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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창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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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제목: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장 8-9절

8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
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서론) 

  앞으로는 제가 계속해서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은 인류의 기원과 만물의 기원과 특별히 인간의 죄의 
기원과 만물의 기원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원역사’라고 신학적인 용어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부분인 12장부터는 이
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나라를 선택하시고 그 나라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증
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창세기 3장 9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시
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따 먹어도 좋다고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의 열매만은 절대로 먹지 말
라고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게 될 것이라고 말
씀하셨습니다. 그 열매는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담
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어기고 그 열매를 먹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 순간
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문 8절의 말씀은 “그들이 
나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
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
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동산나무 사이에 자신의 몸을 숨기고 숨어있는 아담을 향해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떠한 사상을 다른 사
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참으로 많은 말들을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은 2, 3시간 동안 
이야기를 해도 실제적으로 필요한 사상은 1분도 채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 한 말씀을 하셔도 그 속에 너무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지극히 짧은 “아담
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그 말씀속에는 너무나 심오한 진리와 비밀을 담고 있습
니다. 오늘 선포되어지는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성
령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분명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스스로 어기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이
라고 한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마땅했을까요? 먼저 아담은 하나님을 찾아야만 했
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
백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용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그렇게 행동하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마음속에 들어온 죄가 그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의 특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우둔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이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역사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아담은 하나님
을 찾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담
이 도망친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동산나무 사이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아담의 
행동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곳이 겨우 동산나무
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타조라는 짐승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타조는 무서운 맹수가 
달려오면 자신의 몸을 숨기는데 참으로 어리석게도 자신의 머리만을 숨긴다고 합니
다. 커다란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조그마한 머리만 수풀에 넣고 있는 타조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이와 같이 아담도 하나님 앞
에서 자신의 몸을 동산나무에 숨겼다고 안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피하
려고만 합니다. 죄를 범한 아담은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려고 하는 너무
나 어리석은 행동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첫 장부터 맨 
마지막 장까지 한 가지의 절대적인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께
서 먼저 죄인을 찾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는 우리들을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자면  길 잃은 양이 목자를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길 잃은 양을 먼저 찾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누가복
음 19장 1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대 목적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
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죄를 지은 것은 인
간이지만 이때에 가슴을 치면서 아파하시고 인간을 찾아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
님 한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날이 서늘할 때에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어두움이 짙은 밤에 아담을 찾으
셨다면 그는 틀림없이 큰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강렬한 
태양의 빛이 내려 쬐는 대낮에 찾아오셨다면 아담은 하나님의 뜨거운 진노를 받을까
봐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른 아침에 찾아오셨다면 잠을 자고 있
던 아담이 깜짝 놀라서 그만 단잠을 깨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다 알
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한 시간을 택하셔서 날이 서늘할 때에 아담을 찾으
셨습니다. 이 얼마나 아담의 처지와 형편을 고려하신 하나님의 세심하고도 섬세한 하
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까! 더군다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향해서 급하게 뛰어오
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서둘지도 않으셨습니다. 동산을 조용히 거니시며 아담을 향해
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하
심과 온유하심과 죄를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동산을 조용히 거니시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는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5가지의 중요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1. 아담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이 질문은 죄인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양심이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하
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기능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아무리 완악한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기본적인 양심은 남아 있습니다. 도적도 남의 것을 훔칠 때에는 양심의 가책
이 있습니다. 인간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모두 다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
나 인간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게 지어
진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죄를 범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
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했음을 양심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고통스러워하
게 됩니다. 우리 양심이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 양심
의 소리를 듣고서도 계속해서 무시하고 죄를 범하게 되면 나중에는 양심에도 마비증세
가 오고 맙니다. 결국에는 양심의 그 어떠한 소리에도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철면피
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양심은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기록된 것처럼 “선
한 양심”도 있고, 디모데전서 3장 9절에 있는 것처럼 “깨끗한 양심”도 있고, 고린
도전서 8장 7절에 있는 것처럼 “약하고 더러워진 양심”도 있고, 고린도전서 8장 12
절에 있는 것처럼 “상한 양심”도 있습니다. 죄는 양심을 마비시키고 죽이는 독약입
니다. 죄는 양심을 잠재우고 혼수상태에 들어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
를 거듭해서 짓게 된다면 결국에 가서는 양심이 화인 맞은 단계에 들어가게 되고 양심
이 화인 맞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어떠한 양심의 기능도 작용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
다. 

