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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의 복음 / 행 10: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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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화평의 복음
본문  사도행전  10:34~43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여러 편 실려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설교했습니다.
이 설교는 사도행전 2장에 실려 있습니다(행 2:14~36),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기도 시간에 성전에 들어가려다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쳐 주었는데 이것을 보고 놀라 성전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이 설교는 사도행전 3장에 실려 있습니다(행 3:12~19), 

자기를 체포해서 가둔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과 대제사장의 문중을 향해 설교했습니다.  이 설교는 사도행전 4장에 실려 있습니다(행 4:8~12),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시기해서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는데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끌어내며 전도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이 말을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다가 다시 잡혀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때도 설교했습니다.
이 설교는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5:29~32).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 수록된 베드로의 다섯 번째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한 그릇에 각종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고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하는 소리가 있는 환상을 봅니다.
그 직후에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고넬료의 집에 갔습니다.
가보니 고넬료의 가족들, 친척들,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한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사도행전에 수록된 베드로의 다섯 번째 설교이며 동시에 마지막 설교입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서 설교한 것은 이것 하나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방인들을 향한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이고 또 유일한 설교입니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말하면서 ‘화평의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을 제일 가까운 자리에서 들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으니까요.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예수님과 같이 보낸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대화도 제일 많이 나누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도 베드로가 대답을 하고 그에 따른 대화를 나누었고, 변화산에 따라가서도 예수님께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 머뭅시다’고 했습니다(마17:4).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호수 찾아오셨을 때도 일곱 제자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베드로와 말씀을 제일 많이 나누었습니다(요21장).

복음을 직접적으로, 제일 많이, 제일 진하게 듣고 예수님과 대화를 제일 풍성하게 한 베드로가 복음에 대해 말하면서 화평의 복음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화평의 복음, 이 말에 어떤 교훈이 있는지 살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이 말에는 ‘하나님께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에는 36절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평화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 말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이 진정한 화평입니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화평의 복음, 이 말에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개인과 하나님, 그리고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 진정한 평화를 누릴 길이 없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일이 많습니다.
제일 많이 쓰는 것은 ‘구원의 복음’입니다.
이 말은 ‘구원을 주는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풀어 말하면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복음‘은 ’자유를 주는 복음‘ 풀어 말하면 ’복음을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회복의 복음’ ‘치유의 복음’, ‘해방의 복음’, ‘기쁨의 복음’ 이런 말들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화평의 복음, 이 말은 ‘화평을 주는 복음’ 이런 뜻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화평을, 진정한 화평을 누릴 수 있다’ 이런 뜻입니다.

복음은 어떤 화평을 줍니까?

복음은 내면의 화평을 줍니다.
분노로, 원망으로, 미움으로, 염려로 들끓는 마음, 평안하지 못한 마음을 복음은 조용하게,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 신라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피리가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만 가지 파도를 잠자게 하는 피리’ 이런 뜻인데 ‘만만파식적’(萬萬波息笛)이라고도 합니다. 이 피리를 불면 나라의 모든 걱정과 근심이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이야말로 만파식적입니다.

복음은 가정의 화평을 줍니다.

복음은 교회의 화평을 줍니다.
화평하지 못한 교회는 복음이 떠난 교회입니다.
학개서 2장 9절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에 평강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아 나누어주는 곳인데 교회가 화평하지 못하면 안 되지요.

복음은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화평을 줍니다.
환경 문제는 ‘창조의 선하심을 회복하자’라는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통전’(統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들어낸 말인데요 문자 그대로 풀면 ‘전체를 다 통 털은’ 이런 뜻이 됩니다.
감리회 본부 선교국이 한동안 ‘통전적 복음을 전하자’ 이런 구호를 사용했는데 ‘통전적 복음’을 영어로 ‘Wholly Gospel'이라고 번역했습니다. ‘wholly'는 ’완전한‘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요.
화평의 복음은 ‘통전적 화평’을 우리에게 줍니다.

