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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 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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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히브리서 11:1-3

  최근 경찰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에 붙잡혀온 전체 범죄 피의자 194만 2987명 중 64.3%(124만 9727명)가 전과자로 집계되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한번 죄를 지은 사람이 또 죄를 지어서 잡혀왔다는 것이지요. 죄의 대가를 치르고자 감옥에 구속되었다가 출소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건만, 자유로워진 몸과는 다르게 그 마음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어떤 것보다도, 마음의 굴레와 마음의 구속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한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 영혼의 죄로 인한 굴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굴레가 있는 사람의 몸은 자유롭지만, 그 마음과 영혼은 여전히 묶여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금년 8월 15일은 우리가 36년 간 일제의 압제로 자유를 상실했다가, 해방된 지 5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을 축하하는 행사가 두 군데서 각기 갈등과 다툼의 양상을 띠고 치러지는 것을 보면서, ‘이 땅에 진정한 해방은 아직 안되었구나. 우리 민족사에 진정한 자유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 앞으로 풀어야 할 엄청난 숙제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는 남의 지배를 받아보았기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어떻게 하면 그 자유를 잃어버리는 지도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주어진 자유를 잘 가꾸고 다듬지 않아도 곧 방종으로 이어져, 동족이 서로 죽고 죽이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자유를 상실한 우리 모습은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주권이 없는 나라, 백성의 힘이라는 미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유 없이 사할린으로 끌려가 일평생 살아야만 했고, 현재도 조국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운게 현실입니다. 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남아로 끌려 다니며 자신의 몸을 어렵게 만들고, 이제 늙은 몸 하나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몸부림치는 할머니들의 울부짖음도 우리의 아픈 현실입니다. 남북의 헤어진 가족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은 기쁨 보다는 비참함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왜 함께 울지요? 아픔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겪는 아픔이란 것은 낭만적인 시에서나 등장하는 추상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자유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의식주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이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도바울도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참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께 “자유하십니까?”라고 질문하면, 몸은 자유하지만 마음은 묶여 있다고 대답하실 분들도 계실 겁니다. 건강에 묶여 있는 분도 계실 것이고, 죄책감 속에 묶여서 살아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자유를 주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믿고 섬기는데도 그 자유가 우리 속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죄를 전제로 합니다. 즉, 인간이 가진 모든 불행과 구속의 근원이 죄인데, 죄를 염두에 두고 자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의 어두움을 꿰뚫고, 시대의 굴레에 붙잡히지 아니하며, 개인의 크고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진정 자유롭게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진정한 자유인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5장 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와같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시대가 어떠하든지, 그의 삶 속에 그를 구속하던 굴레가 어떠하든지 매이지 않고 참 자유인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시대나 개인이 가진 한계 속에 묶여있지 않고 진정한 해방의 삶을 살았던 원리인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위해 가져야할 것은 바로 믿음이 아닐까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오늘날 내가 살아가는 삶의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실상이라고 번역된 ‘휘포스타시스’는 ‘밑에 놓다, 기초를 두다’라는 뜻입니다. 즉 집의 기초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자신이 서 있는 바닥, 삶의 기초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소망을 향해 나가는데, 그 소망의 이유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데올로기에 삶의 근거를 두기도 합니다. 공산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등.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자유보다는 구속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또 어떤 사람은 소망 가운데 미래를 향해 나가긴 나가는데, 욕망에 근거한 사람이 있어요. 욕망은 우리에게 더 큰 굴레를 씌웁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그 말씀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자신의 운명을 헤쳐 나갔던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인생길에는 희망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참 많습니다. 절망의 늪을 만나 혼자 허우적거리며 나오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좌절의 골짜기를 걸어야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좌절의 골짜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좌절과 절망의 골짜기에서 빠져나와 훌훌 털고, 바라보는 그 약속의 나라로 갈 수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서 오늘 내 삶을 살아가는 백성은 환경의 어려움 속에 휩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 떠나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뿐이었습니다. 자기의 갈 바도 방향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말씀 위에 인생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말씀 속에 약속되고 보장된 나라를 사모하며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는 정말 바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자녀가 없었습니다. 생리적으로도 불가능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그는 하나님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게 서서 오히려 불안과 의심의 요소만 가득한 현실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결국 약속의 사람으로 그가 바랐던 대로 자녀도 얻고 약속의 땅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성경학자인 매튜 헨리는 말했습니다. “믿음은 확고한 확신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모두 성취할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확신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바라는 것을 이미 소유된 것으로 여기며, 실제로 보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 속에 있는 신자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차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도마가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근거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미지의 영역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그 걸음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약속과 성취사이에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공간은 우리가 볼 때는 모험이요, 어쩌면 불안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약속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확실한 삶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에는 땅콩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책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읽어보신 분이 계실 줄로 압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를 말합니다. 이분은 노예가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몸이 많이 약했습니다. 지금이야 모두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당시에 노예들은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상으로는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았고, 서른이 다 되어서야 겨우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공부를 끝냈을 때 좋은 대학에서 교수로 오기를 초청받았지만 거절하고, 자신과 같이 고통당하고 먹고 살기도 어려운 흑인들을 위해 배운 지식을 사용하리라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교수직대신 남부로 내려가서 조그맣고 부서져가는 이동학교에 자신의 연구실을 마련하고 그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남부는 목화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나니까 남부의 농민들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바구미 벌레가 목화밭을 완전히 망쳐놓았습니다. 이래저래 남부 농민들은 절대빈곤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었을 때였습니다.

