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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설적인 진리 (고후 6: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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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역설적인 진리
성경말씀 : 고린도후서 6:8-10


우리는 언제나 상식을 존중해야 합니다. 상식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납득하는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이 상식을 무시하고 행하면 반드시 불상사가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불이 뜨겁고 물건을 태우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불을 다룰 때 조심합니다. 만약에 불에 대한 상식을 무시한다면 불에 데거나 화재를 내거나 해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식을 존중하고 상식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는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대접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하셨습니다. 또 사람은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고 보전하는 데 힘씁니다.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분명히 우리의 상식에 어긋납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상식에 어긋나지만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반드시 신앙의 역설적인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근시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해서 웃고 우는 차원에 머물지 아니하고 믿음의 눈으로 멀리 바라보고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어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의 역설적인 진리를 잘 보여 줍니다.


첫 번째로,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성도는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성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둠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빛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이면 어김없이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이 바쁜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주일마다 교회에 간단 말이냐고 말합니다. 또 신나고 재미난 일이 얼마나 많은데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아까운 시간을 보내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불신 이웃의 비난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로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귀한 다이아몬드라도 그것을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유리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석을 볼 줄 아는 보석 감정사와 같습니다. 신령한 영적 세계를 볼 줄 아는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영광된 것이고 욕된 것인지를 압니다.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삶인 줄을 압니다. 동시에, 신앙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비난 받는 것이 욕된 것이 아니요 영광스러운 일임을 압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사도들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복음을 믿는 자들이 많아지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시기하여 잡아다가 공회에 세웠습니다. 그 날 사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는 협박과 함께 채찍에 맞는 수모를 당하고 풀려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큰 욕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로 인해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보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공회에서 많은 사람 앞에서 죄인처럼 심문을 받고 욕을 먹고 매를 맞았으니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그러나 사도들은 세상적인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이 당한 것이 모욕이 아니라 무한한 영광이 됨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믿는 일로 비난 받고 욕을 먹게 되거든 속상해 하거나 근심하지 마시고 사도들처럼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다니 이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시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정작 그리스도인에게 욕된 것은 핍박과 시험이 다가올 때 굴복하여 세상과 타협하고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면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욕됨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받는 욕됨조차도 우리에게 무한한 영광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아시고 기쁨으로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이름으로 부릅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추종자’ 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명칭은 오늘날 가장 고상한 칭호에 속하지만 원래는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에 대하여 그 도시 사람들이 붙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행전 11장 26절에는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는 증언이 나옵니다. 그 당시 불신자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자기들과 전혀 다른 별난 사람들로 여기고 붙인 이름이 오늘날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별된 사람들이므로 성도라고 부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일컬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빌 3:20). 이는 성도들은 천국의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방금 소개한 이름들은 하나같이 영광스럽고 거룩한 이름들입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는 악의에 찬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불신 이웃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예수쟁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쟁이’란 기술자 또는 전문가를 뜻하는 ‘장(匠)이’를 낮추어서 부르는 말입니다. 비록 비하하는 의미로 쓰이는 이름이긴 하지만 우리를 ‘예수 전문가’로 인정해 준 것이므로 나쁠 것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총독 벨릭스 앞에서 사도 바울을 고소하면서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염병은 장티푸스를 가리키는데 걸리면 고열에 심한 고생을 합니다. 더구나 전염성이 강해서 1종 전염병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보고 ‘염병같은 자’라고 한 것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끈덕지게 예수님을 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사도 바울을 위험한 인물로 보았으면 염병이라고 했겠습니까! 또한 그는 사기꾼이요 말쟁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오늘날도 불신 이웃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들을 악한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보면 불신 가족들로부터 악한 이름으로 불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상 제사를 지내는데 성도들은 제사상에 절하지 않기 때문에 불신 가족으로부터 조상도 모르는 불효자라는 비방을 듣습니다. 그럴 때 성도님들께서는 슬퍼하지 마시고 도리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참 생명의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성도님들께서는 평소에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들에게 사랑을 나타냄으로써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의 선한 행실을 보고 저들이 감동을 받아 기독교에 대하여 가졌던 좋지 못한 선입견을 고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신 가족이나 동료의 핍박에 겁을 먹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신앙생활에 큰 손실을 입게 되고 영적 싸움에서 패하여 성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주 안에서 주어진 아름다운 이름에 합당한 삶을 위해서 힘쓸 뿐 아니라, 불신 이웃들이 던지는 악한 이름도 기쁨으로 소화하심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비방 가운데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속이는 자’라는 것입니다. 거짓말하고 속이는 일은 불신자들이 좋아 하는 일이지, 진리에 속한 성도들이 좋아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보고 속이는 자요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그들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여름철이 되니까 티비마다 납량특집을 방영합니다. 그 같은 귀신 이야기는 전적으로 거짓된 것이지만 그런 프로를 방영한 이유로 비난을 받는 방송사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인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몰두합니다. 또 최근에 우리 사회는 조폭 신드롬에 빠져 있습니다. 영화나 연속극의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조폭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와 못지않은 것이 불륜을 주제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류의 영화나 연속극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기 때문에 그 내용이 거짓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하면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그 대신 허황된 미신과 거짓으로 꾸며진 진화론은 과학적 진리라고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후서 4장 3절, 4절에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거짓이 판을 치는 말세가 가까울수록 성도다운 진실한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다운 삶에 관해서 빌립보 4장 8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범사에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무시당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크게 인정받는 자입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궁창의 빛”과 “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는 성도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인기 연예인들을 보고 스타라고 하지만, 진실로 영원토록 빛나는 스타는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가장 무명한 성도라도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보다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알아주셔야 진정으로 유명한 자이지,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누가 유명한 사람인지는 장차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판명날 것입니다. 그 날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성도들을 시인하실 것이지만 믿지 않던 자들에 대해서는 “내가 너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주님께서 알아주시므로 유명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런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본래부터 유명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나같이 무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이 대부분이요, 그 중에는 죄인취급 받던 세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유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한 자가 되기 위해 주님의 일에 더욱 열심 내시기 바랍니다.