화평의 복음은 수직적 화평을 우리에게 줍니다.
수직적 화평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제일 강조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직접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이라면 바울은 복음을 잘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 사람입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베드로가 기자라면 바울은 역사가입니다.
베드로가 선수 출신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라면 바울은 이론을 전공한 해설가입니다.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한다’는 것을 바울 서신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이어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과 20절에서는 하나님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가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권합니다.
로마서 5장 1절의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화평, 하나님과의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의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화평의 복음은 수평적 화평을 우리에게 줍니다.
수평적 화평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 나라와 나라 사이의 화평을 말합니다.

화평의 복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주는데 도저히 화평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도 화평을 이루게 합니다.
대표적인 본보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와 고넬료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유대 백성입니다.
고넬료는 통치를 하는 나라의 국민입니다.
베드로는 통치를 받는, 식민지의 백성입니다.
고넬료는 군대의 간부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시골의 어부 출신입니다.
무엇보다 제일 높은 장벽이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생명처럼 여기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방인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믿어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삼팔선보다도 더 두터운 장벽이 둘 사이에 있습니다. 악수를 하기 어려운 사이입니다.
고넬료 쪽에서도 손을 내밀기 어렵고 베드로 쪽에서도 손을 내밀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통해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여러 가지 짐승의 환상을 보고 가이사랴에 가서 고넬료, 그의 가족, 그의 친척, 그의 가까운 친구들과 만나면서 크게 깨닫습니다.
34절과 35절을 보세요
‘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구나!’
‘아, 하나님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가리지 않으시는구나!’
‘아,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구나!’
라는 것들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요약한 것이 “화평의 복음” 이 말입니다.

여러분, 도저히 화해를 이루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화평의 복음을 믿는 크리스천이다’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를 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이라는 전도자가 있습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통해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분입니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인데 이차 대전 때 나치스에 의해 수용소에 갇혀서 지옥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독일이 패망한 다음에 수용소에서 나와 여러 곳을 다니며 간증과 전도를 합니다. 한 번은 집회를 마치고 나서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는데 낯익은 중년 남자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습니다. 잘 보니 수용소에서 자기를 고문하고 못 살게 굴던 간수였습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으며 ‘이 사람과는 악수할 수 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누르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을 때 코리 텐 붐 여사의 마음에 형언하기 어려운 평화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 때 코리 텐 붐은 ‘나는 화평의 복음을 믿는 크리스천이다’라는 사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화평을 줍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을 사도행전에서 택하고 설교의 주제를 화평으로 잡은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설교 본문을 신구약 성경 66권에서 골고루 택하기 위해서 ‘본문 일람표’를  만들어놓고 본문을 택해 정하는데 보니까 올해는 하는데 사도행전에서 주일낮설교의 본문을 택한 일이 없습니다.
6월까지 새벽기도회에서 사도행전을 강해했기 때문에 일부러 피했던 것 같습니다.

또 지난 주일부터 속회가 여름 방학에 들어갔는데 속회 공과가 다른 시간을 통해서라도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야 속회가 개학했을 때 단절감 없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겠지요.
여자 속회 공과, 지난 주일은 30과 ‘국경을 넘어선 성령’인데 사도행전 8장 26절부터 40절까지를 본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전도하는 내용이지요.
이번 주일은 31과 ‘인종 차별을 허무는 성령’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본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모두 성령은 국가와 인종을 넘어서 역사한다는 내용인데 조금 전에 말씀드린 34절과 35절에는 이 가르침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와 함께 오늘, 7월 27일이 바로 휴전 50주년이 되는 날이라는 사실이 이 본문, 이 제목, 이 내용으로 설교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화해의 복음을 통해서 남과 북 사이에 진정한 평화, 완전한 평화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휴전 50주년을 맞이해서 여러 가지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고 매스컴은 특집들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아마 더할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휴전에 조인한 날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이라고 부르면서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7월 27일이 되면 ‘전승축하 기념행사’들을 많이 하는데 북한은 우리와 달리 10주년, 100주년보다 5주년, 50주년 같은 해를 ‘꺾어지는 해’라고 부르며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50년이 되는 오늘은 매우 좀 요란할 것입니다.

