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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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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본문 : 시편133:1-3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 곁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 곁에서 인격과 신앙으로, 지혜와 지식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가르쳐 주고 조언해 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고, 붙들어 주고, 물질적으로 도움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랑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의 손길이 부모이거나 형제자매이거나 스승이거나 친구이거나 이웃사람이거나, 성공한 사람들 곁에는 항상 사랑의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깨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반면 인생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랑의 손길들이 너무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고 바르게 세워주는 사람들,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관계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멘토(Mentor)라고 합니다. "멘토"란 말은 '오딧세이'에 나오는 노인의 이름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이타이카 왕국의 오딧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할 때 사랑하는 아들을 믿을 만한 친구에게 맡기고 떠났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였습니다. 오딧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멘토는 친구의 아들을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스승처럼, 가르쳐주면서 삶의 안내자가 되고 상담자가 되고 후원자가 되어 주어서 결국 훌륭한 왕자로 키워냈습니다. 그 이후 멘토라는 그의 이름이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부각되어서 "신앙과 인격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지혜와 지식으로 한 인간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조언자, 도움을 주는 조력자, 영향을 주는 자"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새롭게 부각된 "멘토"라는 말에서 행복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며 깨닫고 있습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자기 곁에 좋은 멘토들을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좋은 멘토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제 새롭게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디서건 평소에 사랑하고 존경해 온 사람을 멘토로 모시는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멘토가 될 때 멋진 인생이 되며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문제, 가정문제를 비롯해서 삶의 모든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다 보면 힘에 부쳐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서 결국 실패와 파탄으로 끝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험난한 세상 파도와 싸워야 하는 오늘날,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며 돌봐줄 "멘토"가 곁에 있어 준다면 쉽게 절망하거나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새로운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에게 좋은 멘토가 됩시다. 멘토링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멘토링 운동은 함께 더불어 사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함께 일하면서 서로 따뜻한 말과 믿음과 사랑과 기쁨을 주고받는 데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서 서로 불평과 원망이 가득해서 따뜻한 말과 믿음과 사랑, 기쁨을 서로 주고받지 못할 때에 사람은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함께 좋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은 공동체의 조화가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두 가지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첫째, 공동체의 조화는 보배로운 기름과 같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공동체의 조화는 산 이슬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보배로운 기름과 산 이슬이라는 두 가지 그림을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형제가 연합해서 동거하는 그곳에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데 본문 2절에서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데 그것이 아론의 머리를 타고 수염을 타고 계속 확산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제사장으로 선택하셨고 아론은 하나님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론을 통해서 계속 역사할 것이다. 아론의 입술의 말에 함께 해 줄 것이고, 아론의 결정에 따라 축복해 줄 것이고, 아론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복을 주겠다.' 이렇게 복의 근원으로 아론의 머리에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기름이 머리에서 수염, 수염에서 옷깃까지 흘러서 온 몸 전체에 퍼졌던 것처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면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그 장소에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거룩한 의식 속에 아론의 머리에 부은 기름이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내려서 온 옷깃을 적심같이,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 인생을 축복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주변의 자연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임하는 것을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3절에서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들에 내림 같도다" 말씀합니다. 헐몬 산은 북쪽 이스라엘 경계에서 9천 2백 피트가 되는 가장 높은 산입니다. 헐몬산은 설산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헐몬 산에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하얗게 되면 사람들은 풍년을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물줄기는 헐몬 산에서 그 눈이 녹아서 일년 내내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헐몬 산은 눈이 녹은 물만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에 그 따뜻하고 습한 바람이 낮에는 계속 헐몬 산을 지나갑니다. 그런데 해가 지면 습한 바람들이 이 높은 헐몬 산을 넘지 못하고 부딪쳐서 찬 공기에 결빙을 해서 그 습기들이 이슬이 되어서 가는 비처럼 내립니다. 헐몬 산이 있어서 습한 공기를 저녁에 잡아두고 밤새도록 이슬을 내리게 해 줍니다. 이슬비로 깡말랐던 그 대지들이 솟아나는 힘을 갖게 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서로 동거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그 현장에 마치 밤에 저기압을 따라서 헐몬 산을 넘지 못했던 습한 공기들이 이슬이 되어서 반드시 내리는 것처럼 축복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축복의 비밀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야곱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에 형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년 동안 형을 피하여 하란에 있는 삼촌 집에 살면서 돈도 벌고 많은 가축과 대 가족을 이루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야곱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형 에서와 화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밤새 기도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달라붙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형 에서와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야곱이 형과 화해하지 아니하였다면 영광스러운 족장의 반열에 끼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이 있었다면 바로 형 에서와의 화해를 한 일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라고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생애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삶의 스타일도 달랐고,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도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화해의 역사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냈다는 점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야곱의 하나님은 바로 화해의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시편 시인은 이 사건을 연상하면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야곱이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도 돌려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은 상대방의 마음도 바꾸어 주십니다. 형제의 화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이제까지 가졌던 잘못된 생각과 신앙을 바꾸어 야곱처럼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함이 없이 형제와 화해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 삶이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는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고 가장 선한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소유와 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사랑의 교제의 폭이 넓어지고, 그 사랑의 깊이가 더해지느냐에 따라서 최선의 인생이 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고 영생복락을 누리는 인생이 결정된다고 성경은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사랑의 수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또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사랑의 질과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질과 수준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의 질과 수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을 온전히 이룰 수 있어야 그것이 인생의 아름다움이고 그것이 선한 일이고 그것이 영생의 복이라고 성경은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또는 편리한 것으로 주변에 좋은 환경을 어떻게 이루고 있느냐에 대해서도 성경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진실로 내가 너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만난 형제들과 사랑의 충분한 교제를 교회 안에서 나누면서 누리고 있느냐를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믿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며 서로 짐을 져주고 서로 사랑하는 교제를 가정 안에서 누리고 있느냐? 를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가정이 사랑해야 될 자녀들과 섬겨야 될 부모들과 또 부부간에 깊은 사랑의 교제가 있으십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그 축복을 복스럽게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신 복된 성도들과 뜻을 같이하고 마음을 합해서 사랑의 교제를 온전히 누리는 아름답고 선한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서로 서로에게 좋은 "멘토"가 되어 주십니까? 사랑하고 있다면 누가 복 됩니까 ?

