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이 알아주는 인생 (시 144:1-4)

  • 잡초 잡초
  • 652
  • 0

첨부 1


제목 : 하나님이 알아주는 인생
본문 : 시144:1-4

자신을 잃은 사람들

세상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나와 내가 판단하고 인정하는 나 사이에 많은 거리가 있을 때 인간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고독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지만 내가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자신도 자기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며, 다른 사람은 나를 인정해주는 데도 본인은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며, 세상사람 사람들의 인정을 내가 잘 용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설사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내 자신도 나를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인정하시고 나를 용납하시고 알아주시고 생각해주신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현실도 예외는 아니지만 일본에서의 심각한 문제는 자살문제입니다. 또한 자살과 더불어 매우 염려하는 사회적 문제는 "히키꼬모리"라고 하는 사회적 병폐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회에서 철수시키는 일종의 사회 기피증입니다. 구체적인 증상으로는 광장 공포증, 편집증 혹은 망상증, 빛 혐오증, 심한 불안증 등이 있습니다. 이런 증상에 걸린 젊은이들은 10대, 20대 시절에 사회를 등지고 몇 달, 혹은 몇 년을 방에 틀어박혀 지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은 추하고 냄새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웃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문에 커튼을 치거나 검은 종이로 가려 놓습니다. 일본의 젊은이들 가운데 약 12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런 증상을 앓고 있는데 그 중의 70%가 남성이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弱者들의 문제는 항상 있어 왔습니다. 사회 속에는 항상 소외 계층이 있습니다. 성공자가 있으면 실패자가 있고 강자가 있으면 약자가 있고, 건강한 자가 있으면 병든 자가 있습니다. 지배자가 있으면 피지배자가 있고,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남보다 약하다고 의욕을 잃고, 남에게 뒤진다고 자신감을 잃고 삶을 포기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냐?

오늘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사람이 무엇이냐?"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시편 144편의 저자인 다윗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께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탄의 마음으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누구입니까?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세상에는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 많습니다. 인간 신체를 연구하는 의학, 생물학, 생명 공학이 있습니다.  인간 정신을 연구하는 철학, 심리학이 있습니다. 사회적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학, 윤리학이 있습니다. 법학, 정치학, 외교학, 언어학, 음악, 미술, 문학에 이르기까지, 따지고 보면 인간과 관련이 없는 학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유전 공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복제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물론, "주문형 인간"을 만드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렇게 눈부신 인간 연구가 있는데 왜 사람들은 갈수록 불행해 질까요? 왜 갈수록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아질까요? 왜 사랑하고 미워하는지? 왜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는지? 왜 전쟁을 하는지? 왜 살인하고 강도짓을 하는지? 왜 병드는지? 왜 학문을 연구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지?  갈수록 모를 일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간

인간이 무엇인지 다윗은 이미 3000년 전에 그 해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그렇게 열심히 인간 탐구를 계속하면서도 왜 아직도 인간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참다운 인간 이해는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인간 이해는 인간 理性으로 알아낼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啓示로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인간 理性은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개를 지배하지만 개는 인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만큼 개는 자기의 처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개든지 자신을 제대로 알려 한다면 인간의 지혜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격차는 개와 사람과의 격차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서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는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요즘 부쩍 "행복 추구권"이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행복은 추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며 돈이나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행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못 되어 있는데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떠나 진노 가운데 있습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1-2, 6-7)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인생

다윗은 여호와를 전쟁을 위해 자신의 손과 손가락을 가르치신 분으로 찬양합니다(1절).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반석, 인애, 요새, 산성, 구원자, 방패, 피난처”라고 말하며 자신의 보호자로 고백하고, 또한 열방을 자기에게 굴복시키는 분으로 찬양합니다(2절). 이런 여호와의 위대하심과 대조적으로 다윗은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때 하나님이 인생을 생각해 주시는 것은 너무 과분하니(3절), 이는 사람이란 헛것(허무한 바람) 같아 순식간에 지나가는 그림자 같기 때문입니다(4절). 이같이 인간의 미천함과 허무함을 고백한 후 다윗은 하나님께 바로 구원을 간구합니다. 여호와의 임재(5절), 번쩍이는 하늘과 폭발하는 화산과 같은 초자연적인 능력(6절), 그리고 평화의 조약을 어기고 쳐들어온 이방인들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합니다(7~8절). 치열한 전쟁을 앞두고 하는 그의 기도에서 날마다 드려야 할 우리의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시144:3)  다윗은 인생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하나님 품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물론 다윗에게도 인생의 어려운 시기가 많았습니다. 본문에 언급되었듯이 악한 자들, 불의한 자들이 피해를 입히고 끊임없이 공격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이 크게 도와주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알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알아주시며" 한 말씀은 히브리어로 "야다"란 말입니다.  그냥 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살며 교제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인간과 더불어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둘째로, 하나님이 생각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생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솨브"인데,  "엮다, 공작하다, 생각하다, 고려하다, 평가하다, 계산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연약한 인생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행복하게 살게 할는지 계산하시고, 생각하시고, 평가하시고, 공작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본문에는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가 둘이 나옵니다. 첫째는 "사람"이라고 번역된 "아담"이고 둘째는 "인생"이라고 번역된 "벤 에노쉬" 란 단어입니다. 아담이란 말은 흙으로 빚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에노쉬란 말은 병들기 쉽고 다치기 쉬운 연약한 인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에노쉬"란 말에 "벤", 즉 "아들" 혹은 "자손"이란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의역하면 "연약한 인간의 자손"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생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연약성을 잘 아시고 그에 맞게 생존 방법을 생각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무가치한 존재를 알아주시고, 생각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돌봐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발견하며, 자신의 삶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자각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마침내 천한 목동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되게 하심을 깨닫고 큰 찬송을 올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더욱 더 위대한 성공을 누리게 하는 비결이었습니다.


