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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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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편 23:5~6 
제목  내잔이 넘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예배의 자리로 찾아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가 요즘 살피고 있는 시편 23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4절, 5-6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했는데 이제 주인과 손님의 비유로 바뀌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받아 누리는 축복을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는 다 표현할 길이 없어서 지금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이제 주인과 손님의 비유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시적 통일성이나 아름다움만 가지고 말한다면 다윗을 혹 비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윗은 시를 위한 시를 쓰지 않고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나타내기 위해서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를 가지고는 도무지 다 나타낼 수 없는 자기의 심정을 이제는 무한한 호의를 베푸시는 주인과 예기치 못한 환영을 받는 손님으로서의 소재를 가지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앞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5절에 보니까 부족함이 없다는 자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말할 수 없이 풍성한 것 예비해 두시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풍성한 잔치에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도무지 자격 없는 자들을 아주 귀한 손님으로 영접하시고 모든 좋은 것에 만족케 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큰 잔치를 베푼 사람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준비해놓고 종들을 보내어서 초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계신 여러분 모두를 당신의 하늘 잔치 손님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 하늘잔치의 맛을 오늘 보게 하시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의미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초청에 우리가 명단에 들어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복음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니까 만방에 초청장을 보내서 울산광역시에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다시 부르셔서 당신 잔치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잔치에 우리가 어쩌다가 초대받은 손님 되었습니까? 우리가 좀 탁월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실력이 좋고 무슨 가진 것이 많아서 이 티켓을 따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서는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은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의 착한 행동도 속에 들여다보면 다 이기적인 욕망으로 변색되어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뛰어봤자 하늘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도토리 키 재기 이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냥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땅으로 보내시고 만방에 있는 백성들을 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아주 좋은 상징이 됩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시고 만방의 백성들을 오라고 하시는 심볼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 그 떡과 잔을 마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용서를 믿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 초대를 군데군데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읽어 보시면 “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초청하고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나와서 듣기만 하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약속한 확실한 은혜니라.”(사 55:3)이 초청의 축복은 언약을 통해서 누리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얻게 되는 축복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이 초청에 포함된 사죄의 축복 역시 언약 안에서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초대는 성경의 맨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 21:6) 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에게 보내신 초청장입니다. 목마른 자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초청장입니다. 굶주린 인생을 향해서 “여기 잔치의 상이 배설되어 있으니까 너희 인생들아 굶어죽을 필요가 없다”고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23편 5-6절도 동일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과분한 초대를 받은 손님입니다. 여기 우리 앞에 예비 된 잔칫상이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는 표현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상을 베푸시고”란 잔치의 “상을 차리시고 예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극진한 손님으로 예우하시는 풍속은 지방마다 다릅니다. 손님 반갑게 맞이하는 한국 사람들의 스타일은 뭐죠? 손님이 대문 열고 들어오면 버선발로 쫓아가서 맞이하는 게 최상급의 손님 대우 방식입니다. 그러나 여기 성경을 기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 오면 종들이 달려가서 발부터 씻깁니다. 그리고 주인이 나가서 머리에다 기름을 부어서 잔치 석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면 그 손님은 vip로서 가장 중요한, 가장 귀한 손님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서양에는 아직도 그런 풍속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피로연이 결혼식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흘씩 굶은 사람 같아요. 결혼식 끝나기가 무섭게 가서 음식 먹겠다고 달려가는데 그렇게 하는 문화는 조금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배고픈 시절 지났지 않습니까?