우리 인생은 언젠가는 떠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납니다. 가족들도 떠납니다.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함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렇게 유한한 사람이 영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언제 입니까?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인생이 영광스러워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인생이 복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치관입니다. 이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33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축복의 약속으로 주신 아름다운 노래, 이 아름다운 시편이 영원토록 가정에서 교회에서 노래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법궤를 빼앗긴지 20년 만에 시온 성으로 법궤를 옮기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된 아름다운 모습을 다윗이 부른 노래입니다. 연합의 아름다움을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에서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이 높은 헐몬 산의 이슬이 산들에 내리는 풍요로움과 영생의 복을 받는 것으로 노래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매력

김이곤 교수는 오늘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어찌 그리도 멋이 있을까? 어찌 그리도 매력이 있을까? 이웃들이 막힌 담 없이 연합하고 스스럼없이 한데 어울려 사는 그 일이! 아론의 머리에서부터 수염을 타고 흘러내려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헤르몬 산에서 시온 산 능선을 타고 굽이 굽이져 내리는 이슬과도 같구나. 그 곳은 주님께서 복을 내려 주신 곳, 영원한 생명의 복을 내려주신 곳이로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멋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제 잘난 멋에 산다고들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패션에 민감하게 멋있는 옷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각종 장신구를 통하여 멋을 내고 요즘은 성형 수술을 통하여 얼굴이나 몸매까지 멋있게 다듬는다고들 합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젊은이가 멋이 없다면 무슨 제미로 살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에게는 외적인 화려함이나 멋도 중요하지만 인격에서 풍겨 나오는 매력도 중요합니다. 외적인 멋은 부족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패션에 민감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사람의 인간미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육체미 보다 인간미가 더 중요한 매력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인의 매력을 말씀합니다.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하여 신자의 매력을 노래합니다. 사실 우리 신자들은 불신자들보다 어떤 면에서는 매력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은 무엇이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지에 대하여 말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 고 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고 참된 인간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삶에서 얻어지는 미를 찾아봄으로 의미와 교훈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매력 역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멋있고 매력적인 분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 할 수 있는데 주님 역시 외적인 아름다움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이라는 당시 천민이 살던 지역에서 사셨습니다. 또 육신의 부모조차 당시 귀족이나 부유층이 아닌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갈리리 어부들과 뜻을 같이할 정도로 평범한 보통사람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주님의 용모조차 수려한 분은 아닌 듯 합니다. 53:2 에서는 주님을 묘사하기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매력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막힌 담 없이 연합하고 스스럼없이 한데 어울려 사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의 매력은 연합하고 어울리는 공존하는 삶에서 나타나는 매력이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이의 친구셨다