  아담은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아담의 더러워
진 양심을 향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아담아, 너의 양심이 어디에 있느냐?”, “아담
아, 너의 양심이 더러워지지는 않았느냐?”, “아담아, 너의 양심이 상하지는 않았느
냐?” 양심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입 속에 넣으신 낚싯바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 양심을 향해서 부르시면 인간은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
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병든 사람이 아무리 자기 스
스로 건강하다고 할지라도 의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즉시 병원에 
입원해서 의사가 처방해주는 대로 진찰을 받고 치료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얼마
든지 예전의 건강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
고 스스로 치료해서 고칠 수가 있다고 병원에 입원하지 아니하면 나중에 가서는 더욱
더 심각한 위험한 상태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우리 영혼의 의사가 되시는 하나
님께서는 죄인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십니다. “죄인! 너는 그 상태로 계속 가면 멸망
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는 내게로 돌아오라. 너의 더러워
진 양심을 내가 깨끗이 하리라. 너의 추악한 모든 죄를 내가 씻어 주리라. 너의 인생
을 내가 회복시키리라”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신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아담의 양심을 향해서 부르신 소리입니다.


2. 아담의 죄를 자백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요한일서 1자 9절을 보시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되 우리 스스로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입술로 자신의 허물을 자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향해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아담아, 내가 너를 
창조하였노라. 너의 아내인 하와도 내가 만들었노라. 너에게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권한도 허락하였노라. 하지만 지금 너는 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였
구나. 지금 즉시 나에게로 와서 죄를 자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라!” 이처럼 하나님께
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통해서 그를 직접 부르셨습니다. 오
늘날의 성도들도 교회를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가 있
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마귀의 편에 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대적하
는 원수가 되지 마시기 원합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주의 종에게 
반역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아담아, 뱀이 너를 하나님처럼 될 것이
라고 유혹을 했지만 네가 정말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었느냐?”, “아담
아, 뱀이 너의 눈이 밝아지리라고 했지만 지금 너의 눈이 하나님처럼 밝아졌느냐?”, 
“아담아, 뱀이 네게 큰 영광을 줄 것이라고 했는데 너는 지금 왜 발가벗고 수치스러
운 상태로 숨어 있느냐?” 그러므로 이제 너는 스스로 죄를 자백하고 용서함을 받으라
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향해서 촉구를 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해서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지금 너희들은 술
취함과 방탕과 음행과 도박에 빠져서 살고 있지는 않느냐? 그러한 것들이 너희들에게 
쾌락과 즐거움과 기쁨을 줄 것이라고 유혹을 하지만 오히려 세상의 그러한 것들은 너
희의 가정을 파괴시키고 부모와 형제간의 관계를 단절을 시킬 뿐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죄를 자백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여러
분의 양심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깨끗한 양심이요 선
한 양심입니까?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선한 양심을 얻는 데에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갖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백 독을 하고, 만 독을 한다고 할지라
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기도를 아무리 유창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선한 양심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줄로 믿으시
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해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시
는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죄를 자백하라는 부르심입니다. 