신랑신부 주빈석 앉히고 신랑부모, 신부부모 앉지만, 그 손님들 가운데서 아이들이 자라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 한분 모시고 ‘여러분 오늘 이 축하연에 참석하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오늘 귀한 손님 한분을 꼭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그날 잔치에 특별한 손님 한분을 소개하는 것 아직도 그런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여기실까요? 여러분 아마 수없이 듣긴 했는데 늘 성도들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더라고요. 천국이야기인데 예수님이 사람들 도착하면 “왔나? 고생했지 잘 왔다” 늘 이러다가 목사가 도착하니까 달려가서 영접을 해서 보던 집사가 마음이 상해서 “세상에 천국도 꼭 세상 같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예수님하고 따지니까 뭐라고 대답합디까? “집사야 네가 몰라서 그렇다 얼마나 오랜만에 목사 한사람 왔다고, 오랜만에 목사가 도착하니까 환영한거지 목사라고 환영한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목사 아닌 사람은 다 좋아하더라고요.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여기실까요? 하나님 눈에 우리는 존귀한 자라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도다.”(시 16:2)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셔서 그가 존귀히 여기시는 손님으로 대우하신다는 사실 앞에 황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는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귀한 손님입니다. 다른 성경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눈길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그 그윽한 눈길을 주고 있는 것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람만 나타났다고 하면 얼굴 표정이 밝아 질 수 있는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지요. 하나님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조용히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비하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그래서는 안 됩니다. 가끔 “은사가 뭡니까?” 하면 “은사도 없어요” 이러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거든요.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순간에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다 하나님께서 주셨대요. 하나님은 주셨다고 그러는데 여러분은 없다고 그러면 배달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죠? 사고가 어디에서 생겼을까요? 자기비하 때문에 생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존귀한자로서 인정하십니다. 영접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대상이 된 성도는 아무도 자기를 학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더라도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시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서로를 향해서 한번 인사를 해볼까요? “당신은 존귀한 분입니다” 한번 이야기 해 보세요. 한번 해서는 잘 안 믿더라고요. 한 번 더합시다. “당신은 존귀한 분입니다” 자기 아들의 보배로운 피로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셨습니다. 흠 없이, 티 없이, 주름 잡힌데 없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로 영접하십니다. 아들 두신 분들 아무나 며느리 맞이하려고 합니까? 우리 집 며느리로 오는 사람은 예쁘고 착하고 정말 좋은 사람을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어 하잖아요?

여러분과 제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이 준비하신 신부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머리가 좋던지 나쁘던지, 얼굴이 개성 있게 생겼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여러분은 다 하나님께 존귀한 자들입니다. 키가 좀 작아도 상관없어요. 키는 아무리 커도 하늘에 안 닿거든요. 발이 땅에 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서 날 받아주셨다. 나를 존귀히 여기신다 이거 알게 되면 자다가 일어나도 싱글벙글, 기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항상 우리가 누구인지 잊어버려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시는지 망각하니까 어리석게도 바깥에 있는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하고 행동이 같아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고이 씻기고 사랑을 베푸시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여러분이 처신하는 것이 달라져야 합니다. 향유를 부어서 여러분을 귀빈으로 하나님이 맞이하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귀한 자녀입니다.

복음은 우리와 같은 자들을 과분한 호의로 영접하신 하나님에 관한 소식입니다. 세상에서조차 인정함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부르셔서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여러분의 귀로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초청 앞에 감격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황공한 대우 앞에 몸 둘 바 몰라 하는 그가 건강한 성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나 깨나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주일날 여러분이 와서 부르는 찬송은 글 읽을 줄 알고 곡 따라 하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결코 아닙니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양하리라”

본문의 다윗과 함께 성도들이 감격해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환대가 원수가 보는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포로 된 원수가 있는 자리에서 베풀어지는 승리의 잔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장군은 나가 싸워서 적장을 포로로 묶어둔 자리에서 황제가 나와 그 장수를 칭찬하고 그 장수에게 영예를 돌리는 순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 선거를 하니까 기호 1, 2, 3, 4 다 이렇게 나오는데 당선되는 사람은 한사람 밖에 없어요. 그렇죠? 나머지 사람은 초청 받아서 취임식에 참석 할 수 있는 영광 밖에는 없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서로 각축하고 서로 이기려고 그랬는데 그 사람들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내가 승자로서 취임하고 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평소에 패망하기를 바라는 그들이 목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베푸시는 과분한 호의를 받은 자를 일컬어서 성도라고 합니다.