피노키아 이야기

여러분, 피노키오란 동화를 아시지요?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가 만든 나무 인형입니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정성껏 나무 인형을 만들어서 "피노키오"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네가 정말 내 아들이었으면..."  그 날 밤 천사가 내려와서 피노키오에게 말했습니다.  "피노키오, 움직이고 말 할 수 있게 해 줄게. 그리고 착한 일을 하면 진짜 사람이 되게 해 줄게." 다음날부터 피노키오는 말하고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피노키오와 할아버지는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피노키오를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는 길에 피노키오가 여우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연극을 보러 갔다가, 극장에 팔려가 새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밤에 천사가 나타나 물었습니다. "왜 여기에 와 있니?"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네, 학교에 가는데 파란 귀신이 나타나서..." 거짓말을 하는 순간 피노키오의 코가 점점 길게 늘어났습니다. 깜짝 놀란 피노키오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피노키오를 놓아줬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피노키오는 마차를 타고 가는 아이들에게 또 유혹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신나게 놀고먹는 마을에 가자는 겁니다. 마차를 타고 그 마을에 갔더니 그 곳은 놀고먹다 당나귀가 되면 시장에 내다 파는 곳이었습니다. 거기 머무는 동안 피노키오도 귀가 커지고 꼬리가 생기고 당나귀로 변해가게 되었습니다. 피노키오는 겨우 그곳에서 도망쳤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할아버지가 피노키오를 찾아 바다에 나갔다가 고래에게 잡혀 먹혔다는 겁니다. 피노키오는 바다로 가서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순간 고래가 피노키오를 삼켰습니다. 피노키오는 고래 뱃속에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피노키오와 할아버지는 고래 뱃속에다 불을 피웠습니다. 깜짝 놀란 고래가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둘은 고래 뱃속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천사가 피노키오를 진짜 사람으로 변하게 해 줬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 인생도 피노키오와 같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제멋대로 살려고 하면 감옥에 갇히고 동물적 삶을 살게 되고  죄를 짓게 됩니다. 다투고, 싸우고, 미워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살인, 간음, 사기, 폭력, 도박, 온갖 더러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본문 4절에서 인생의 허망함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144:4)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온 인생은 다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어떤 어려움이 오든지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로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144:12-15)  하나님 품안에는 자녀의 축복이 있고 물질적 번영이 있으며 생활의 안정과 사회적 안전이 보장 되고 영원한 하나님 자녀의 축복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심령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천국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갖거나 현실을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인간의 삶이 어디로 가는지, 세계는 어떤 상황이고 앞으로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것은 세계라는 현실, 또는 인간이라는 현실이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각기 다른 안경과 다른 눈으로, 다른 관점으로 인생과 세계를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인생관이라고 말합니다. 세계의 본질은 뭐고,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느냐 하는 것을 세계관,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관(觀)이 있습니다. 우리가 써야 할 안경이 하나 있는데 그 안경은 사람의 안경이 아니고 이 세계의 안경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안경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만드신 분, 세계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안경, 신앙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세계를, 역사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은 사랑을 행합니다. 그분의 목적지는 사랑의 나라이고 그분의 출발지는 사랑의 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의 안경을 쓰고 한번 파악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사랑의 작품입니다.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만들어 놓으시고, 마지막 인간까지 만들어 놓으신 다음에 피조세계를 다 보면서 하시는 한마디 말씀, 그것은 “참 좋다”였습니다. 피조세계가 너무도 좋다. 인간도 좋고, 세계도 좋고, 동물이 뛰어노는 것도 좋고, 공기 좋고 물 좋고, 모든 게 좋다. 이 좋은 것을 가리켜서 “평화”(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좋은 것이 가진 특징은 아름다운 것

그런데 좋은 것이 가진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 특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는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만든 인간은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그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노래는 우리가 오늘 찬양대를 통해서 들은 것처럼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에덴동산은 아름다운 동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인간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인간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나무와 공기와 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역시 아름다운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까?

