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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긍휼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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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긍휼(마태복음 9:35~38)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인지,세상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와 마음과 관점은 어떠하신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의 첫째사역은 말씀을 가르치는것이고, 둘째사역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것이며, 세째 사역은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5장,6장,7장에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으로 천국백성이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의 삶의 윤리를 가르치셨으며,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는 한센씨병과 중풍병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습니다.바다와 파도를 잠잠케 하셨으며 귀신을 쫓아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어린소녀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게 하시며 벙어리가 말을 하는 엄청난 치유사역을 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목발을 버리라"고 하실뿐만 아니라 '진정 건강하게 되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나병환자에게는 예수님께 다가설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사람은 없다고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의 많은것들이 시들고 오그라졌기에 사치스럽게 살려는 소유욕, 이해타산에 젖은 사고방식, 내적 절망, 병든손이 저지르는 모든 악을 예수님께 맡기라고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3대 사역인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고 치료하시는 이 구원사역은 예수님의 삶의 목표였고 삶의 방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목표를 위하여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3대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집하셨으며, 제자들과 함께 동거하시면서 제자들을 모범으로,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전수해야 할 진리와 그 진리전수를 위해 터득해야 할 기술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제일 먼저 자기와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

마가는 이 제자삼는 사역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3:14-15) 예수님은 친밀한 연합이 있을 때 많은 열매를 맺을수 있음을 일찍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 나갈수 있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거 동락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수 있으며, 예수님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고 예수님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 납니다.

. 예수님은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목표지향적인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 지침과 방법을 숙고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천지사역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처음 3일은 틀을 만드셨고, 나중 3일은 그 틀에 들어 갈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들을 관리하고 다스릴 인간을 맨 마지막으로 창조하십니다. 아주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시기를 진정 원하신다면 목표를 바로 세우십시오. 목표가 없는 사람은 인생에서 그저 맴돌기만 하고 방황하기만 합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걷는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겠습니까? 시궁창에 있는지, 절벽위에 있는지, 진리안에 있는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953년도 미국의 예일대학교 졸업생중 구체적인 인생의 목표를 글로 써서 제출하라고 하였는데 졸업생중 3%만이 자기의 목표를 글로 써서 제출하였습니다. 20년이 지난후 1973년경에 이 학생들을 조사해보았는데 95%가 자신의목표를 성취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목표를 세운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안다는 의미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안다면 기꺼이 대가를,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표가 있는 삶은 미래를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게으름과 좌절을 극복하려고 애를 씁니다. 과거의 노예가 되지않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과거의 실패를 정복하려고 노력합니다. 목표에 걸맞은 원리와 방법으로 자기관리에 철저히 인내하고 수고합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이 설정되었다면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세상을 대하는 분명한 태도와 세상을 보는 분명한 관점과 세상을 향한 분명한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와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처럼 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대하시는 태도, 예수님이 세상을 보시는 관점, 예수님이 세상을 향하던 마음이 36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무지한 자들, 배고픈 자들, 눈 먼자들, 나병환자들, 과부들, 그리고 제각기의 고통을 안고 예수님께 나아온 모든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와 마음과 눈은 '긍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4복음서에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때에만 고유하게 쓰이는 아름다운 표현이 12번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긍휼로 마음이 움직여서'라는 신적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상황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실때는 '스플랑크나조마이'라는 헬라어 동사를 사용했는데 이 표현이 얼마나 심오하고 강력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스플랑크나'는 몸의 내장,심장을 가리킵니다.
긍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4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긍휼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예수님이 느끼신 긍휼은 피상적이거나 스쳐지나가듯이 느끼는 슬픔 또는 동정과는 매우 다릅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아이들끼리 싸우는 광경을 종종 보게됩니다. 대체로 맞는쪽의 아이를 보면 어딘가 허술해 보이고 나약해 보입니다. 머리,가슴,등을 마구 발길질 당하는 상황을 보면서" 누구집 아이인지 참 안됐다" 라고 하면서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스쳐 지나가듯이 느끼는 값싼 동정에 불과한 것이지 긍휼은 아닙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뇌리에는 "내 집에 있는 우리 아들은 저렇게 맞고 다니지는 않겠지"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입니다.

