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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사랑하라 / 고전 1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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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사랑하라
고린도전서16:21-24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16:21-24)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고린도전서의 끝부분으로 축복의 祈願입니다.  내용은 대개의 바울 서신에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서신과 좀 다른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축복만 말하지 않고 저주를 언급한 점이고, 둘째는 자신의 사랑을 언급하는 것으로 편지를 맺고 있는 점입니다.  먼저 축복을 말하기 전에 저주의 경고를 하고 있는 점입니다.  왜 축복을 말하기 전에 저주를 말할까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삐딱한 사람이 많아서 그럴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축복의 반대편에 저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전에는 축복만 있지 않고 저주도 있습니다.  축복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습니다.  축복을 받든지, 저주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중간 지대가 없어요.

  현대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多元主義입니다.  절대적 존재나 절대적 진리를 부인합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절대 유일의 神이나, 절대 유일의 계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黑白 論理, 혹은 二分法적 논리를 아주 싫어합니다.  예를 들면 絶對 善도 없고 絶對 惡도 없습니다.  선과 악은 항상 공존합니다.  행복도 불행도 공존합니다.  이런 중립적 상태는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울이 말씀하는 축복이 아니면 저주라는 식의 말씀은 먹혀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성경은 흑백 논리와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과 우상, 선과 악, 신앙과 불신앙, 진리와 비진리, 순종과 불순종, 救援과 刑罰, 천국과 지옥, 永生과 永罰!  모든 것이 흑백 논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일련의 대립된 사안들을 보면 다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한 편에는 하나님, 善, 신앙, 진리, 순종, 구원, 천국, 영생, 등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 우상, 불신앙, 비진리, 불순종, 형벌, 지옥, 영벌이 있습니다.  절대 유일의 하나님을 믿고 그 계명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것이 성경 계시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창세기부터 볼까요?  에덴 동산은 인류의 始祖인 아담과 하와에게 축복의 낙원입니다.  그 樂園에 살 수 있는 유일의 조건은 하나님을 믿고 그 계명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순종은 곧 축복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조건을 위반하면 어떻게 될까요?  "정녕 죽으리라!"(you will surely die)  정말 죽나요?  그렇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했을 때 에덴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음의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도 고통이 따릅니다.  生計를 위해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채로 두려움 속에 살게 됐습니다.  여자는 출산의 고통, 남자를 사모하고 그 다스림을 받는 종속적 고통을 받게 됐습니다.  환경은 파괴되고 저주를 받아 생산성은 떨어지고 험난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이렇게 原始 역사부터 시작됩니다. 

  족장 시대는 어떤가요?  족장들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 與否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믿고 순종한 일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義로 여기시고"(창15:6)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7-18)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는가?  아니면 믿지 않고 불순종했는가?  그 표준에 따라서 사람이 분류됩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이스마엘과 이삭이 그렇게 해서 나뉘어졌습니다. 

  출애굽과 광야 시절에도 축복과 저주의 원리는 여전합니다.  광야 생활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도 역시 "순종"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민32:11-1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28:2)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신 30:15-18)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한 일은 바로 이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수8:34) 

  왕국 시대에 列王들에 대한 평가도 철저한 二分法입니다.  축복받은 왕과 저주 받은 왕입니다.  축복 받은 왕은 신앙의 왕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왕입니다.  저주받은 왕은 불신앙의 왕이요 계명을 지키지 않은 왕입니다.  역대 왕들의 행적은 오직 두 종류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다윗의 길"로 행한 왕입니다.(왕상11:38,15:3,18:3,왕하22:2,대하34: 2) 둘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왕입니다.(왕상16:26,22:52,왕하3:3,10:29,13:2, 11,14:24,15:18,24,28)  다윗의 길은 신앙의 길입니다.  여로보암의 길은 불신앙의 길입니다.  다윗의 길로 걸어간 왕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여로보암의 길로 걸어간 왕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왕국의 興亡盛衰가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원인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왕하17:7-8) 
 
그러면 신약의 가르침은 어떨까요?  흑백 논리와 이분법적 논리는 여전히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사랑만 말씀하시고 저주는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을 한 번 보세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말씀대로 살면 든든히 살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무너진다!  주님의 교훈도 요약하면 심판과 구원, 영생과 영벌, 천국과 지옥, 순종과 불순종의 이분법입니다. 
  모든 성경이 말씀하는 축복과 저주의 이분법을 명심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매일매일 중대한 삶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30:19-20)


주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최후 통첩이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저주받을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 주님을 사랑치 않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또 그런 사람은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저주를 받으라는 말입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물론 고린도전서의 일차적인 독자는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궁극적인 독자들은 인류 전체입니다.  이 말씀은 인류를 향한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를 받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받을 요인이 될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출발점을 바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본 위치가 나의 위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내 자신의 위치입니다.  내가 인생을 뭐라고 평가하든지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관입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성경은 전 인류를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아담으로부터 현존 인류까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냥 하나님을 떠난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게 진노하시고 멸망에 버려두셨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없는 삶을 살면서 온갖 죄악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8-31)  인간은 지금 심각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앞에 놓여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인간의 종교적 노력이나 인격 수양 정도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억만 금의 돈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목숨을 버린다 해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인간 스스로에게는 전혀 구원의 대책이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서 있는 위치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돌이킬 대책이 없는 인간! 