다섯 번째로,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느라 온갖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쓰러졌는데, 사람들이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다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숱한 핍박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는 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막다른 골목에 처할 때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미사 건져 주셨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 죄로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달군 풀무불에 던짐 받았습니다.

불이 뜨겁고 왕의 명이 엄한지라 그들을 불속에 던져 넣던 군사들이 타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세 사람은 불 가운데서 유유히 거닐고 있었습니다. 불의 세력이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이 세 사람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은 이제부터 30일 동안 왕 외에는 아무에게도 기도하지 말라 이를 어기면 사자굴에 던져 넣겠다고 하는 왕의 조서가 반포된 것을 알고서도 예루살렘으로 난 창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자굴속에 던짐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막으시니 감히 사자가 다니엘을 해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죽게 될지라도 부활의 그 날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아날 것이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디모데후서 2장 11절로 12절에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어떠한 핍박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생명의 주님을 앙망하심으로 위대한 구원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여섯 번째로,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수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고난을 통하여 연단하십니다. 이는 마치 정금을 얻기 위해서 금광석을 맹렬한 불로 제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뜨거운 불 속에서 모든 불순물이 타버리고 분리되어 드디어 순수한 금이 나옵니다. 성도들이 신앙의 연단을 받을 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징계를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연단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더 큰 은혜를 받아 누리도록 그릇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의인이었습니다. 또 큰 부자였습니다. 그의 재산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또 가정적으로도 유복하여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루아침에 그 모든 재산을 상실하고, 열 자녀를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그의 온 몸에 피부암이 발하여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라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욥을 보고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습니다.

자, 여러분, 욥이 당한 일은 누가 보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무서운 재앙은 징계가 아니라 그를 정금같이 단련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욥은 신앙으로 연단을 끝까지 견뎌냄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환난과 역경의 바람이 불어올 때 욥을 생각하시고 신앙인의 자세를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다가오는가?” 탄식하며 한숨지을 것이 아니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한 욥과 같이 믿음의 인내로써 끝까지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지레 겁을 먹고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시련이 다가올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셔서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일곱 번째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라고 했습니다.

사노라면 성도들도 근심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일을 만납니다.  그러나 걱정, 근심이 성도들의 영혼까지 침범하지는 못합니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에는 성도들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걱정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조건들이 성도들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 받은 기쁨, 구원 받은 기쁨, 주님을 섬기는 기쁨, 기도의 기쁨 등등 성도들에게는 마르지 아니하는 기쁨의 샘이 있습니다.

더구나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고통스럽고 눈물나고 힘들지만, 머지않아 고난의 밤이 물러가고 소망의 아침이 다가옵니다. 그것이 합력성선(合力成善)입니다. 잠언 24장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시련과 고난 중에도 근심하지 마시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덟 번째로,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의 영적 부요를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할지라도 영적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귀한 보배가 어디에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이생과 내생의 모든 축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재물은 영구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좀과 동록이 슬고 도적이 훔쳐 갑니다. 결국은 다 없어지고 마는 것이 세상 재물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는 것은 영적으로도 해롭고 육신의 건강에도 해롭고,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도 해롭고, 자녀 교육에도 해로울 뿐입니다.

그러기에 아굴이라는 성도는 기도하기를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학개서 2장 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온 천지에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이 없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홉 번째로,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인 근거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상속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재벌을 아버지로 둔 사람이 상속 받는 재산도 천문학적일 터이나 성도들은 그 정도가 아니고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 감히 성도들을 보고 가난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3장 21절로 23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더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걸인이 성전 미문에 앉았다가 두 사도를 보고 구걸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그를 주목하고 말하기를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니,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한 성도님들께서는 추호도 “나는 가난하다”는 생각을 갖지 마시고 항상 부요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원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삶은 역설적인 진리에 근거해서 영위되기 때문입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도의 이 위대한 고백이 성도님들의 진심어린 신앙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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