저는 고향이 경상남도 남해입니다. 열살 때 고향을 떠나서 이사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다섯살 때 신앙생활 하기 시작했는데 고향마을에는 모두가 씨족이잖아요. 삼촌, 아저씨 이렇게 걸리는 관계들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얼마나 핍박을 했는지 몰라요. 제사 지내면 우리가 거의 다 감당을 했으니까요. 제가 이래도 7대 장손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니까 그런 후원이 끊기니까 얼마나 문중에서 핍박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으니까 남편 돌아가신 다음에 그곳에선 도무지 신앙생활 할 자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외가동네 예수 믿는 사람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고향에 가본 기억이 참 없습니다. 한두번 갔을까요? 어머니가 일부러 안 보내려고 그랬어요. 가면 고향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 합니까? 좀 있으면 누구 제사고,너 와야 된다. 7대장손이 와야 된다는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그 안 믿는 사람, 불신 문중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안 보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 마치고 박사학위 받아서 들어오니까 어머니가 그러시데요. “고향에 한번 가자”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알았죠. 어머니 속마음을 알았죠. 온 동네 사람이 널 야소교 믿어서 망한다고 했는데 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실물이 하나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정말 그랬어요. 동네에서 아들 둘 다 대학 졸업했고 큰아들은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까 그 동네에서는 우리가 망할 거라고 말하던 그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던 대로 참 비참하게 많이 되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원수의 소욕대로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모든 저주와 조롱 속에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실 날을 잡아놓고 계십니다. 이 시를 쓴 시인 다윗은 이런 경험을 많이 했던 성도입니다.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 도망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베냐민 지파사람 시므이가 티끌을 날리며 저주했습니다. 꼴 좋다고 아주 온갖 모욕을 다 했습니다. 다윗 옆에 있던 부하들이 “가서 단칼에 베겠습니다. 저 죽은 개만도 못한 시므이가 내 주 왕을 모욕하는데 가만 있을 수 없습니다”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그냥 두어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니까 그렇게 하는거지요. 혹시 하나님이 날보고 불쌍히 여기시면 다 회복시켜주지 않겠느냐? 그러고 다음 장면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마하나임에 도착하니까 길르앗 사람 바실래가 임금을 위해서 극진한 잔치 준비를 해놓고 음식을 준비해놓고 울면서 나아와 맞이합니다. 여러분 그때 다윗이 무얼 느꼈을까요? 바실래의 손을 통해서 주어지는 이 모든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었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잘못해서 아들한테 쫓기는 신세 되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그는 느꼈을 것입니다. 다윗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시를 쓰고 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을 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영접 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의 미움과 핍박은 회피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다윗처럼 우리 자신의 허물과 실수로 인해서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조롱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주님의 귀하신 이름이 욕을 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노력 할 때에도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무릇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고 하면 그때도 그것 때문에 핍박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가 칭송하는 귀하신 그 이름을 믿는다는 사실만 두고도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의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상이 베풀어져 있습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신 손길로 마련하신 풍성한 상이 우리의 삶에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패망하기를 바라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환대해 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단어로서 하나님의 그 과분한 호의를 우리가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은 자신이 받은 환대가 과분함을 의식하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을 때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손길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알 때에 여러분과 저도 함께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이런 환대의 체험을 갖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 시인의 고백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것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받는 대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항상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성도의 잔은 항상 넘칩니다.

