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해의 끝과 시작 / 단 8:18~27

  • 잡초 잡초
  • 503
  • 0

첨부 1


제목  이해의 끝과 시작
본문  다니엘 8:18~27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두 번째 본 환상인데 두 뿔 가진 숫양과 숫염소가 등장하고 숫염소의 뿔이 꺾이고 새 뿔들이 돋아나고 그에 대한 설명이 있고 대단히 복잡한 내용이 전개됩니다. 
이 환상에서 두 뿔 가진 숫양은 메데와 파사(페르시아)의 임금들이라고 20절에 풀이되어 있습니다.
숫염소의 뚜렷한 뿔은 알렉산더 대왕인데. 8절에 숫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성할 때 뿔이 꺾인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설흔두 살, 한참 나이에 갑자기 죽은 것을 말하고, 그 다음에 난 뚜렷한 뿔 넷은 알렉산더의 부하 넷이 천하를 사등분하여 다스린 것을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이 환상의 정확한 뜻은 환상을 본 당사자인 다니엘도 몰랐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본문의 끝 절인 27절의 후반부를 봅니다. “내가 그 환상으로 말미암아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이 부분을 9장과 연결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27절의 후반부는 다니엘 자신도 그 환상의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성경 개정판」은 이 부분을 “내가 본 그 환상 때문에 나는 몹시 놀랐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니엘은 자기가 본 환상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조바심을 치지 않았습니다.
9장을 봅니다. 9장은 ‘다니엘의 기도장’입니다.
3절을 보세요.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그리고 4절 이하에 긴 기도문이 나옵니다.
참회의 기도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봉헌기도, 느헤미야의 애국의 기도, 예레미야의 비탄의 기도, 바울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 그 가운데 다니엘서 9장의 기도는 민족을 위한 참회의 중보기도로 유명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놀라운 환상을 그대로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쏟아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이해하려고 애써도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의 끝’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끝이 되면 주저앉거나 되돌아오거나 떨어지기 쉬운데 새로운 세계를 열고 들어갑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설교 제목을 ‘야고보도 기도다’라고 하려다가 너무 튀는 것 같아서 ‘야고보와 기도’로 바꾸었다고 했는데 이번 주일에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하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서 ‘이해의 끝과 시작’이라고 줄였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서 기도, 더 깊은 신앙, 하나님께 대한 신뢰, 시작되어야 할 것들이 만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을 많이 만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없어야할 텐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지, 왜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인지, 내가 할 수 있으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데 왜 그 일이 나에게 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지, 왜 기도가 이렇게 응답되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이해의 끝이 여러분, 원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불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탈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해의 끝에서 탈선을 했었던 사람의 본보기로 지금 한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에 등장하고 있는 시라소니라는 싸움 잘 했던 실존인물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몇 번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싸움꾼이 아니었습니다. 1916년에 신의주에서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본래 이름은 이성순인데 ‘성’자는 거룩 성(聖)입니다.
아버지는 이기정 장로인데 전 재산을 바쳐서 신의주 삼일교회를 세웠습니다. 시라소니 자신도 이 삼일교회의 부설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전 재산을 교회에 바쳤기 때문에 집이 매우 가난해졌습니다. 시라소니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반발하고 열일곱 살에 집을 뛰어나와 싸움판을 찾아다니며 싸움 실력을 키웠다고 합니다.
그는 40대에 이르러서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와서 그야말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 분이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왔을 때 신앙을 지도한 목사님, 다시 세례를 준 목사님이나 장례를 집례한 목사님, 복수를 하려할 때 만류한 장로님, 아드님도 싸움꾼이었다가 아버지가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아들도 화개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그 기록들을 자세하게 가지고 있는데 참 감동적입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시간이 흐른 다음에 비로소 이해하고 제 길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회와 나라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 이해의 끝을 만나는 경우가 많지요?
이해의 끝에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이해의 끝이 기도로 연결되기 바랍니다.
이해의 끝이 더 큰 신앙으로 연결되기 바랍니다.
이해의 끝이 주님 앞에 다시 한 번 무릎 꿇는 것으로 연결되기 바랍니다.
이해의 끝이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이해의 끝에서 추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날아오르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번데기가 나방이가 되어 고치에서 벗어나서 훨훨 날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나방이가 고치에서 벗어날 때 애를 많이 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다가 나방이를 도와준다고 고치를 좀 벌려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밖으로 나온 나방이는 날지 못하는 달싹둥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껍질이 째지는 아픔은  자기가 스스로 겪고 극복해야 합니다

