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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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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1-3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1. 구원은 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많은 오해 가운데 하나가 "예수 믿으면 천당"이라는 공식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인데, 교회 다니면 천당 가는 차표를 얻는 곳인 것 같이 인식되고 있는 오해입니다. 즉 예수 믿는 것이 교회 다니는 것이고, 교회 다니면 천당은 그냥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뭏튼 "예수 믿고 천당"이란 전도구호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수정되고 바로 잡혀야 할 것은 구원은 단회적 사건이지만 단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적절한 표현이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더구나 오늘 설교 본문이 적확하게 이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b)

2. 자라는 길

1) 잘못된 말을 버려야 자랍니다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1절)

좋은 과일을 먹으려면 전지를 잘해주어야 하듯이 좋은 신앙으로 성장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것, 쓸데없는 것을 잘라내 버려야 합니다. 그 중 베드로 사도는 좋지 않은 말의 습관들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악독(malice)은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즉 앙심을 품고 하는 말입니다. 궤휼(deceit)은 기만의 말입니다. 남을 속이는 말을 의미합니다. 외식이란 알맹이 없는 그럴듯한 포장된 말을 뜻합니다. 여기에 시기의 말과 비방의 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입니다.

말은 습관적 특성을 지니고 잇습니다. 말은 쓰면 자꾸 늘어나고 안 쓰면 잊어버립니다. 더구나 말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 말이 좋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엄청 헤치기도 합니다.

에모토 마사루가 쓴 "물이 전하는 말"을 보면 사람의 말을 물이 알아듣고는 그 결정체가 변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물리 가진 신비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말이 얼마나 힘을 가지고 있는가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 "고맙다"고하면 물의 결정체가 매우 반듯하며 뚜럿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워" "싫어" 그러면 그 반대의 형상으로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영혼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자기의 말이 남을 헤치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기 영혼을 좀먹듯이 상하게 할 것입니다. 실제로 화를 내며 남에게 욕을 하고 나면 우리 영혼은 한동안 힘을 못씁니다. 그래서 저는 늘 식구들에게 집니다. 지지 않으려고 간혹 좋지 않은 말을 하고 나면 마음이 아프고 영혼이 힘을 잃는 것을 실제로 느낍니다. 그러고 나면 말씀을 선포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을 돌아보며 살필 위로의 능력을 잃게 됩니다.

저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겐 같은 현상일 것입니다.     

요한삼서에 디오드레베라는 교회 지도자가 나옵니다. 요한 사도는 그를 두고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9-11)

아마도 디오드레베는 열심 있던 신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 자리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영혼이 자라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남을 악한 말로 망령되이 폄론하고 헤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런 자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며 그런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다고 경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2) 갓난아이처럼 젖을 사모해야 자랍니다.

잘먹는 아이가 잘 자랍니다. 잘 못 먹고도 잘 자란 사람은 드뭅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가장 힘든 것은 아이가 잘 먹지 않는 것입니다. 잘먹는 아이는 키우기가 매우 수월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려면 양식을 사모해야 합니다. 양식이 있는 곳에 거하기를 즐거워하며 찾아야 건강한 영혼입니다. 만일 스스로 돌아보아 영혼의 양식을 찾지 않고 있다면 중한 병에 걸려 있음이 분명합니다. 병든 아이는 먹을 것을 찾지 않습니다. 먹을 것을 주면 거부합니다. 먹은 것까지도 벹아 버립니다. 

이것은 악순환을 이루기도 합니다. 안 먹으면 병들고 병들면 더 먹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악순환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을 이루어야합니다. 잘먹어 건강하고, 건강해서 더 먹으려고 사모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어야 자랍니다

"신령한 젖"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앞의 수식어인 "순전한"(pure)이란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원액을 의미합니다. 즉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간혹 아이들이 잘 먹지 않으려고 할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색소나 향을 우유에 첨가할 때 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잘 먹곤 합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하면 그 우유의 순전도가 떨어져서 영양분이 모자라게 될 것입니다. 똑 같이 우유 한 통을 먹었는데 원액을 먹은 아이와 첨가물이 많이 섞인 것을 먹은 아이는 그 영양 상태가 다르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말들을 섞습니다. 마치 요리사의 능력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지듯이 설교자에 따라 신령한 젖을 더 잘 먹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첨가제가 많이 섞이면 섞일수록 우리 영혼에겐 그리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영혼의 성장을 위하여 원액인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며 묵상하여 자기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비록 맛이 적어서 조금밖에 먹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원액을 먹으면 어떤 요리된 말씀보다 더 우리의 영혼을 자라도록 만들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고 노래했습니다.

3.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우리 영혼이 주님을 향하여 자라고 싶어지는 것은 주님의 그 사랑을 맛본 자마다 그럴 것입니다. 속세의 노랫말에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누구나 다 주님처럼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린 딸이 아빠의 사랑 속에서 자랄 때 "나는 빨리 커서 아빠와 결혼 할거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꿈 많은 여중생이 선생님을 짝사랑 할 때도 "난 빨리 커서 선생님과 결혼하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사랑은 자신을 키웁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흑인 영가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 중 "I want to be a Christian"(신자 되기 원합니다) 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가진 자의 심령에 불을 짚이는 찬송입니다.

신자 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비록 그들의 생활은 고달픈 노예의 일상이었지만, 자기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시는 그 사랑을 맛본 다음, 오직 참된 신자가 되기만을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백인들의 가정에서 종살이했지만 그 심령은 자유했고, 마치 유대인들이 역사의 고통 속에서도 오직 신앙으로 버티어 온 것처럼, 그들은 주님을 닮으려고 하는 거룩한 사랑 으로 고난을 극복해 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힘들 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자유함을 노래했습니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주시는 내 주님께

이처럼 그들의 자유는 주님께 돌아가 그의 인자를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인자하심의 맛을 봄으로 다시 고난의 현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금번 2003년 전교인 수련회를 통하여 주님의 인자하심을 다시 맛보는 은총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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