구원의 기쁨을 오늘도 성도들과 함께 받아 누리는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하늘 잔치를 미리 오늘도 맛보게 하시는지 성도들과 더불어서 이 말씀이 있는 자리에, 이 생명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신령하고 복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감사가 자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장이 뛰고 있는 사실로 인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앉고 설 자리가 있는 사실로 인해서 여러분은 감사하십니까? 아니면 응당 받아야 할 것의 일부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언제부터 이 구절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 된 자신을 볼 때 감사하며, 그 뿐만 아니라 그 자비를 체험하고 그 자비를 전하는 자로 하나님이 나를 삼아주심을 생각할 때 찬양하는 마음이 내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여러분을 만난 사실로 인해 감사하며 또한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 속에 오늘도 살아감을 느낄 때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내 심령 깊은 곳에서 소리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자기 두뇌와 힘센 팔을 믿고 살아갑니다만 저의 삶은 성도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 속에 있음이 감사할 뿐입니다. 성도의 사랑과 관심 속에 사는 축복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십시오. 순수한 마음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구역식구들 가운데서 교제하면서 산다는 것, 그것이 축복입니다.

거짓 없는 심정으로 여러분이 강건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복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약삭빠르게 살아가도 주위의 시기와 미움 속에 산다면 비극입니다. 반면 형제자매의 사랑과 관심의 울타리 속에 사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복된 삶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을 살핍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언약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되고 아버지의 자녀 되어서 하나님의 환영 받는 손님이 되었는데 이제 그것은 잠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잔치 참석하고 잔치시간 지나가면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귀한 손님으로 하루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축복은 영원토록 우리가 누릴 축복입니다.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축복이 하나님의 손님된 여러분의 것입니다.
마침내 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탕자는 그 날부터 아버지의 모든 좋은 것을 누립니다. 마침내 주님의 집에 도착한 믿음의 순례자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상에서 영구히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축도를 음미해 보십니까?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선포되는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 사랑, 교제가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에서 좋은 것을 맛본 자는 결코 거기서 멀어질 수 없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상에서 영생의 축복을 이미 맛본 자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의 생명을 누리고 더 풍성히 누리도록 의도된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맛본 것으로 끝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서울에 있을 때 교회당이 산 중턱에 있었기 때문에 바베큐 하기가 참 좋았어요. 가끔 친구 목사들 불러다가 바베큐를 해주곤 했는데. 세상에 10년,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쪽 지나갈 때마다 그 바베큐 먹었던 것을 생각한대요. 저는 나한테 들은 설교를 그렇게 좀 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라는데 사람들은 내가 구워준 고기 먹은걸 그렇게 잘 기억을 하데요.

우리 집에도 가끔 성도들이 옵니다. 전입 신자들 초청을 합니다. 작은 교회에 다닐 때는 담임목사를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울산 교회 오니까 딴것은 다 좋은데 담임목사가 너무 멀리 서있다는 것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제가 전입 신자들을 한번씩 초청해 대접을 하는데 그 소문을 듣고 그동안에 충성하고 오랫동안 울산교회를 지켰던 분들이 “우리도 딴 교회 갔다가 와야 되나?”이러더라고요. 그렇지만 밥 한 그릇 때문에 딴 데 갔다 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연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좋은 식탁에 한번 초청을 하려고 어떻게 하면 될까 생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여간 맛있는 것 한번 먹고 끝나는게 아니라 또 먹고 싶은 것 그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교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한번 맛봤으니까 되었습니다. 다음 주일은 바쁩니다. 나는 교회 못 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죠? 여기 나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아무리 더워도 말씀 듣는 자리에 나오는 사람이다. 비가와도 나옵니다. 바람불어도 나옵니다. 눈 내려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죠? 저는 비 온다고 눈 내린다고 데이트 연기하는 사람 한사람도 못 봤습니다.