3. 잃어버린 자를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심의 소리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부르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
나 아담을 불쌍히 여기시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에는 이 구
절을 “아담아 네가 딱하도다!”라고 기록을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자비하거
나 완악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섬기
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로 말미암아 방황하고 있는 아담
을 지금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항상 사랑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시고 
한량없는 자비와 은총으로 채워주기를 원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대해
서는 에스겔서 18장 32절을 보시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진실로 자비가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
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자비를 늘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만 될 줄로 믿습니
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해하려고 하는 악독을 품지 마시기 바
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독약을 담아두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결국에 가
서는 그 독약이 여러분의 생명을 빼앗고 영혼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
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아서 마음에 자비를 품고 이 세상을 살아
가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시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
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탕자를 맞이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술과 쾌락으로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
다. 이제는 비참한 거지의 신세가 되어서 초라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에 멀리서 불쌍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는 자비가 넘쳐납니다. 
이처럼 아버지에게는 자비로운 눈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을 너무나 측은하게 여긴 아
버지는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처럼 아버지에게는 자비로운 입술과 자
비로운 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명하여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
히고 손에는 자신의 기업을 물려받을 징표로 가락지를 끼우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에게는 자비로운 마음과 자비로운 행동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하나
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온통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나타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잃어버린 자를 다시 찾
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영혼은 매우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큰 걱정과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떤 두 사람이 염려가 심했습니다. 먼저 한 사람은 불확
실한 미래에 대해서 큰 염려를 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까?”, “지
금 내가 하고 있는 사업이 망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이와 마찬가지로 옆에 있던 친
구도 동일한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 인하여서 심히 불안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이 사람이 웃으면서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계속 염
려하면서 살고 있는 친구가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니! 친구야, 그동안 네가 
염려속에서 날마다 인상을 쓰고 불평하면서 살아왔는데 어떻게 해서 이제는 날마다 웃
으면서 다니느냐?” 이때에 웃음을 머금고 있던 사람이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고 합
니다. “아! 그동안은 내가 큰 염려를 하면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나를 대신해서 염
려해 줄 사람을 한 사람 고용했기 때문이지” “그래 그 사람 급료는 얼마나 되는
데?” “일주일에 100만원이야” “아니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지급하나! 염려가 안되
나?” 그때 그 친구가 대답하였습니다. “그 걱정도 그 사람이 대신해 주고 있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이 세상의 염려로 인하여서 불안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28살 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저의 영혼은 참으로 공허하
고 심히 불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그 순간부터 하늘의 평안
과 기쁨과 즐거움이 날마다 저의 심령 충만히 임하게 되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
님께서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저의 마음이 담대해지는지 모릅니
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의 심령 가운데에도 매 순간마다 채우시는 하
나님의 참된 기쁨과 평강과 소망이 충만히 차고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4.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의 소리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이 부르심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꼭 찾아
내셔서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영혼은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다 구원하십니다. 아무리 많은 신앙의 
장애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구원해 내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기 전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에 그 누구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만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저를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자 어김없
이 저를 부르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생의 구석으로 몰고 가셨고 마침내 저로 하여금 항복을 받아내시고 은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마 이러한 경험을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하신 분
들이 많이 계실 줄로 믿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이 질문은 하
나님께서 택하신 영혼은 반드시 놓치지 아니하시고 꼭 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시고 
구원해 주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누
가복음 15장 4절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라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꼭 찾는 분이십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짓고도 가정이 평안하고 사업이 더욱더 크게 번창하고 
삶에 형통함이 넘친다면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은 인생입니다. 왜냐하
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영혼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심판을 행하시는 공의
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도 이 세상에서 버젓이 살아가고 있
는 사람들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영혼
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에 죄로 인한 심판을 받고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하나님
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심판으로 인하여서 아직도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은총의 대상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죄로 인한 고통
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저는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릅
니다.”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위해서 성령을 부어주
어서 너로 하여금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하겠노라”고 답변을 주십니다. 또 죄인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저는 이제 소망이 다 사라지고 죄로 말미암아 심히 부패하
고 타락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나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
도 끄지 아니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이니라”고 답변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
분! 이처럼 죄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는 매우 단호합니다. 선택하신 
영혼들 중에 한 영혼이라고 잃지 아니하시고 간절히 찾기를 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
을 늘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
는 것도 우리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최후의 심판을 위한 무서운 호출의 소리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부르심은 “아담아 네가 죄를 지었구나! 그러므
로 이제 벌을 받으러 나의 앞으로 나오너라!”고 하는 하나님의 엄중한 호출의 소리입
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우리는 감사할 조건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는 이 무서운 호출을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심판의 날로 미루어 두셨습니다. 혹
시 여러분 가운데에 세상의 쾌락을 즐기면서 죄를 적당히 짓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마음껏 죄를 범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꼭 기억하시기 바랍
니다. 그것은 바로 최후심판의 날에는 그 모든 언어와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반드
시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죄를 범한 영혼은 최대한 빨리 죄를 자백하
고 용서함을 받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심판의 날에 가서는 그 어떠한 죄도 용
서함을 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심판의 날에 가서 하나님께
서 우리 각자를 향해서 “누구야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잘못을 범했으니 이제는 거기에 합당한 벌을 받으라.”고 심판하신다면 그 영혼은 더 
이상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때가 늦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구원의 기
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시지만 그때에는 심판주가 되셔서 무서
운 눈으로 심판만을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아
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이 음성은 우리들 가운데에 아직도 구원자가 되시
는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애타게 찾으시는 하나님
의 간절한 부르심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부르심은 우리의 양심을 깨우치는 소
리요, 죄를 자백하라는 부르심이요, 잃어버린 자를 긍휼한 마음으로 찾으시는 하나님
의 자비의 부르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호
출의 소리를 들으시려고 합니까? 

(결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
을 얻으리라” 이 영원한 하나님의 초청에 기꺼이 ‘아멘’으로 응답하시기를 예수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서도 양심이 더러워져서 은밀한 죄를 짓
고 있는 사람은 오늘 선포되어지는 이 말씀을 통해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왜 계속해
서 은밀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눈을 감히 속
일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왜 여러분의 양심을 계속해서 더럽히고 있습니까? 아
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에 숨어 있는 것처럼 왜 어리석게 자신의 죄를 감
추려고만 합니까? 우리 기독교 신앙은 선한 양심을 가지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러워지는 양심을 계속해서 깨끗이 씻어서 선한 양심으로 바꾸어 가고 하
나님께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하늘의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평강과 소망으로 채워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
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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