이 사람(땅콩박사)의 전기를 쓴 엘리엇은 ‘그는 남부를 해방시킨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절대빈곤 속에 있는 남부 농민들을 위해 그는 연구실에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품종개량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목화를 자꾸 심으면 땅이 척박해진다고 합니다. 알아본 결과 땅콩이 가장 적합한 작물임을 발견했습니다. 땅콩을 심으라고 권면하니까 사람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목화재배가 오랫동안 되어 왔기에 쉽게 바뀌지가 않았습니다. 흑인주제에 뭘 안다고 우리를 계몽하느냐며 무시했겠죠. 결국엔 사람들이 땅콩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카버 박사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땅콩 농사가 풍년이 되면서 땅콩을 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망의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카버 박사! 당신 말 듣다가 이렇게 됐소.”, “거봐, 그러니 내가 검둥이 얘긴 듣지 말라고 했지.” 등등, 정말 순수한 뜻으로 시작했던 카버 박사는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동터오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우주는 왜 만들었습니까?” 그러자 “너는 너무 수준 높은 질문을 한다. 네 수준에 맞는 질문을 해봐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또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람을 무엇에 쓰시려고 이 땅에 두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너는 여전히 네가 감당치 못할 큰 질문을 하고 있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엄숙해져서 진지하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왜 땅콩은 만들어서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래, 그것이 네 수준에 맞는 질문이다. 땅콩을 가지고 실험실로 들어가라.” 그 음성을 듣고 실험실로 들어갔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숨겨두신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미래를 열어갔습니다.

암흑이지요. 캄캄하지요. 그가 만약에 땅콩이 가득한데, 벌레가 가득한데, 하면서 현실만 바라보고 경험에만 의지해서 ‘안 되는구나’ 생각하고 주저앉았다면 그걸로 끝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가운데서 말씀하신 주님의 그 약속을 믿으며 어둠을 뚫고 그 가능성을 하나씩 찾아갔습니다. 그는 연구실에서 땅콩과 관련된 사실을 300 가지나 발견했습니다. 땅콩버터 아시죠? 땅콩버터도 이분의 작품입니다. 땅콩으로 잉크도 만들었습니다. 땅콩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를 발명하니까 남부에 있는 농민들이 부유해졌습니다. 그는 발명품에 대한 로열티도 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과 무료로 나누었습니다. 미국 남부 농민을 절대빈곤에서 그가 탈출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캄캄한 미래를 열어가는 사람,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열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물과 식물과 광물을 주셨고, 우리가 그것을 합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놓으셨다.” 라고 고백한 카버 박사는 농산물 응용화학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따라 미지의 세계로 한걸음 나갔기 때문에 손에 분명히 잡히는 하나님의 결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현실에 묶이지 않습니다. 현실을 꿰뚫고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고, 믿음 따라 산 삶의 결실을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욕망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서 있는 삶의 기초가 욕망이면 언제고 무너지고 부서집니다. 경험한 것, 알고 있는 것은 현실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은 경험을 가지고 현실의 잣대를 삼는 사람에게 그 미래를 맡겨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보이지는 않으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그들에게 항상 세계 역사와 미래를 열어주었습니다. 이제 습관의 틀에서 벗어나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나의 욕망의 틀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초로 다시 세워나가는 사람, 그 사람은 진정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케 되는 믿음 둘째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즉,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이면에 것을 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비전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 계산하고,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 과학적으로 검증이 끝난 것은 누구든 다 믿습니다.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곧 이루어지리라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라 말씀합니다.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자신이 애굽의 왕자쯤이면 또 모르겠습니다. 이미 쫓겨 나와서 광야에서 지낸지도 40여 년간. 바로의 군대는 강합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날 만한 의식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벽돌을 굽는데 전보다 고되게 시키니까, 자유고 뭐고 당장 편한 게 좋으니까 다 때려치우라고 이야기했던 노예들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가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는 가나안땅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가나안땅을 보았습니다. 보지 못하면 못 움직이지 않습니까?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움직입니까? 가나안땅의 비전을 확실히 보고 그는 담대하게 바로를 찾아갑니다. 오합지졸인 노예, 이스라엘 백성을 그는 이끌어내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를 찾아 나왔지만 그들은 광야를 보았습니다. 끊임없는 광야였습니다. 광야의 어려움만 보았습니다. 좌절만 보았습니다. 광야의 장애물만 보았습니다. 안되는 것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끊임없이 백성들을 설득해서 가나안 땅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보았던 비전을 향해서 백성들을 이끌고 갔던 것입니다. 비전은 우리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삶을 움직입니다. 삶에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셨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멸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이전에 홍수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창조과학자들에 의하면 홍수라는 개념이 그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20년 간 배를 만들라고 하셨을 때, 노아가 자기 눈으로 홍수로 온 인류가 멸망당하는 것을 미리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배를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이 확실하다는 보장이 없으면 누가 한번뿐인 자기 미래를 투자하겠습니까? 