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자 / 눅 1:75

  • 잡초 잡초
  • 467
  • 0

첨부 1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자 / 눅 1:75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에 가브리엘을 보내셔서 요한의 탄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가랴는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세례 요한의 수태고지를 전달받고 그 사실을 믿지 못하였기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가 벙어리 되었던 것은 자신과 엘리사벳이 나이 많아 늙었으니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으로 그 징표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눅 1:20)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이 태어나자 곧 그 이름을 '요한'이라 짓고 혀가 풀려 제일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구약의 예언은 찬미와 새 노래로 나타나는데 신약 예언의 시작인 이 찬가 또한 그렇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주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시리로다." 라고 합니다. 사가랴는 구속 역사를 언급하여 하나님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구속에 대한 예언과 약속과 표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구속은 그때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세주를 보내심에 있어서 특히 이 민족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고 부릅니다.

사가랴는 이제 메시야께서 친히 이루실 구속 역사를 인하여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메시야의 구원으로 계속해서 섬김의 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말씀하시며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 1:75)고 합니다.

우리의 섬김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먼저 성결로 섬겨야 합니다.

'성결'(호시오테티)은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경건성과 관련하여 쓰이며 구원의 시대에 사는 신자들의 삶을 묘사합니다. 성결은 중생으로 얻어진 새로운 본성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태초에 그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 형상 내에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엡4:23)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4)고 합니다.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결로 섬기기 위해서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여기서 타락한 본성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본성도 인간의 신체와 같이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로 도우며 힘을 주고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본성은 옛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이 타락한 본성을 물러 받았습니다. 이 타락한 본성은 몸 안에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타락한 본성과 함께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타락한 본성은 옛 사람처럼 간교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모든 성도를 안에서 옛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쇠하고 시들어 없어져 갑니다. 또한 이 옛 사람은 썩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 있는 죄는 영혼의 기능을 침식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죄가 날마다 더욱 악화되어 결국은 파멸시킵니다. 또한 "유혹의 욕심을 따라"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향한 성향과 욕망은 곧 유혹의 욕심입니다. 유혹의 욕심은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약속하나 인간을 더욱 불행 가운데로 인도하며 배신과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유혹의 욕심을 입으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추한 낡은 옷과 같으니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그 모든 욕망은 억제되고 극복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욕심은  "구습" 즉 회개하지 않고 이방신을 섬겼던 상황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합니다. 타락한 습관을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습관을 따라 행해야만 합니다. 은혜로운 습관을 포용하고 지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악행하기를 그친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는 "날마다 더욱 더 새로워진 심령을 갖기에 합당한 수단들을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24절)고 합니다. 새 사람은 새로운 본성,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합니다. 새로운 본성은 새로운 생활 원리와 소생시키는 은혜에 의하여 활력화 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을 살게 하여 주며 기독교가 요구하는 거룩한 생활에 이르게 합니다. 이 새 사람은 그의 솜씨가 참으로 탁월하시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 또는 만들어졌습니다. 또 "하나님을 따라"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고 그의 위대한 본과 원형을 따라감을 말합니다. 인간 영혼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을 타락한 인간의 비참함과 죄 됨을 나타내 줍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모습을 닮았다함은 새로운 피조물의 아름답고 거룩하고 복됨을 말합니다. 이 새 사람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거룩함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계명에 신실하게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삶 속에서 성결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어떤 곳에 아름다운 색유리로 창문을 만들고 그 위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Glory to God in the Highest) 이라고 새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의 돌팔매로 유리 한 쪽이 깨지면서 영어 글자 'e'가 떨어져나가 "Glory to God in the High st."(큰 길에서 하나님께 영광)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 거렸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딘지 납득이 가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어수선하고 욕설이 나며 심지어 불신과 불평이 넘치는 큰 거리와 골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분별력이 없이 세파 속에 뒤섞여서 아무런 구별이나 특징도 없이 휘몰리며 죄를 즐기는 '속물의 생활'도 추하지만 거룩함과 경건을 잘못 이해하여 발에 흙 묻히기를 거절하고 스스로 정결하다고 자만하면서 어려운 삶의 현장에는 장님이 되는 '수도원적인 신앙'도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남다른 특권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곧 남다른 책임이 주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곧 값없이 죄 용서받고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죽어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빚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롬1:14).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위해, 내 나라를 위해 눈물을 쏟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큰 거리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다운 신앙인도 찾고 계십니다.( 거리에서 영광을 -예화 뱅크)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 어느 지방을 여행할 때였습니다. 그와 동행하던 한 육군 대령이 주머니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더니 그에게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양하자 이번에는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담배도 피우질 못합니다.'라고 사양하더니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9살이 되던 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저를 부르시더니 일생 동안 술 담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굳은 약속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것입니다.' 링컨이 울먹거리며 말을 끝맺자 대령은 '참 훌륭하십니다. 나도 그런 서약을 지킬 수 있었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존경을 표했다고 합니다.

삶 속에서 성결로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다음 의로 섬겨야 합니다.

'의'(디카이오쉬네)는 옳음 정의의 뜻입니다.  70인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 5:7)고 합니다.

랍비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가장 많은 공로가 쌓이게 되는 행위들 중 하나로서의 자선행위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를 지칭하는데 사용됩니다.

지혜자는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14:34)고 합니다.