주님은 그토록 무서운 독설로 기성 지도자들을 규탄하시면서도(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등) 그들과 담을 쌓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목숨을 내 놓을 만큼 진실히 대화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당시 특권층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낮고 천한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당하고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자, 동족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던 세리들,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도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던 창기들, 경멸과 천시로 정신병자가 된 불쌍한 여인들, 형제, 자매 심지어 부모로부터 까지 버림을 받고 천벌을 받은 죄인으로 취급을 받던 문둥병 환자들, 이 비천한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시고 격의 없이 마음을 주고받으며 감싸고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 인간 사이의 모든 담을 다 헐어 버리고 모든 이념을 다 헐어 버리고 모든 이와 담이 없이 형제들로 인정하고 그들과 동거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매력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매력이어야 합니다.

무슨 인간적인 신분이니 지역이니, 학연이니 이런 것에 매달리어 섹트화 하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가진 가장 무서운 병, 무서운 담이 무엇입니까? 학벌의 담, 지역의 담일 것 같습니다. 동향이라고 동문이라고 끼리끼리 담합을 하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는 절대로 끼리끼리 어울리는 그런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각박한 세상에서도 이념이 다르고 이익 추구의 방법이 서로 다르며 생의 가치관도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하고 어울리는 공존의 아름다움은 기독교인들의 아름다움입니다.

끼리끼리만 사랑하고 자기 집단만을 존중히 여기고 어울려서 멋을 내는 그것이야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신자만이 할 수 있는 매력 입니다. 기독교인은 멋이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고 함께하는 그런 멋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포용했습니다. 주님의 삶은 참으로 절망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희망을 가득심어 주신 삶이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사람취급은 커녕 짐승보다 더 천대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들, 특히 남편이 다섯이나 있어서 아예 패륜의 여인으로 자포자기 했던 저 수가성의 한 사마리아 여인, 그 여인과의 다정한 대화로 그 여인의 인간적인 고뇌와 그녀의 깨어진 가슴의 아픔을 치유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신 주님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인 것입니다.

일곱 귀신에 시달림을 받던 창녀 막달라 마리아, 모든 사람을 원수처럼 등지고 살았던 소외되고 절망으로 헤매던 그녀의 조각난 가슴에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길을 일으켜 마침내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친 주님은 참으로 매력적인 분이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이라고 지탄을 받고 개처럼 끌려와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있는 가련하고 불쌍한 이름 없는 여인을 구하시기 위하여기발한 기지와 용기와 지혜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는 인간 양심의 저변을 흔들어 놓는 명령으로 기고만장한 단죄의 무리들의 손에서 돌멩이를 내려놓게 하고 죄책과 수치로 흐느껴 우는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격려하신 주님은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전도서4장 9절에서 12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 지지 아니 하느니라"고 합니다.