밀턴이 [실낙원]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실낙원은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입니다. 에덴동산 밖은 추하고 더럽습니다. 쫓겨난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란 추하고 더러운 것이며 씻어야 할 대상입니다. 죄를 지어서 더럽고 추한 인간, 이 인간을 우리가 깨끗한 물로 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 아주 중요한 과실 중의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생명나무의 과실입니다. 생명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진실합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이 인간 역사의 시작이라고 하면 이 역사의 끝이 될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고, 정의와 평화와 기쁨, 그것도 성령 안에 있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쁨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슬픔이 없습니다. 처음 인간이 태어난 곳이 에덴동산이라는 아름다움의 나라, 그리고 마지막 도착할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기쁨의 나라! 결국 인간의 역사는 아름다움과 기쁨 사이에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드신 에덴동산의 역사, 마지막에 있을 성령을 통한 기쁨의 역사, 이 둘 사이에 성자 예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움으로 창조한 인간이 더럽고 추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실낙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된 성부 하나님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부활 다음의 기쁨의 하늘나라 역사입니다. 그 사이에 추악한 죄악을 씻겨줄 성자의 십자가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기쁨을 연결시켜 주는 역사입니다.

고대 희랍에 아리스토파네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름다움을 찬양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부부의 사랑을 연령별로 구분하여 10대, 20대, 30대로 나눕니다. 30대 이후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10대의 사랑은 시큼한 오렌지 맛으로 설익은 사랑이고 20대의 사랑은 달콤한 무화과 같고 30대는 이것저것 다 겪은 떨떠름한 올리브 맛이라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의 과일 맛에 따른 사랑의 비교입니다.

동양에 오면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우리가 아는 “부부요”라는 노래에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20대는 멋모르고 서로 좋아서 사랑하고 살고, 30대는 눈코 뜰 새 없게 서로 바쁜 가운데 사랑하며 살고, 40대는 싫증이 났는데 서로 버리지 못해서 같이 살고, 50대는 가엾어서 같이 살고, 60대는 여태껏 살아준 게 고마워서 같이 살고, 70대가 되면 달리 등을 긁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냥 산다고 합니다. 어떻게 살든지 간에 사랑이라 이름하는 것은 멋모르고 사는 것에서 등을 긁어주며 사는 데까지 연결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이 아름다움으로 연결되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에 하늘나라가 임하면 하나님도 기쁘고 인간도 기쁜 그런 사랑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사랑은 골고다 언덕에서 죽어가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가 죽음을 굉장히 두려워합니다만,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우리는 죽는다는 공포, 그게 두렵습니다. 아픈 것이 힘들다기보다는 아플 수 있다는 불안감, 죽는다는 공포, 이것이 우리를 못살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골고다의 역사가 왜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가 하면, 아름다움이 없어진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여성들이 화장할 때, 먼저 때를 빼야 하고 땀을 씻어내고 나서 화장하여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러워진 때, 곧 실낙원의 역사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입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서, 찢기신 몸에서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이 회복됩니다.

아파서 고생하시는 분들,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질병 속에서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하시고, 인간의 고민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오셔서 함께 고뇌하겠다고 하시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자기 어깨에 메겠다고 하시고 함께 죽겠다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왜 죽겠다고 하십니까? 장차 도래할,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만드는 새로운 세계의 기쁨을 공유하기 위해서 함께 죽겠다는 것입니다. 쓰레기통과 같은 추하고 아프고 힘든 역사 속에 기쁨이라 이름하는 장미꽃을 자기 피와 살로 피워서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의 나라의 선물입니다.

사랑은 오늘 아픕니다. 죄를 걸머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늘은 힘듭니다. 그 속에서 수난을 통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픈 사랑을 통하여 아름다움과 기쁨이 연결됩니다. 아름다움과 기쁨을 연결하는 아픔이라는 이 그릇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부의 아름다운 창조주 역사에서 출발하여, 성자의 고난 속에서 구원을 꽃피우는 십자가의 역사를 통하여, 성령이 만드신 기쁨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당신이 만드시는 사랑의 역사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 많은 사람이 죽어갑니다. 하나님이 그 전쟁의 아픔 가운데 계십니다. 죄악의 더러움을 씻어 내려 직접 오십니다. 그리고 죄짓는 사람의 아픈 마음속에도 오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천지창조 때부터 종말의 순간까지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 어디 있습니까? 사랑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오늘도 광대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알아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