약속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실 것을 믿고 그 비전을 바라보며 준비했을 때, 결국 시간이 흘러서 세상은 홍수로 망했지만, 노아와 가족은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현재가 흘러가지요? 미래도 흘러갑니다. 가만히 두면 죄의 역사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비전을 따라 확신을 가지고 오늘 내 삶을 바꾸려고 한다면 새로운 삶의 형태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비전이 뜬구름 잡는 얘기 같습니다. 그래서 거짓말한다 하고, 엉뚱한 얘기한다고 하고, 배불러서 저런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전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을 움직여 오셨습니다. 여러분, 알래스카를 아시죠? 미국이 남북전쟁을 치르고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에 대통령이 된 사람이 앤드류 대통령인데 이분은 제대로 공부도 못한 분입니다. 그 때에 러시아가 알래스카 땅을 720만 불에 구입하라고 제의했습니다. 720만 불이면 80억 정도인데 그 정도면 큰 빌딩의 값어치 밖에는 안 됩니다. 미국에서 지금 우리도 전쟁을 치르고 경제가 엉망인데 무슨 저 쓸모없는 얼음 땅을 사느냐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때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이 땅은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우리의 후손들에게 필요한 땅이다. 이 땅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필요한 땅이 될 것이다.” 의회의 저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땅을 구입했습니다. 불과 얼마 되지 않아 그 땅은 미국을 부유하게 해주는 비전의 땅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지하자원과 전략의 요충지, 비전이 없는 사람은 못 보는 겁니다. 죽어라고 현실만 보며 앞만 보고 가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비전 앞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걸어갈 때, 삶의 변화가 있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잘 아실 줄로 압니다. 이상재 선생이 애국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패망한 민족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의 근심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감옥의 벽 속에 조그만 종이쪽지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꺼내서 보니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끝부분이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중략)...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얼마나 역설적인 이야기입니까? 이상재 선생의 가슴 속에 콱 치미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로 대항하려는 분노와 복수심 대신에 사랑으로 그들을 대할 때 펼쳐질 놀라운 하나님의 화평을 바라본 것입니다. 무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할 때 허락하실 참다운 하나님의 평강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을 나와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7월 20일 고종황제가 폐위되었습니다. 절망감에 젖어있던 이상재 선생에게 또 다른 절망감이 찾아왔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니고 감옥에 있느라 돌보지 못했던 아내 유씨가 숨을 거뒀습니다. 아내가 떠난 지 사흘 만에 맏아들 승윤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듬해에 둘째 아들 승인이 마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친구 같은 동반자이던 아내는 죽고, 미래의 희망이던 아들 둘도 한꺼번에 잃은 상황 속에서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리한 후 자결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이것을 알고 선교사 몇 분이 찾아왔습니다. 게일 선교사와 YMCA 운동을 하고 있던 질레트라는 선교사 그리고 브랑방 선교사가 왔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어떤 위로 받기도 거절했습니다. 그때에 어느 선교사님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설사 나라가 망하고 가족이 다 죽었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는 아직 조국의 미래인 저 젊은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 젊은이들은 선생님의 자식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희망이지 않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고통스럽고 아픈 과정을 허락하시면서 선생님을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절망했던 그의 가슴에 아들과도 같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가왔습니다. 패망한 조선, 무너져가는 한반도의 젊은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될 그 비전과 꿈을 보았습니다. 다시금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YMCA의 총무일을 맡았습니다. 열심히 뛰었습니다. 이 백성들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고 결단했습니다. 한 해 동안 일만 육천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1907년 일백만 구령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전하며 절망한 이들의 가슴에 생명의 불을 던졌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통해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1957년, 이상재 선생님의 무덤을 충남 한산에서 경기도 양주 땅으로 옮길 때, 변영로 시인은 묘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상재 선생에게서 특이할 만한 일은 삼일운동의 방법을 무장투쟁으로 주장한 것이다. 거사를 모의하는 자리에는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도 자리를 함께 했었는데, 대다수는 살육대항을 주장했으나, 오직 선생 한분만은 우리가 죽기를 결의해야만 대의를 세울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이렇게 해서 무저항, 비폭력 만세운동은 우리민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류역사상 영광된 사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다른 나라에도 저항궐기운동은 많지요. 그러나 무저항 비폭력으로 이루어진 저항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 비전이 더 많은 세계에 감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삼일운동이 오늘날 우리 건국이념과도 함께 연결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폭력과 싸움, 보복과 복수를 넘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화해 그리고 복수보다도 강한 사랑의 비전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비전을 가진 한 사람으로 인해 삼일운동이라는 아름다운 보석 같은 역사적 사건이 우리민족 전체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전은 절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일어나게 만듭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새로운 희망의 불을 당깁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것이 욕망이었습니까, 비전이었습니까? 내 욕심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꿈이었습니까? 다시 한번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역사는 늘 열려져 왔습니다.