김성일(金成一)이라는 크리스천 작가가 쓴 「바깥 사연들」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강길례라는 여자 선교사입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데 어려운 지역에서 정성껏 양육하던 처소 교회들을 다른 교단에 빼앗깁니다. 그리고 탈북자를 돕는 일을 하는데 한 탈북자가 국경을 넘는 것을 도와주다가 총에 맞습니다. 이 여자 선교사를 지켜보던 남자 주인공이 하나님을 향해 ‘도대체 당신이 하는 일은 뭡니까?’ 부르짖습니다.  소설의 중간 중간에 이 말이 나옵니다.
이 소설에 깔려 있는 것은 아벨의 문제입니다. 아벨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제사를 드린 후에 받은 보상은 죽음뿐이었습니다. 아벨의 일은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소설은 시원한 결말을 내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의 답을 계속해서 찾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 소설의 끝에 있는 작가의 ‘쓰고 나서’라는 글을 읽으면서 저는 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앞부분은 이렇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내가 소설 ‘바깥 사람들’을 썼을 때 사실 나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 때문에 요즘 말로 하면 좀 삐져 있었다. 그 분이 시키시는 것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칭찬을 커녕 핀잔만 당하고서 화를 내지 않는다면 남편의 입장에서 꽤 편할지는 모르나 매력 없는 아내이다(이 분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속상한 마음의 대변자로 선교사 강길례를 내세웠던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조금 당황한 이유는 이 작가가 깊은 신앙을 갖고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작가는 60대의 감리교 장로님인데 여러 해 전에 저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한 일이 있습니다. 특별한 신앙체험이 있고, 종말론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은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많은 글을 발표하고 있는 교계 중진입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 분을 저 이상으로 잘 알고 가까이 지내고 있는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그 나이에, 그 연륜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 있고 심통이 나서 소설 속의 주인공을 대변자로 내세워서 항의를 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지요.
또 ‘나는 아직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정직함도 저에게 ‘너는 과연 얼마큼 정직하냐?’는 질문을 갖게 하면서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글의 뒷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내 항의 때문에 화를 내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 분의 의도를 설명해 주지도 않으면서 그냥 침묵을 지키면서 지켜보고만 계셨던 것이다. 혼자 약올라서 팔딱거리던 나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분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분에 대해서 더 넓게 더 많이 생각할 수 있는 특별한 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던 아벨의 문제에 대해서도 평안을 찾았고 이 소설이 탄생했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것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로운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이해의 끝을 극복함으로써 새 세계를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박국서 1장에는 하박국의 질문들이 계속되는데 여러분 그 질문들의 끝에 ‘이해할 수 없나이다’라는 말을 붙여서 읽어보세요.
2절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말씀에 속으로 ‘이해할 수 없나이다’ 덧붙여 보세요.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이해할 수 없나이다’가 후렴처럼 잘 어울릴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퍼부은 끝에 하박국은 파수하는 곳, 성루에 서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실는지 보겠다고 합니다. 정말 끝까지 온 것입니다.
그 끝이 무엇으로 연결되었습니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b)라는 대답으로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대답을 받아들일 때 하박국에게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합3:18) 찬양하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이해의 끝에 섰을 때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립니다.

이번 주간은 광복절이 들어있는 주간입니다.
감리교회는 광복절이 들어있는 주간의 주일을 북한선교주일로 정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솔직한 마음을 가져봅시다. 오늘을 북한선교주일로 지킨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습니까?
‘새삼스럽게 뭘…’ ‘성가시다“ ’부담되네‘ 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일반적인 주제를 갖고 예배를 드리면 훨씬 유익하고 은혜가 될 터인데 한 주일 손해보네’ 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그런 마음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예배를 인도하는 입장에서도 부담이 됩니다. ‘아, 오늘은 틀림없이 아멘 소리 적게 나오겠구나!’ 하게 됩니다. 이제 ‘아멘’ 소리로부터는 어느 정도 자유함을 얻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 소리 많이 나오면 신이 나지요.