  바로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를 대신 해결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 방법이 뭡니까?  바로 용서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무 근거도 없이 죄인을 용서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하기시 위해서 전 인류의 죄 값을 자기 아들에게 갚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대신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마다 자녀로 받아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주님의 사랑은 죄인에게 최후 유일의 구원 대책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구원 방법이 있다면 말씀해 보세요.  죄인에게 용서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멍에를 인간 스스로 갚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종교적 詐欺요 거짓입니다.  세상 종교가 다 그래요.  "너는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  "너 스스로 해결해라!"  그래서 지금 인류가 이 지경까지 왔습니다.  아무튼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용서받으라고 하신 것은 최종 유일의 대책입니다.  즉, 사랑은 전 인류를 향하신 최후 통첩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다면 그는 영원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惡人 중에 가장 나쁜 악인은 사랑을 거절한 惡人입니다.  사랑을 끝까지 거절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자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의 저주란 말은 "αναθεμα"란 말입니다.  헬라에서는 신에게 바쳐진 것을 "αναθεμα"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용법에서는 멸망하기 위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간 같은 경우입니다.(수7:24-26)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이 외친 구호가 바로 "ΑΝΘΕΜΑ ΙΗΣΟΥΣ", 즉 "예수를 저주하라"는 말입니다. (행17:5,28:19)  주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를 최후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 더 이상의 긍휼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버리실 수 밖에 없습니다.  저주란 주문을 외우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관여하시지 않고 버리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그것으로 인생은 끝장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세요.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떠나버리신 주님이 아닙니다.  지금도 죄인들을 향해서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세요.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μαραν αθα!"(      or      )  직역하면 "주여 오시옵소서!" (Come, O Lord!)라는 뜻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저절로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리한 사랑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주를 사랑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φιλει"입니다.  사랑이란 단어에 대해서 많이 들으셨을 거예요.  "φιλεω"는 "αγαπαω"보다 낮은 등급의 人情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 때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요21:15-17)  그러나 베드로는 "φιλεω"로 대답했을 뿐, 끝까지 "αγαπαω"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님을 "φιλεω"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비록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분량만큼 사랑하지 못한다 해도 할 수 있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즉, 먼저 주님을 사랑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최소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만큼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한 결과입니다.  계명을 지킨 결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결과로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먼저 사랑이고 다음이 지키는 겁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의 사랑을 거절한다면 영원히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편지를 맺습니다.  바울 편지는 대개 축복의 문구로 끝맺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6:18)  가장 많은 내용은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는 내용입니다.(엡6:24,빌4:23,골4:18,살전5:28,살후3:18,딤전6:21,딤후4:22,딛3:15,몬1:25)  그런데 고린도전서만큼은 자신의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마감합니다.  무슨 별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고린도 전서의 내용에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는 책망과 훈계의 책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가장 많은 책망을 했고,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분쟁에 대해서, 다툼과 소송에 대해서, 패륜죄에 대해서,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우상 제물에 대해서, 성찬에 대해서, 은사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등등.  책망을 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장관은 대통령 앞에서 鈍馬를 채찍질 해달라고 했습니다.  정말 채찍질이 좋아서 한 말이 아닙니다.  아첨 떠느라고 한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윗사람에게 "많은 지도 편달을 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鞭撻이란 채찍으로 매질한다는 뜻입니다.  말의 뜻을 알고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잘못할 때마다 채찍으로 매질을 해달라는 말입니까?  실제로 매질을 한다면 당장 법정에 고소할 겁니다.  이 세상에 책망을 좋아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정말 책망하고 싶으면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 첫 번째 원칙이 바로 사랑으로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한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을 마지막에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를 책망한 것은 다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남을 책망하지 마세요.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자식이든지 친구든지 마찬가집니다.  중심에서 사랑이 솟아날 때 책망하세요.  징계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징계하신 이유는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징계는 분풀이요 복수일 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책망은 사랑의 정신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내가 한 모든 책망과 교훈들을 달게 받을 줄 믿는다!"  고린도 전서의 마지막 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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