비파와 열줄 비파와 나팔과 소고와 현악과 퉁소와 큰소리 나는 제금과 높은 소리나는 제금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시편이 지어질 당시에 있던 모든 악기를 다 총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라 이 말입니다.
시편 149편에는 <춤을 추면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150편에도 <춤추어 찬양하며.> 사무엘하 6장 14절에는 <다윗이 여호와 앞에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 8절에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사무엘하 6장 16절에는 <다윗이 여호와 앞에 뛰놀며 춤추었다>고 했습니다.
시편 134편에는 <서서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앞에 재롱을 피우듯이 그렇게 노래하고 외치고 박수치고 춤추고 손들어서 모든 악기를 총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이를 따지고, 점잖을 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까’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기쁨의 찬양이 사라진다면, 찬송하는 것이 싫어진다면 내 신앙이 그만큼 떨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신앙을 다시 회복하여서 찬송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즐겁게 찬양하고 기쁨으로 찬양하고 손들고 찬양하며 박수치며 찬양하고 뛰놀면서 찬양하는 것을 우리는 멸시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런 것을 비웃은 미갈을 하나님께서 일평생동안 석녀(石女)로 살도록 징계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찬양할 때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마치 유치원생이 천진난만하게 부모 앞에서 재롱을 부리듯이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찬송을 기뻐 받으시고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보세요. 지난 6개월 동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보세요. 어떻게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설교 다음에 부를 찬송이 403장 입니다. 거기에 보면 “어찌 찬양 안 할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예수안에 있는 우리 한량없이 즐겁고 주 성령의 위로함이 마음속에 차도다
  천국 음악소리 같은 은혜로운 그 말씀 끊임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이 세상의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주님 안에 보호받는 우리마음 편하다
  늘 깨어서 기도하고 저 천국을 바라며 주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 안 할까」

  ‘어찌 찬양 안 할까’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데, 찬양 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 찬송, 참 번역을 잘 했습니다만, 원어는 이렇습니다.

  끊임없는 노래 속에 나의 생명은 흐르도다.
  이 땅의 슬픔, 위로, 새 창조를 환호하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찬송을
  울려나는 음악소리 듣노라.
  그 소리 내 영혼 속에서 메아리치니
  아, 어찌 찬양하지 않으리.
  나의 기쁨과 위안 사라진다 한들
  나의 구세주 살아계시니 어떠하리.
  그가 어두운 밤에 노래주시니
  어두움이 나를 둘러싼들 어떠하리.
  주님의 피난처에 숨어있으니
  폭풍우인들 내 영혼 깊은 곳의 평온을 흔들 수 없도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주시니
  나 어찌 찬양하지 않을까

  시인의 이 고백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찬양을 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의 집 마당을 밟고 성전의 문에 들어설 때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입과 우리의 손과 우리의 마음에는 감사와 찬송이 가득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감동케 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아까 읽었던 시편 100편을 다시 한번 큰소리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5절까지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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