매주 토요일 「국민일보」의 마지막 면에는 ‘전국주일예배 안내’가 실립니다. 교회 이름, 목사님 사진, 설교제목과 본문, 예배 시간이 실리는데 ‘목사님들이 이번 주일에는 어떤 주제로 설교하시나?’ 참고하기 위해서 한 번 살펴봅니다.
어제 그것을 살피다가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설흔여섯 개 교회의 예배가 안내되었는데 그 가운데 광복절을 주제로 한 설교를 하는 교회는 둘입니다. 여러 목사님이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 문제를 오늘 설교의 주제로 다루고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이 주간 양들에게 필요한 말씀이 어떤 것일까?’ 정성을 다 해 기도하면서 설교의 주제를 정하고 준비하기 때문에 설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은 삼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신문을 발행하는 교파에 속한 교회들이 그 안내를 많이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광복절을 외면하는 예배가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일에 광복절이나 평화통일 기원, 북한선교, 이런 것을 주제로 예배를 드리는 목사님들은 나같이 성미가 급한 분들이고 성품이 원만한 목사님들은 틀림없이 다음 주일에 지키려나보다’ 생각하면서 서운한 마음을 달랬습니다.

저는 1945년 8월 15일에 우리 나라에 해방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믿고 있기 때문에 광복절은 ‘준(準) 교회절기’로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삼일운동은 분명히 대표적인 기독교민족운동이기 때문에 삼일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에 놀라운 부흥을 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 성경 중심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특징은 민족교회라는 점입니다. 민족교회라는 것은 민족과 애환을 같이한 교회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애국단체는 아닙니다. 교회를 민족운동의 통로나 방편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교회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민족교회의 특징을 살릴 때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부흥했으며 이 특징에서 멀어질 때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활기를 잃은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감리교회들이 감리회 본부의 방침에 따라 오늘을 북한선교주일로 지키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58년 전에 광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2의 광복인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북한선교에 힘쓸 것을 다짐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이것을 귀찮아하는 것은 지나친 말인 것 같지만 여러분, 죄입니다.
분단현실 가운데 있는 민족에게 죄를 짓는 것이고, 북한의 복음화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분명히 죄를 짓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이제 남은 시간에 본문에 의지해서 북한선교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북한에는 사회주의 국가, 독재국가, 가난한 나라, 주체사상의 나라, 구호가 많은 나라, 매스게임을 아주 잘 하는 나라, 핵 문제로 말썽을 일으키는 나라, 그 밖에도 많은 이름이 따라 다닙니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들, 북한 문제를 살피는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말할 때 ‘이해할 수 없는 나라’라는 말을 합니다.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일인 장기독재가 어떻게 그렇게 가능한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폐쇄적일 수 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가난할 수 있는지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또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이렇게 오랫동안 분단되어 있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통일을 달라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육십 년이 가깝도록 응답을 안 하시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남한은 자랑스러운 이름을 여럿 가지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에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룩한 나라’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나라’ ‘2002년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나라’  그런데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이 있습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이름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나라, 혼란스러운 나라, 천재지변에 시달리는 나라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분단국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낫습니다. 듣기 언짢으시겠지만 아프리카의 후진 부족국가도 우리보다는 낫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마침 내 앞에서 자리가 다 차서 혼자 서서 가게된 경우를 만나면 어떻습니까? 웬일인지 모르게 어색하지요.
우리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것은 세계라는 버스에 모두 앉아 있는데 혼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더 큰 뜻이 담겨 있고 놀라운 역사가 준비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간이 교역자와 직원들의 휴가 주간이었는데 저는 등산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휴가를 유익하게 보냈습니다.
그 가운데 하루는 가족들과 짧은 여행을 했습니다. 요즘 매스컴에 경의선 남북연결과 관련해서 도라산역(都羅山驛)이 가끔 등장하는데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도라산은 높이 156m의 높지 않은 산인데 신라가 패망하고 경순왕이 개성에 와서 항복을 하자 왕건은 자기의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과 결혼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낙랑공주는 경순왕을 위로하기 위해 이 산에 영수암(永守庵)이라는 암자를 지었는데 경순왕은 여기 살면서 신라의 수도를 늘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도라’는 신라의 수도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유래를 알고나서 ‘내 마음대로라면 이 산 이름을 도려산(都麗山)으로 바꿨으면 좋겠다’ 했습니다. 신라의 수도를 바라보며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바라보며 통일을 기원하는 산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면 북한에서 펄펄 뛸 것이 분명하니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요.
도라산 안보관광코스 가운데 도라전망대가 있는데 도라전망대 벽에 인상적인 글귀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 지금 파워  포인트로 볼 수 있는 사진에서는 ‘분’자만 확실하게 보일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설교에 인용할 줄 알았으면 그것을 사진을 찍어올 터인데 거기서는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도라전망대’라는 글씨를 쓴 분은 여용덕(呂容悳)이라는 제가 잘 아는  목사님입니다. 통일찬송가가 처음 나왔을 때 「찬송가」라는 제호를 쓴 분인데 그 분에게 ‘목사님이 쓴 글씨가 거기 잘 있습디다’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 글씨를 중심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글입니다.
‘여기는 분단이 끝나고 통일이 시작되는 곳입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분단을 끝내고 통일이 시작되도록 함께 힘씁시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문장을 보면서 ‘분단은 이제 곧 끝나고 통일이 시작된다’ 이렇게도 해석해 보았고 한 걸음 더 나가서 ‘통일이 시작되었다’라고도 해석해 보았습니다.