저는 7월 23일 자 「조선일보」에서 판문점 르포 기사를 읽다가 인상적인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판문점에는 중요한 건물이 세 동 있는데 중립국 감독위원회실,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 공동일직장교 회의실이라고 합니다. 이 건물들에는 T1, T2, T3라는 푯말이 있는데 T는 Temporary(임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전쟁이 끝나서 누리는 평화가 아니고 전쟁이 멈춘 상태에서 누리고 있는 임시적인 평화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남과 북이 화평의 복음을 통해 임시적인 평화가 아닌 온전한 평화를 이루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매해 8월 15일, 광복절이 들어있는 주일을 많은 교회들이 평화통일기원주일로 지킵니다.
감리교회에서는 북한선교주일로 지키는데 올해 북한 선교주일의 중심 성구는 에스겔서 37장 17절 후반부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리라”,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이지요.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에스겔서 37장 15절에서 17절을 읽어 드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쓰고 또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집니다.
그것이 에스겔의 손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북한선교주일과 같은 특별한 주일이 다가오면 감리회 본부의 그 주일을 주관하는 부서에서는 그 주일에 목사님들이 설교하는데 참고가 되는 설교문을 각 교회에 보냅니다. 그 설교문을 가지고 그대로 설교하는 목사님들도 많은데요 북한선교주일은 서부연회에서 주관합니다.서부연회의 부탁으로 북한선교 주일 설교문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제가 썼습니다.
작년에는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베푼 것과 같은 사랑으로 북한을 대해야 한다고 했고 올해는 에스겔서 37장 17절, 중심성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네 손에서”라는 내용으로 썼습니다.. 설교 제목도 “네 손에서”입니다.

“네 손에서”는 교회의 손입니다.
제가 평소에 종종 통일에 대한 큰 책임은 통일부 장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교회에 있다고 말씀 드리는데 그 이야기입니다.
화해의 복음을 믿는 교회가 남과 북의 화해를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스티브 린턴이라고 한국에서 여러 대를 이어가면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가 있는데 이 분은 지금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중점적으로 돕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통일에 대한 강연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유교적 가치관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것이 통일에 도움이 됩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유교에서는 부모의 원수를 자식이 갚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그런 것이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의 하나로 되어 있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통일이 되었을 때 6?25 때 부모의 세대가 총을 맞대고 싸운 북한사람과 어울려 함께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화평’은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이 헬라어로 ‘유앙겔리조메노스 에이레넨 디아 예수 크리스투’입니다.
구약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 이 화평은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말입니다.
‘샬롬’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라는 뜻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기 위해서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사야는 이 사실에 대해 이사야서 9장 6절에서 7절까지에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리라

그래서 사가랴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그는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한다고 했고(눅1:79)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군과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라고 찬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열매로서 이 땅에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화평이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본래 화평이라는 말은 전쟁이 끝난 것, 개인이나, 교회나, 사회나 나가서 세계가 어지럽지 않고 번영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단순히 이런 것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밑에 있는 모든 상태를 말합니다.
화평하지 못한 사람, 화평하지 못한 가정, 화평하지 못한 단체, 화평하지 못한 나라, 화평하지 못한 세계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평강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화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인격적 구원을 체험할 때에 그는 화평을 체험할 수 있고 화평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을 향한 첫 설교에서  화평의 복음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용납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구원하시는 복음과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화평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시편 34편 14절의 권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34편 19절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 지어다”라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평을 찾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인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끝냅니다.
여러분, 화평의 복음을 통해 수직적 화평,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아주 중요한 화평입니다. 기본적인 화평입니다.

또한 화평의 복음을 통해 수평적 화평, 이웃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화평의 복음, 이 말에 담긴 깊은 교훈을 생각하며 온전한 화평을 누리고, 화평을 전하기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화평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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