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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입니다. / 히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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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입니다. 
본문 : 히브리서 8장 1절 - 13절


지난 7장에서는 예수님이 온전한 대제사장이심의 논증되었고 오늘 8장에서는 예수님의 더 좋은 언약, 새 언약의 중보이심을 논증합니다.
7장의 내용, 예수님이 온전한 대제사장이시라는 의미는, 이제는 예수님 덕택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의 중요성은,

1)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서야 비로소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친하게 되어 심판하시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친밀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누립니다.

2)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인생을 바라보아야 모순된 세상에서의 분노와 원통함, 비통함을 극복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도 바르게 살아가는 이유와 소망을 확인하며 그 담대함과 확신을 얻습니다.

3)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사람은 인생살이에서 느끼는 억울함, 초라함, 비애감, 연민의 늪에서 헤어나와 비로소 기쁨과 감사와 평안의 심성으로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 주에 저희가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8장의 내용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절>의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이란 예수님이 온전한 대제사장이라는 말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대제사장이심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사장,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고 모순된 세상에서도 똑바로 살아가는 소망과 능력을 주시고 인생길에서 분노와 슬픔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평강으로 살아가게 해 주시는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2-4절> 예수님께서 다른 인간 제사장들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써 온전한 제사를 드리신 후에 부활하셔서 하늘에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오늘도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5,6절>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로 소망만을 자극하는 그림자나 모형이 아니라, 은혜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는 사역이기에 "더 아름다운 직분"<6절>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더 아름다운 직분을 갖으신 것은 예수님이 더 좋은 언약,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중보라는 말은 중재자(mediator)라는 말이고 언약의 중재자라는 것은 언약의 내용을 실현(accomplishment)시켜 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새 언약의 내용, 알맹이를 인간으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누리도록 다리가 되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새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0-13절>까지 새 언약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일찍이 예언하였던 것입니다<렘31:31-34>.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포하셨던 그 새 언약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10-13절>에 나타난 언약의 내용,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직선적으로 보면 크게 네 가지입니다.

1.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10절>
2.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10절>
3.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11절>
4.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12절>

이것을 의미상으로 정리하면, 둘째 것,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는 예레미야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어 나오는 어구로서 나머지 세 가지를 다 포함하는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서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표현이 예언의 주제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수립된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도자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따르고 하나님의 보호의 사랑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관계의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었을 때,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셔서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우리가 누리는 은혜가 이런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다음과 같은 은혜를 경험합니다.

1.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10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어에서 생각과 마음은 다른 개념입니다. 생각이 지적인 측면이라면, 마음은 감성과 의지의 측면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해가 되면, 마음이 고쳐집니다. 하나님의 법이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바른 것, 진리임을 알았고 또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정서적 소원과 의지적 열망이 반듯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전인격적인 순종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에 의하면, 이는 우리의 총명을 초자연적으로 밝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게 하는, 성령의 유효한 작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짧게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셔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 첫째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거룩한 소원과 능력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10절>"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깨우치는 것 이전에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주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너희 생각에 내 법을 두고 너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라"는 명령, 율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해라'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긴 장(chapter)이 시편 119편입니다. 히브리 문학 양식상 시편은 종종 1절에 대명제를 선포하고 나머지 절들에서 그 선포된 대명제를 설명하는 양식이 많이 나옵니다. 시119편도 그렇습니다.
시119편은, 1절에서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선포하고 그리고 나머지 많은 구절들에서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어떻게 복이 있는지, 얼마나 복이 있는지를 노래하는 시편입니다.

예를 들면, <11절>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사람의 마음에 주의 말씀이 새겨지면 죄의 유혹에서 승리합니다

<37절>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도는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켜 줍니다.

<45절>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주의 도가 마음에 새겨져야 참 자유를 누립니다.

<77절>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주의 법이 마음에 새겨졌을 때,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읽으면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을, 계명을 지켜야 되겠다, 붙들어야 되겠다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인 줄 아는데 쉽지 않다는 것이고 마음에 원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개망나니처럼 살지않고 잘 살고 싶지요? 멋있게, 떳떳하게, 사람들에게 존경 받으며, 양심에 거리낌없게 잘 살고 싶지요? 그런데 인간의 문제는 그게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덕, 윤리, 종교 다 배웠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내 삶에 적용이 필요한 결정적 순간에는 내 마음과 생각에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살자" 다짐하고 다짐하건만, 번번이 오염되고 오만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의지로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심으로써,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이 떠오르게 하시고 비로소 가능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슥4:6>에 보면 스룹바벨을 향한 유명한 예언적 선포가 나와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룹바벨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여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성전 재건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에게 뿐만이 아니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이루십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선포처럼, 예수님이 중보가 되어서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 주심으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그 실상, 로마서에서 밝혔습니다. <롬7:21-24>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왜 사망의 몸입니까?

선을 행하고 싶은데, 정작 결정적 순간에 보면 악을 행하고 맙니다. 그래 내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롬8장에서 고백,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되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롬8:3> "율법의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은혜이지요? 사람이 아무리 용을 쓰고 애를 써도 불가능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져서 거룩한 소원이 일어나고 거룩한 능력이 용솟음쳐 오르는 것, 그것이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아니 당신은 이 은혜를 받고 싶으십니까? 예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2.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11절>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가 되어 주셔서 실현시켜 주시는 두 번째 은혜는 영적 해갈, 영적인 기갈로부터 해소되는 것입니다.

<11절>의 말씀이 더 이상 성경공부할 필요도 없고, 설교도 들을 필요도 없고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실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하나님께서 영적 기갈을 해소시켜 주는 맛을 경험해 본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또 더욱 알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벧후3:18>

<11절> 잘 보십시오."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했는데, 어떤 모습입니까? 보니까 자기 동포들, 형제들이 참 답답하게 살고 있거든요.

