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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 슥 4:1~6 (고후 12:7~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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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본문 : 스가랴 4:1~6 (고린도후서 12:7~10 참조)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복된 삶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인간은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 첫째가 소유를 늘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욕심을 줄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주로 앞의 방법을 택했고 동양 사람들은 주로 나중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서양에서는 물질 문명이 발달했고 반면에 동양에서는 종교와 철학 같은 것이 발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은 그 사물이나 사건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사실보다 시각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실례를 들어봅시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출애굽 사건 때문에 유월절이라는 명절도 생겼습니다. 그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열두 지파가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국가로서의 면모도 갖추게 되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그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분명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볼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출애굽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애굽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봅시다.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까? 애굽 사람들이 볼 때 그것은 하찮은 사건에 불과합니다. 애굽의 변방에 살던 히브리 노예들이 밤중에 몰래 달아난 사건이 아닙니까? 그래서 애굽 왕조의 역사책에 기록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3.1 운동은 민족 정기가 발휘된 역사적인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정작 일본 사람들이 볼 때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사건에 불과합니다. 같은 사건을 보는 시각이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때문에 어떤 가치관과 어떤 세계관, 어떤 시각을 가지고 현실을 보고 또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현실과 사건을 보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굉장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심하게 방황하다가 뒤늦게 주님의 제자가 된 러시아의 극작가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내 인생은 변하기 시작했다. 나의 가치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좋던 것이 지금은 무가치하게 되었고 반면에 예전엔 하찮게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인생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뀐 사람입니다. 그가 전에 좋아했던 것들이 전혀 값어치 없는 것이 되었고 반면에 전에는 무가치하게 생각했던 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나 역경, 심지어는 사탄의 가시라고 표현된 극심한 고통까지도 참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뭐라고 털어놓고 있습니까?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1~4)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기에게 대해서 갖고 있는 오해를 풀고 거짓 지도자를 추종하는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해서 자신의 신비 체험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셋째 하늘이라는 것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가 그것을 고백한 참 뜻은 다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의 영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까지 올라갔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여기 기록된 낙원이라는 단어는 원래 페르시아에서 온 말로서 '담으로 두른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페르시아 왕이 어떤 신하와 더불어 특별한 친분을 맺고 그 신하에게 은혜를 베풀려면 그 신하를 불러서 왕의 동산을 보여 주며 함께 그 동산을 거닐었다고 합니다. 은밀한 정원을 보여 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야말로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는 그 신비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함께 사랑을 주고 받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체험에 뒤따른 것은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그의 표현의 따를 것 같으면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고후 12:7) 하나님께서 그에게 찌르는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겪은 그 극심한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간질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편두통과 같이 심한 두통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는 안질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당시 지중해 연안에 많이 유행하던 학질이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여간 그는 몸에 지닌 가시가 너무도 견디기 힘들어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가시가 그에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응답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그렇습니다! 고층 아파트일수록 그 기초를 깊이 파야 안전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현실에 안주하려는 삶의 태도가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뭐든지 습관적으로 하는 게으르고 나태한 마음의 자세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할 것 같으면 그것은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에 출석을 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교회의 어른이라고 할지라도 깨어 있지 못할 것 같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를 깨어 있게 만듭니까? 그렇습니다! 아픔이 우리를 깨어 있게 만듭니다. 고난이 우리를 깨어 있게 만듭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과 아픔의 과정을 겪은 사람만이 바울 사도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선지자 스가랴는 학개, 말라기와 함께 포로기 이후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곳으로부터 돌아와서 스룹바벨, 느헤미야 등과 함께 성전 재건 작업을 하다가 사마리아와 주변국들의 반대로 그 성전 건축이 잠시 중단되었던 시기에 주로 활동했습니다. 그가 기록한 이 책은 상징적인 환상이 많기 때문에 종종 에스겔서와 비교되곤 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영광된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강한 소망이 등장하는데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 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슥 4:2~3)

  스가랴서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정결케 하여 성전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십니다. 그리고 스가랴서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정치 지도자 스룹바벨에게 말씀으로 새 힘과 용기를 주고 계십니다. 여기서 순금 등잔대는 새로 세워질 성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스룹바벨이 재건할 성전은 그 옛날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초라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역사는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스가랴서 4장 6절 말씀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더 우리 자신에게 속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얼마나 더 사로잡혀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될 것이라는 황금만능주의 우상에게 얼마나 더 끌려 다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야 하고 또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먼저 내가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살아야 합니다! 살기 위해서 먼저 깨어나야 합니다! 내가 먼저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깨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살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복을 주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깨어 기도할 것 같으면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 귀한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그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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