언젠가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님과 대화하던 중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55년도 한경직 목사님께서 영락교회 당회에서 주차장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주차장 시설이 급하다’고. 1955년도에 차가 많았나요? 주차장이 필요했나요? 전쟁복구 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 어른은 미래를 보신 것입니다. 20년, 30년 앞을 내다보신 겁니다. 그리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백성들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콧방귀 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현실만 보지 않고, 소망을 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자는 지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희망은 무엇일까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꿈을 꾸게 하고, 생명력을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하지 않을까요? 요즘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이 너무 흥미위주, 프로그램 위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가르쳐야 합니다. 진정한 비전은 말씀 속에서만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흥미와 인간의 즐거움은 지나가 버립니다. 그때 잠깐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지만 군중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통해 생명이 가슴속에 심겨질 때만이, 어두운 미래를 뚫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포기하거나 양보해선 안 됩니다.

오늘 현실이 비관적일 수도 있습니다. 생활고나 육체의 질병 등이 비관적으로 현실을 보게 만들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다시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신문기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할 수만 있으면 이민을 떠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이 땅에는 희망이 없다는 겁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정치가를 보아도, 경제를 보아도 그렇고,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볼 때 긍휼도 없고 자비도 없습니다. 할 수 있으면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어쩌면 그 혼란이 한동안 계속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에 다시 초점을 맞추고, 정치가나 경제가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비전에 의지해서 우리 삶의 지경을 고치고, 묵은 땅을 경작하고, 병든 가슴을 도려내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주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함께 부둥켜안고 기도하며, 젊은이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새롭게 이 나라를 만들어간다면 우리 미래는 비관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어둠의 역사를 뚫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을 노래했던 남궁억 선생의 희망이 곧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요, 가족도 죽고 나라도 망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보았던 이상재 선생의 삶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비전을 이루어 가는 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삶 속에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회복하십시오. 이 비전과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생 라합, 그녀는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생의 삶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였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또한 85세 된 갈렙, 그가 비전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비록 나이 들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강대한 아낙자손이 지배하는 헤브론 땅을 점령하여 비옥한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노예였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팔려온 자였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새기고, 말씀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헤쳐 나갔고 자신을 노예 삼았던 그 나라의 총리대신으로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 삶의 환경을 바꿉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었던 일화를 나눔으로 메시지를 마감하려 합니다. 어떤 병사가 장군에게 이야기합니다. “장군님, 장군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 상황은 내가 만든다! 상황은 내가 만든다!” 여러분, 이 믿음에 나폴레옹 장군의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상황을 탓하지 마십시오. 상황은 우리 비전에 의해 극복됩니다. 이 비전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우리 힘이 아니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건강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비전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회복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기초를 말씀 위에 세우십시오. 그리고 경험만 의지하지 말고,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역사 앞에 다시 세우시고, 이것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의 소식은 갈등과 두려움을 주는 소식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믿음을 가진 자만이 현실 저 너머에 우리를 사용하시고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를 따라서 나를 이기고 환경을 바꾸어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해방의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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