광화문 어느 보도위에 술취한채 비맞으며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노숙자를 보면서" 저러다 감기들겠다. 어쩌면 좋아, 사람이 망가지면 참 비참해지는구나""하면서 스쳐지나가듯이 느껴지는 슬픔도 매우 유치한 감정에 불과합니다.
긍휼은 뱃속이 꿈틀대면서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애가 끓어오르는 어찌나 깊고, 중심적이며,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표현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출산의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자궁이 움직인다는 것, 자궁이 뒤틀린단것의 고통을 잘 알 것입니다. 임신한 여인이 배를 움켜쥐고 울부짖으면 출산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것 처럼 ,이웃의 고통에 그렇게 반응할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므로 '긍휼히 여긴다'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쓰이는 신적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불쌍한 생각과, 고통을 제거하려는 의욕이 합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긍휼'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십자가에서 '은혜'와 만나면서 완벽한 쌍을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은혜는 죄 지은 사람들과 관련되고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관련됩니다. 은혜가 죄를 전체로써 내려다보는 반면, 긍휼은 특히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 보는 셈입니다. 긍휼없이는 은혜도 없습니다. 은혜속에는 반드시 긍휼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긍휼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아는 길은 우리들이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알수 있습니다.
에밀부르너로부터 '오늘의 기독교 최고의 설교자'라고 일컬어지고, 금세기 복음주의의 정상급인 조직신학자인 제임스아이패커로부터는 " 내가 아는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란 찬사를 받은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박사'는 "우리들은 각자의 위치와 기독교 신앙고백에 대하여 정직한지, 또는 진실된지를 가려내는 시금석이 있는데 바로 긍휼의 영을 품고 있는지 아니면 복수의 영을 품고 있는지에 의하여 가려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의 은혜를 입은자답게 생각하고, 행하여야 할 것 입니다.

마9;36에서 예수님은 좋은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여 고생하고 방황하는 백성들을 보실 때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중심인 창자가 움직이고 심장이 요동하는 측은함을 느끼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빈곤이 돈의 빈곤이 아니듯이 예수님 시대에도 지도력의 빈곤이 문제였습니다.
지도자가 없는 백성은 흔들리고 고생하고 방황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등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좋은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긍휼의 영을 가진 사람을 일꾼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마14:14에서도 예수님은 눈 먼자들, 중풍병자들, 귀머거리들이 사방에서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는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떠셨고, 마음으로 그들의 고통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며칠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천명의 군중들이 지치고 배고픈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막8: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9:27의 에수님을 부르며 따라갔던 소경 두명에 대해서도, 그리고 눅7:13의 외아들을 장사지내던 나인성과부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마음이 움직였으며 그들의 슬픔의 깊이를 같이 느끼셨습니다. 눅15:11~32의 돌아온 탕자를 멀리서 보고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실감에 젖은 자들과 함께 상실감을 느끼셨고, 배고픈자들과 함께 배고파하셨으며, 아픈자들과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 완벽한 감성으로써 모든 고통을 감지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시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긍휼의 특징은 하향성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좀더 높은 지위, 좀더 많은 권력을 얻고 좀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하여 아둥바둥하기 보다는 칼바르트의 말처럼 "높은곳에서 맨 밑 바닥으로, 정복에서 패배로, 부유함에서 가난함으로, 승리에서 고난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방향을 이동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이 제자라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향성을 향해 움직이면서 좀더 나은 삶, 좀더 많은 월급, 좀더 명예로운 지위를 얻으려고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향성을 지향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37절~3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주소서 하라"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일은 많은데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사람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많습니다. 일꾼이 없을 뿐입니다. 진정 일꾼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일꾼도 많습니다. 긍휼의 사람이 없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관점과 예수님의 태도로 세상을, 이웃을 대하는 긍휼의 사람이 없을 뿐입니다.
" 너희 아버지가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자답게 서로 불쌍히 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긍휼에 동참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에게 단순한 동정심이나 정서적 유대감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존재방식인 새로운 차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수세기 동안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삶속에서 볼수 있었던 삶의 방식인 '긍휼'에로의 초대는 진정 참된 일꾼을 찾는 새로운 차원의 부르심입니다. 왜냐하면 '긍휼'의삶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자연스러운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받게된 제2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긍휼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셨고 그 긍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우리는 구속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긍휼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가정을 통해서, 직장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긍휼이 우리를 통하여 증거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십자가에서 긍휼을 나타내시고 그 풍성하신 긍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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