‘분단의 끝 통일의 시작’이라는 글을 보면서 저의 아내가 ‘저 문장을 만든 사람은 틀림없이 크리스천일 것이다’ 했습니다. 저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담입니다만 도라산역을 가는데 길을 여러 번 잃어버렸습니다. 영동고속도로로 나가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자유로로 해서 임진각 옆에 있는 임진강역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5분을 가면 도라산역인데 임진강역까지 가는 동안 대여섯 번을 잘못된 길로 들어섰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가족들에게서 핀잔을 들으면서도 꾸준히 가서 정해진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통일도 마찬가지, 헤매는 것 같지만 꾸준히 가면 언젠가는 통일에 이르게 되겠지’ 했습니다.

9장 2절을 봅니다. 다니엘이 성경을 읽다가 ‘아, 이제 예루살렘이 재건될 날이 다 되었구나!’ 깨닫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렘25:11)라는 말씀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로 끌려온 것은 기원전 605년의 일입니다. 다니엘서 9장은 다리오 원년의 일인데 다리오 원년은 기원전 538년입니다. 포로가 된지 67년의 일입니다.
‘아, 이제 해방의 날, 귀환의 날이 가까웠구나!’ 깨닫습니다. 다니엘은 긴박감을 느끼고 참회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긴박감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참회의 기도가 더욱 필요합니다.

다니엘은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산해진미를 거부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두 번이나 풀어주었습니다.
높은 벼슬을 하면서 바벨론 온 지방을 잘 다스렸습니다.
풀무불에 들어가면서도, 사자굴에 들어가면서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벨사살 왕의 잔치자리에 나타난 글씨,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의 뜻을 풀어주었습니다.
여러 환상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이 한 이 많은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 9장의 기도입니다.
다니엘서의 열두 장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장을 꼽으라면 9장을 꼽아야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 통일이 된다는 시간 약속은 없습니다. 이 점이 다니엘서와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하신 말을 기억하면서 정확한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곧 이루어질 줄로 믿고 준비하는 믿음이 더욱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우리는 9장 17절의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얼마나 간절한 기도입니까?
우리는 ‘주의 얼굴빛을 북녘의 황폐한 제단들에 비추시옵소서’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북한에 「조선중앙년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사에서 발행하는 책인데 지난 한 해 동안 중요한 일들을 다 수록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1950년 판을 보면 그 당시, 그러니까 1949년에 북한에는 2000여 개의 교회와 20만 명의 신자가 있다고 북한 당국이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1945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서 교회에 서서히 박해를 가하기 시작해서 그 많이 줄어들 무렵인데 이만한 숫자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제단들이 다 황폐해졌습니다. 거기에 주의 빛이 비치게 해 달라고 다니엘 이상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합니다.
우리에게는 8장 26절의 환상이 필요합니다.

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주야에 대한 환상”은 어떤 환상입니까?
그 앞에 14절에 기록된, 성소가 회복되어 아침과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게 되는 환상을 말합니다.

「표준새번역성경 개정판」은 26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설명한
아침과 저녁 제사 환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아직 멀었으니,
너는 환상의 비밀을
잘 간직해 두어라

천사 가브리엘은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다니엘에게 ‘예루살렘은 회복된다. 너희들은 성전에서 다시 아침과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게 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환상을 가져야합니다.
북한선교주일은 북한 땅 방방곡곡에서 진정한 의미의 예배가 드려질 날이 곧 온다는 환상을 우리 모두 나누어 갖는 주일이 되기 바랍니다.

요즘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말은 ‘꿈은 이루어진다’입니다. 이 말의 ‘꿈’ 자 다음에는 별이 들어가  ‘꿈★은 이루어진다’로 되어 있습니다.
북한선교에 대해 생각할 때 별 대신에 십자가를 넣고  ‘꿈†은 이루어진다’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곳에서 이해의 끝에서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 위에서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이 원리를 북한과 우리의 분단상황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북한에 대해, 통일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길이  더 가까이 있는 것을 믿으면서 기도하면서 준비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