주안에서 연합된 교회가 아름답다

현대는 연합의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두 사람의 연합이 한 사람보다 낫습니다. 세상 원리도 연합의 원리로 나아갑니다. 경쟁의 원리에서 연합의 원리와 방법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논쟁하고 대결하고 남을 거꾸러뜨리는 원리가 이제 相生의 원리로 바뀝니다. 기업들은 서로 통합하여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고 국가는 상생의 외교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세대가 필요로 하는 인물과 인간관계도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창의적이고 서로를 세우는 관계로 성숙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흐름을 모르고 사는 자가 많습니다. 相生이 아닌 相剋의 삶을 사는 자가 많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살면 피차 멸망한다고 경고합니다.

성경의 원리는 연합의 원리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베풀고 세우고 사랑하는 서로를 살리는 원리입니다. 그 이유를 전도서 기자는 함께 수고함으로 상을 얻고, 둘이면 혹시 넘어질 때 일으키나 홀로이면 일으키지 못하고,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며, 한 사람이면 패하나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는 삼겹 줄이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는 원리로 설명합니다. 연합은 서로가 사는 상급의 삶이며 격려와 승리의 삶입니다. 초대교회 성도가 터득한 진리로 박해가 일어나면 더욱 뭉치고 연합하고 용기를 주고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는 가면을 벗고 진실로 서로를 감싸 안고 서로 울타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연합에는 방해가 따른다

성령의 역사는 연합이고 화목이나 사단의 역사는 분리이고 분열이고 방해입니다. 이간자이고 거짓말쟁이의 앞잡이인 사단은 연합을 늘 방해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요시하여 분당을 만듭니다. 사람이 결코 하나님을 앞설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과 또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보다 앞선 것 모두가 포합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사람이 미워서 신앙생활이 방해되어 연합을 막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울 왕이 다윗을 미워하다가 얻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또 지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가슴이 없는 신앙 즉 눈물이 없는 신앙)입니다. 이는 일시적인 안목에 안주하여 편안함과 이기적인 믿음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고난을 받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보다 일시적인 안목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바라봅니다. 이는 결국 무관심을 가져옵니다. 이는 연합을 깨뜨려버리는 독소입니다. 또 양이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만심을 키워서 남을 무시함으로 연합을 방해합니다. 힘이 양과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자만심이 커지면 사람을 망칩니다. 하나님은 드러난 일보다 드러나지 않는 일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또 과거의 영광에 얽매어 사는 것입니다. 이는 내일의 도전을 피하고 오늘의 전진을 발목 잡습니다. 과거 지향적 삶이 아닌 미래지향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과제가 있다면 이제 서로 서로 더욱 가까워져서 굳게 결속하여 승리하고 이를 위해서 질적으로 성숙하는 것입니다.


화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화합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원리와 방법이 있습니다. 구경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구경꾼은 결국은 비판자로 남아서 즐기고 웃고 떠들지만 상급이 전혀 없고 후회의 열매를 얻고 망합니다. 참여한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 중에서 가나안 땅은 구경꾼은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세대는 죽고 새로운 광야세대는 뭉쳐서 가나안에 입성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참여하는 일군은 방향을 알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며 적극적인 자세와 자발적인 자세를 가지고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을 쫓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하고 주는 삶으로 성숙하여 새롭게 결속합니다.

연합함의 아름다움

형제가 하나 됨을 이루어 함께 사는 아름다움을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아론과 그의 후예들인 대제사장에게 기름 부을 때의 모습과, 헬몬 산에서 시온 산까지 내려오는 이슬입니다. 대제사장을 세울 때 쓰이는 기름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제조법에 따라 만듭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기름으로 널리 퍼지는 향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이 머리에서부터 흘러 옷깃까지 흠뻑 넘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하나 되는 모습에는 이런 향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아름다움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 최북단의 헬몬 산에서 남쪽의 시온 산까지 온 국토를 덮는 이슬은 무더운 건기 동안에 내립니다. 황량하게 타 들어가는 온 땅을 시원하게 적시고 생명을 돋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형제 사랑은 이렇게 황량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이 영원히 지속되는 복을 명하셨습니다. 이 생명은 생동감이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이룬다면 이러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형제도 나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는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힘듭니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함께 하나님의 자녀 된 저희에게 하나 됨의 아름다운 향기와 생명력이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용서와 치유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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