꿀을 만나거든 실컷 먹으라고 잠언은 권합니다. 잠언서 기자가 대한양봉협회 선전이사입니까? 왜 그런 말 할까요? 영생을 맛본 자는 영생을 만끽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환대를 받은 사람은 더 풍성한 교제로 나가라는 이야기 입니다. 주님하고 잠깐 지내서 좋은 것을 경험 했으면 주님과 좀더 진지한, 좀더 내밀한, 좀더 긴 교제의 시간을 사모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나의 평생에” - 이 은총은 한결같은 은총입니다. 내가 사는 날 동안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사는 날 동안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그의 선하심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모든 죄가를 도말하십니다. 정녕 나를 따르리니, 정녕이라는 말은 ‘반드시’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나의 남은 삶에 따르리니...’ 왜? 저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55년의 나의 삶에 함께 해주셨던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제 생애가 10년 남았는지, 20년 남았는지, 30년 남았는지 모르지만 남은 생애 더 놀랍게 더 풍성하게 반드시 함께 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정녕 나를 따르리니” 이 따른다는 말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따른다는 말은 다윗은 정말 지긋지긋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칼잡이 삼천명을 데리고 젊은 날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계속 따라 다녔기 때문입니다. 추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추적을 당한다는 것 정말 피를 말리는 고통입니다. 여러분의 전화가 도청당하고 있고 여러분이 집에서 차를 타고 출발하면 미행을 하고 있고 그런 고통을 당해 보셨습니까?

다윗은 젊은 날 정말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당했는지 모릅니다. 자객들이 그를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다윗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꼭 같은 단어를 써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추적하리니” 그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멀어질래야 멀어질 수 가 없습니다. 그의 선하심과 그의 인자하심이 집요하게 집요하게 여러분의 삶을 뒤따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하나님의 축복을 너같이 받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그는 노래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최후의 고백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사는 모든 날들에 그의 선하심과 그의 인자하심이 언제나 뒤따르지만 우리의 마지막 소원은 여기 사는 날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이 땅을 훌훌 털고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환대받는 손님으로 잠깐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한 식구로서 거하고 싶은 소원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사는 날 동안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와 함께하실 그분의 품에서 영원토록 살고 싶다는 소원이 여기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토록 돌아가리로다.”그렇게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집 - 그의 궁정 - 그의 장막에 영원토록 거할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모든 성도의 궁극적 소원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입니다.

여러분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입니까?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여기 성도의 마지막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확실하게 나오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더 성숙해져야 할 신자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나로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 하리이다.”(시 65:4)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오늘도 부르짖습니다 . . . .”(시 84:1-2)

신약 성도 역시 동일한 소원 가지고 살았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 .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후 5:1-2, 8). 왜 탄식하면서 삽니까? 우리가 들어서 아는 대로 우리가 마음에 소원하는 대로 땅에 우리가 있는 날 동안은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주님 사랑하고 주님 섬기는 일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 소원대로 된다고 하면 아무도 내 삶에 대해서 손가락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비난도 받지 않는 완벽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정말 저도 새벽부터 밤중까지 모든 성도의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동안은 때로는 부족한 부분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몸부림 치지만 되지 않아서 안타까와 합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에서 탄식하며 하늘로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하나님 내게 능력 주셔서 변화시켜 주시던지 아니면 나의 생명은 주의 손에 있습니다. 나도 하나님 소원하는 것처럼 섬기고 싶습니다. 그것이 여기서는 되지 않기에 우리는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

어떤 때는 다 접고 주님 받아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싶을 때 여러분의 삶에도 있지요? 엘리야처럼 하나님 이제 됐습니다. 내가 내 열조보다 잘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우리는 그날을 사모하면서 사는 순교자 입니다.

그때에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어 주실 것입니다. (계7: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원히 여호와의 집에서 거하리라는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라는 소망이 여러분에게 확실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생사 간에 이 확실한 축복이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사는 날 동안에는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그 생이 마감되는 순간에는 더 놀라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주님이 주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전부였지만 우리의 이 땅의 삶이 마감되는 순간에는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한평생 주셨던 그 주님을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는 마음에서부터 조급해진다고 성도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주께서 나를 외인처럼 대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는 고백하는 복된 주의 백성들이 있는 자리에 여러분은 지금 나아왔습니다. 그 사실이 믿어지면 그 사실로 인해서 감사드리십시오. 이 소망을 가지고 선한 일에 힘쓰시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가 날로 날로 더 소중하게 받아지는 여러분의 남은 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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