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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이 주는 교훈 / 요 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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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이 주는 교훈
성경말씀 : 요한복음 11:1-15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 세 번 나옵니다. 나인 성(城) 과부의 외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그것입니다. 앞의 두 사건은 간략하게 언급하였으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매우 상세하게 언급하였습니다.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한 5리쯤 떨어진 베다니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평소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적이면 으레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고 그 때마다 이들은 정성껏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고 전한 것이라든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한 구절은 예수님께서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의 관계여야 합니다.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방문하실 적마다 고향 집에 돌아온 것과 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시도록 배려하고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마르다의 헌신

누가복음 10장 38절로 42절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을 적에 있었던 정겨운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베다니 촌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가시니 마르다가 나와서 영접했습니다. 마르다는 귀한 손님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모처럼 주님께서 오셨으므로 많은 것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바빴습니다.

이럴 때 동생 마리아가 거들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그같은 언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참다못한 마르다가 방문을 열고 예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 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마르다를 책망하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신 것이 많은 음식이 아니고 오히려 그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주님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느라 수고한 마르다가 비난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아마 마르다의 청을 물리치시는 주님의 얼굴에는 사랑스러운 미소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마르다의 행동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리아의 헌신

그런가하면 요한복음 12장에는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일이 나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엿새 앞둔 때였습니다. 그 날 저녁에 베다니 마을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때에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기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이 광경을 보고 화를 내면서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옥합 채 깨뜨려서 주님께 부어 드리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겨드린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그 당시 왕에게나 합당한 최상의 예우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값으로 치더라도 그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나가는 값비싼 것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삼백 데나리온은 상당히 큰 돈이었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자기의 소중한 머리털을 풀어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얼마나 극진하게 사랑하였나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나사로 역시 두 누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는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고 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도는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우리는 삶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주님께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빨리 응답 받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고 응답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에 기도하고 응답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간혹 보면, 미신 섬기듯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평소에 정해 놓고 다니는 단골무당이 있습니다. 무당과 무당을 찾는 사람의 관계는 상인과 고객의 관계와 같습니다. 또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어느 무당을 단골로 거래했더라도 더 용한 무당을 알게 되면 언제라도 거래처를 옮깁니다. 이는 환자들이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들과 예수님의 관계는 이 같은 거래 관계가 아닙니다. 거래하듯이 예수님을 대하는 것은 바른 신앙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 무속적 기복신앙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은 겉보기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자기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결국 주님을 떠나고 맙니다.


가룟 유다

가룟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으므로 한눈에 예수님을 비범하신 분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유대 나라를 재건하실 인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그도 덩달아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주축으로 한 공동체의 돈궤를 맡은 것을 보면 그가 매우 사리에 밝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셨을 때 가룟 유다의 기대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했습니다. 기왕에 기대가 무산 되었다면 돈이라도 챙기자고 생각한 그는 대제사장들에게서 은 삼십을 받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떡을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개중에는 이 같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기적의 떡을 먹은 그 이튿날, 사람들은 아침부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시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시자, “어떻게 당신이 우리에게 자기의 피와 살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반발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주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그 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고 했습니다. 떡을 얻어먹기 위해 따라다녔던 사람들은 더 이상 떡을 얻어먹을 수 없게 되자 미련 없이 주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 다닐지라도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떡을 얻어먹자고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떡 문제 때문이라면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선 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시몬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 모이신 줄 압니다.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은 현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신앙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주님

혹 보면, 복을 받기 위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었더니 사업도 잘되고 가정도 화목하고 몸도 건강해졌다고 간증하는 말을 듣고는 나도 그런 축복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교회에 나옵니다. 물론, 하나님을 잘 섬길 때 복을 받아 이 땅에서 형통하게 되지만, 누구에게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사업이 안 될 때가 있고 병들 때도 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을 받고 형통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 믿어도 복을 받지 못하면 믿어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더라고 하면서 물러갑니다. 진실한 신앙인은 현세적인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37)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랑을 요구하신 것은 그가 먼저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로서 그의 양들인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으니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자기의 목숨을 버려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두 자매는 주님께서 그들의 오라비를 사랑하시는 줄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주님께 여러분 자신을 가리켜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말씀드릴 수 있으십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주님께 사람을 보내되, “주님, 빨리 오셔서 저희 오라버니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라고 요구하지 않고 다만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만큼 주님을 신뢰했다는 증거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비가 병든 사실을 주님께 알리기만 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슨 어려움을 만나든지 염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보십시오. 나사로가 감기 몸살과 같은 가벼운 질병에 걸렸더라면 누이들이 먼 곳에 있는 주님께 사람을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서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사람을 주님께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시련을 만났을 때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들도 때로 시련을 만납니다.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던 것처럼 매우 급박한 상황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님들께서는 당면한 문제로 인해 당황하지 마시고 기도로써 여러분의 사정을 주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가 지금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주님께서 성도님들의 마음의 귀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소자야, 염려하지 마라. 이 일로 낭패를 당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한다면, 무슨 곤란한 일을 만났을지라도 걱정하지 마시고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마음에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나사로가 병듦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가 병든 것이 어찌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는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르기를 “8)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고 했고, 사도 바울은 찬양하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고 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난관을 만난 사람들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이 해방되어서 불기둥 구름기둥을 따라 행진하다보니 어느덧 홍해 가에 당도했습니다.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나머지는 온통 황량한 사막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바로가 애굽의 모든 마병과 특별병거 600승을 거느리고 이스라엘 자손을 다시금 종으로 삼기 위해 추격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는 대경실색했습니다.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모세에게 이르기를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이 막다른 길로 그들을 인도하신 까닭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바다에 빠져 죽거나 바로에게 사로잡혀 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달랐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실는지 알지 못했지만, 잠잠히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것을 바랐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출 14:15-16)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순종했더니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사이에 난 대로로 무사히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측과 상상을 초월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좁고 유한한 생각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려고 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합력성선

나사로는 병들어 죽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누이들의 전갈을 받으신 즉시로 베나니 마을로 출발하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식을 받으시고도 이틀을 더 머무신 다음,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당도하셨을 때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때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늦게 오신 예수님께 대한 서운함이 배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삶에 역경이 다가올 때 당황하거나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이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그 어떠한 역경도 결국은 복된 결과로 마무리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만사 새옹지마”(世上萬事 塞翁之馬)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누가 보아도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는데 얼마쯤 지나고 보면 그것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원인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누가 보아도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는데 나중에 보니 그로 인해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불행한 일을 만났다고 슬퍼할 것도 없고 행복한 일을 만났다고 너무 좋아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성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삶은 우연에 의해 영위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인도함 받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28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은 우리에게도 선이 되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일은 우리에게도 선이 될 리가 만무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행복한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와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세상만사 새옹지마’와 같은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곤란한 문제를 만났을지라도 “이로 인해 우리가 망하는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병에서 고침 받은 것보다 더 복된 이유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나타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 일은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의 입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사노라면 크고 작은 문제를 만납니다. 그럴 때 문제 자체를 기피하거나 혐오하지 마시고, 문제가 크고 심각할수록 오히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더 크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무슨 곤란한 일을 만났습니까? 먼저, 주님께 대한 성도님들의 사랑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님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속에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어려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견고히 만들어주는 기회가 됩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주님께서 성도님들의 당면한 문제를 통해서도 동일한 역사를 이루어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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