오늘날 같으면, 여러분 이런 사람 만나면 무슨 말 해주고 싶습니까? "대책도 없이 유흥비로 카드 썼다가 빚만 잔뜩 지고 그리고 생각하는 게 복권이나 하나 당첨되면 인생 역전 되는데.." "제발 교회 좀 나가라, 그래서 사람 좀 되라." 속상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만, 사랑으로도 권면하지요. 예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을 알면, 그렇게 안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잘 믿으십시오. 그래야 그 중독에서 헤어나옵니다. 이러지요?

알콜 중독이든 일 중독이든 TV중독이든 연애 중독이든.. 사람의 심령이 집착하고 중독이 되는 이유는 사실 영적인 문제입니다. 마음의 병이지요. 마음, 심령이 허하니까, 함몰되어 있고 갈증을 크게 느끼고 있기에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면, 중독은 절대로 못고칩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사랑으로든, 구박으로든 "너는 꼭 하나님 믿어야 한다, 예수님 만나야 한다.." 권하지요?

<11절> 말씀이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아가 더 이상 이웃을 향하여 형제를 향하여 그런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다들 하나님을 알아서 이제는 그 죄악의 중독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들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심령의 갈증을 해소해 주셨기 때문에 이웃을 향하여 형제를 향하여 그런 권면, 구박 안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암8:11-13>에 보면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삶이 곤고하고 피곤하고 지치는 이유, 세상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고갈되어서 그럽니다. 왜 어떤 사람은 하루에 대여섯 시간밖에 안자고 취미, 오락 이런 것 하나도 안해도 스트레서 안받고 힘있게 멋있게 잘사는데 왜 어떤 사람은 조금만 일해도 금방 지치고 스트레스받고 그럽니까?

영적으로 소생되어 있느냐 고갈되어 있느냐의 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혼이 죽어 있거나 파리해져 있으니 무슨 수로 세상의 파도를 이기며 버티며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는 깊은 갈증이 있습니다. 존재에의 갈증, 영원의 갈증, 행복에의 갈증, 의미에의 갈증...그런데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파생되는, 영적인 갈증입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목이 말라서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하며,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고 있습니까? 쉽게 보이는 것이 돈인지라, 돈에 목숨걸고 쾌락에 미친 짓하고 어떻게는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식 아닌 것에 자신의 힘과 정열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지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게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한 확실한 은혜니라" <사55:1-3>

또 이사야가 외친, 이 약속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고 달려가도 곤비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이 약속,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앎으로 영적인 기갈, 갈증이 풀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보가 되어 주셔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적 곤고함과 갈증에서 다 해방됩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내 안에 영생의 강물이 풍성하기에, 세상의 것이 없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생수의 강물이 흐르기에 어느 순간에도 평안과 담대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시라는 것은 이 생명의 은혜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맛보셨습니까? 이 은혜를 맛보며 누리기 원하십니까? 예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오십시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 그는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그의 백성이 되는 바른 관계 가운데 서 보십시오. 다윗에게 허락하셨던 확실한 은혜를 당신에게도 베풀어 주십니다.


3."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12절>

예수님이 새 언약의 중보가 되어 주셔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여 그 백성으로서 누리는 대표적인 은혜, 세 번째는 죄사함의 기쁨, 죄짐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제일 의기소침하게 합니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당신 자신이 제일 초라하게 느껴지십니까?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합니까? 돈이 없어서 그럽니까? 빽이 없어서 그럽니까? 못생겨서 그럽니까? 세상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돈이나 빽이 없어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죄악의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의기소침해지는 것입니다.

죄악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릴 때 제일 낙심하며, 죄에 넘어졌을 때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며, 죄의식에 잡혀 있으면 다른 사람을 바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를 고개숙이게 합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킵니다. 죄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죄는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죄는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이 죄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합니다. 죄의 형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죄의 형벌로부터의 해방뿐만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죄짐에 눌려 있는, 정죄당함에 짓밟혀 있는 심령이 자유와 해방을 누립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오늘 본문 <12절>에 "불의"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원어의 의미는 수동적인 불의라기 보다도 마음의 악함(wickedness), 사악함, 완악함을 말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악한 모습, 뻔뻔스럽고 안하무인이고 파렴치하고 이런 모습 보면 무슨 느낌을 받습니까? 화나지요? 한 대 때려 주고 싶지요. 그게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사람은 과실치사와 같은 죄는 쉽게 용서해도 악을 보면 분노합니다. 쉽게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악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셨습니까? 내 안에 악이 도사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난 죽어도 싸!"하며 자학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 이게 우리들의 솔직한 정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 약속되어 있습니까? 그 악함을 분노하시지 않고 긍휼히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그래, 오죽하면 그랬겠냐?"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새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악함을 분노하거나 못 참아하시지 않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사악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용서하십니다. 잊어버리십니다. 없는 것처럼 대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가 되어 주셔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 졌습니까? 어떻게 우리에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회복을 통해서 영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 새겨지고 영적 기갈이 해소되며 영적 해방이 누려지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이 은혜의 복락, 새 언약의 알맹이의 성취를 위하여, 우리가 행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흘리시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쏟아 부으심으로, 죽으시기까지 당신의 사랑을 베푸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중한 능력을 나타내셔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이 은혜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이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을 위하여 당신이 무언가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당신의 마음과 삶을 의탁하고 온전히 맡기십시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 분을 따르십시오. 그 믿음이, 새 언약이 약속한 놀라운 은혜들을 당신의 마음 안에서, 삶 속에서 충만하게 누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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