'의'는 윤리적 측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 측면에 대한 포괄적인 '올바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진정한 번영은 경제력, 군사력과 같은 외형적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 신앙에 따른 공의의 실현에 있습니다.

  의로운 정치, 사람과 사람간의 공평무사한 평등, 경건한 신앙에 대한 공적인지지, 미덕의 전반적 실천과 공인, 유덕한 자의 보호와 보존, 타국인에게 대한 동정과 자선은 "의로움"이라 불러집니다. 이러한 의로움은  권좌를 받들어 주고 국민의 마음을 고양시키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 적합한 국가를 만들어 주며, 그 하나님의 은총은 그들의 성민으로서 높은 민족이 되게 해 주십니다.

이사야선지는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사 32:16)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7)”고 합니다.

  사역자들은 율법을 설명하고, 재판장들은 그 율법을 집행할 것이며, 이들은 모두 매우 현명하고 충성되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악한 자들은 선하게 되고 선한 자들은 더 선하게 됩니다. 모든 종류의 백성들, 즉 가난하고 천하며 무식하여 광야처럼 무시당하는 자들과, 부유하고 훌륭하고 유식하며 아름다운 밭처럼 존경받는 자들에게 다같이 사물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훌륭한 명령의 원칙과 선과 악, 죄와 의무에 대한 자각이 있게 됩니다. 또는 그 나라 모든 지역, 즉 평원과 울타리를 한 땅, 시골과 도시, 좀더 거친 지역과 보다 더 경작되고 개량된 지역, 어디서나 정의가 잘 집행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우리가 그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공평이나 법칙을 들여왔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그것에 의해 구원받아야 하는 의를 들여왔습니다.

내적인 평화가 의가 내재할 때 따라옵니다(16절). 의의 일이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자들은 이 복된 결과를 체험하게 됩니다. 의 그 자체가 평화이며, 그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 입니다. 마음의 거룩한 평정과 안심입니다. 그것으로써 그 영혼은 스스로를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이 즐거움을 방해할 권세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평화와 평안, 그리고 영원한 안전은 의의 길과 일(작용)에서 기대될 수 있으며 발견되게 마련이란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의의 역사(공효)는 평화입니다."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 가운데서, 풍성한 참 기쁨 즉, 순종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현세적 보상을 맛보게 됩니다. 비록 의의 역사가 고생스럽고 값비싼 것일지라도, 또 우리로 멸시받게 할지라도, 그것은 평화입니다. 우리의 책임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해 주는 평화입니다.

"의의 결과는 평안과 안전입니다." 우리 시대의 끝까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영원의 끝없는 세대까지도 그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희생과 제사의 율법적 예배가 아니라 성결과 의의 영적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록펠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받은 사나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세 가지 면에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자가 가장 부유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주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적은 장수입니다. 그는 98세까지 살았는데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고 깨끗하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록펠러가 이런 3가지 기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바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일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으며, 성경을 매일같이 읽었고,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 때에는 성경을 읽어 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성경을 들으면서 말씀을 날마다 대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늘 말했다고 합니다.(록펠러의 기적)

의로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그리고 두려움이 없이 섬겨야 합니다.

두려움이 없이(아포보스)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함께 놀라지 않는 다는 의미도 갖습니다. 두려움과 놀라움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원수들로 인한 두려움과 놀람이요 또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놀라움입니다. 

섬기게 하리라(라트류에인)는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철저한 복종과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철저히 낮아진 종이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인을 엄한 분으로 상상한 게으르고 비이성적인 종의 두려움같이 노예적 두려움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고통과 놀램이 있는 두려움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율법적 정신의 두려움 즉 종의 영이 갖는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적 정신 곧 양자의 영이 갖는 담대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사랑의 두려움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 두려움은 공경하고 순종하는 두려움이어야 하며, 각성시키고 소생시키는 두려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섬김에 있어서 모든 두려움과 놀람이 없이 섬기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은혜입니까?  모든 원수들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과 놀람을 없이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된 종으로서의 두려움과 놀라움도 없게 하시고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고 경배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김으로 성결한 안전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해 받음을 두려워하는 일들로부터 평온한 사람들처럼 경건한 안보와 마음의 평정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프랭클 박사는 인생을 이런 예화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와 같이 일단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그 무대 위에 있게 된다. 이제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비춘다. 객석의 조명은 컴컴하다. 무대 위에 일단 올라서면 관중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 개의 검은 구멍만 보일 뿐이다. 그곳에는 어떤 스피커 장치도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 구멍으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듣거나 그 구멍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구멍 안에 인간을 심판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 수 있다. 그 사실은 인간에게 위로가 되며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활력을 주고 동기를 부여해주고 인도자가 되어준다. 결국 그 사실은 무대 위에 있는 동안에 인간의 행동을 결정해 주게 된다. 이제 무대 위의 배우가 그 검은 구멍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기쁘게 해드릴 것을 결심하는 순간 그 배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극은 끝이 난다. 박수가 쏟아진다. 그리고 조명등에 불이 들어오고 마침내 청중들의 얼굴을 본다."

그 무대 위의 배우는 우리이며 구멍 안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분을 뵐 수도, 음성을 들을 수도 없지만 우리의 연기를 말없이 평가하시는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제하게 되고, 근신하게 되고, 동기를 부여받고, 그리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격려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는 실패를 열매 맺는 경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슈퍼바이블-무대 위의 연기자 인생)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주께 하듯 하되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며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모두가 됩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