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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백성의 행복찾기 (마 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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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백성의 행복찾기(마20:8-16) 
 
일본의 소노 아야코라는 여류 작가가 쓴 책 중에 <행복이라는 이름의 불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이름의 불행', 얼마나 역설적인 제목입니까? 이 책은 그녀의 자전적 고민과 갈등을 거쳐 태어난 자기고백적인 책입니다. 재색을 겸비한 소설의 여주인공 레이코는 혼기를 앞두고 여자의 진정한 행복에 대해 고민합니다. 모든 여인들이 부러워하는 외적 조건에 만족하며 그렇게 일생을 흘러보낼 것인가... 그런 고민 끝에 그녀는 가짜 행복을 박차고 나섭니다. 애인이 외교관 시험을 그만두었을 때도, 군고구마 장사를 한다고 나섰을 때도, 극장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할 때도 그녀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어떻게 하면 그 상황에서 더욱 잘할 수 있을까 라며 적극적으로 그를 도우려 합니다. 이렇게 소설 속의 주인공 레이코는 상대방을 명예나 부를 척도삼아 보지 않고 인간됨을 보기에 그가 무엇을 하든 자신감을 잃지 않고 꾸준히 하는 모습을 격려하며 후원합니다.

소노 아야코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많은 여인들이 '행복이라는 이름의 불행'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가짜 행복을 진짜 행복인양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 레이코를 통해 오히려 거꾸로 '불행이라는 이름의 행복'을 선택함으로서 진정한 행복의 본질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행복, 이 말만큼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단어도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 목적 또한 행복해 지기 위해서입니다. 성서는 행복에 관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 구약의 성문서는 온통 행복에의 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편을 노래하는 시인도, 잠언을 읊어가는 지혜자도, 전도서를 노래한 전도자도, 욥기를 사색한 현자도 모두 행복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또한 참행복의 선포자이셨습니다. '참 복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다니며 한 평생을 살아갑니다. 누구도 자신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며 충만한 내적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파서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몽땅 행복을 위해 쏟아 바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한 삶을 호소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분명 21세기 뉴밀레니엄의 시대는 우리의 기대만큼 행복하지 못한 시대입니다. 물질문명을 비롯해서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도 편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행복하다는 인식보다 그렇지 못하다는 인식이 더욱 팽배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말 뜻밖의 현실을 만나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렇게 산다면 인생이 과연 살만한 것이겠는가' 하는 회의에 빠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다 결국 스스로 생을 접기도 합니다. 인생을 고해와 같다는 말처럼 불행의 장이라고 여기고서 말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왔던 날짜가 아니고 행복했던 순간 순간입니다. 80 평생을 살았다 해도 살아온 3000여일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 행복했던 순간만 생각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평생동안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180초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3분 행복입니다. 그 수많은 시간들을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 고작 3분이라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이겠습니까? 하늘백성인 우리도 3분 행복을 살다 가는 것입니까? 우리는 어디서 또 어떻게 하늘 백성으로서의 행복 찾기를 해야 하겠습니까?

행복은 객관적이기 보다 주관적입니다. 영국의 로버트 우수퍼 박사가 세계 56개국을 상대로 행복 지수를 조사했는데 그 결과는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1위는 방글라데시, 2위는 아제르바이젠, 3위는 나이지리아, 4위는 필리핀, 5위는 인도였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 미국은 겨우 46위를 차지했습니다. 부와 경제가 행복의 절대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행복은 이렇게 주관적인 겁니다. 남들이 말하는 행복이 아닌 자기 자신이 느끼는 행복이 중요한 겁니다. 다른 사람에겐 행복이 내겐 행복이 아닐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행복이 아닌 것이 내겐 행복일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이렇게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것이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바뀔 때 삶의 잔잔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우리가 소노 아야코의 우려처럼 '행복이라는 이름의 불행'을 좇아 한평생을 살아간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참행복을 누리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러면 행복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그 행복을 위한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객관적인 행복의 잣대란 무게를 재는 저울추처럼 오르내리지만 내가 행복이라고 규정하는 잣대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을 재는 잣대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님이 들려주신 '포도원에 부름받은 품꾼의 비유'는 행복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예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적어도 다섯 부류의 일꾼들이 등장하지만 크게 나누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시부터 와서 일한 일꾼들과 나중에 와서 일한 일꾼들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인간시장에 나가 하룻 동안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 몇사람을 고용합니다. 보통 해가 뜨는 아침 여섯시부터 해가 지는 저녁 여섯시까지가 하루의 노동시간인데 그 계약을 몇 사람과 맺어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포도원 주인은 몇 차례 더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제 삼시 그러니까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5시에 각각 일감을 잡지못해 장터에서 놀고있는 사람들을 불러 자기 포도원의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해떨어진 오후 6시경에 그 품꾼들에게 품삯을 계산해 주는데 여기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납니다. 아침 여섯시부터 일한 일꾼들이 주인을 향해 임금투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이렇게 따집니다. "우리보다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이 사람들도 5만원을 주면서 어찌 하루 온종일 땡볕에서 더위와 싸우며 수고한 우리도 5만원이냐..." 정말 듣고보니 불공평한 주인의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의 일당이 5만원이라면 12시간 일한 저들의 일당은 산술적으로는 60만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1시간 일한 사람이나 12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5만원을 주었다는 겁니다.

저들의 주인을 향한 원망에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공평치가 못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또 그들을 향해 이렇게 책망합니다. "이보시게 친구들, 내가 자네들에게 잘못한 게 무언가? 생각해보게. 자네들과 나는 일당 5만원을 약속하고 우리 포도원에 일하러 오질 않았는가? 그렇게 계약을 맺질 않았는가? 내가 그 약속을 지켜 이렇게 5만원의 일당을 자네들에게 건넸거늘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내가 약속을 어겼는가? 준다고 한 임금을 안주었는가? 아니지 않은가? 약속대로 내가 자네들의 품삯을 지불했거늘 자네들 것이나 가지고 가게나. 나중 온 이 사람들에게 자네와 같이 주는 것은 내 마음일세. 아, 내 것 갖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자네들이 왜 그러나? 내가 이 사람들에게 선을 베푼다고 그것을 자네들이 악하다 할 것인가? 그게 말이 되는가?..."
자, 이제 우리는 주인을 원망하는 일꾼들의 말과 일꾼들을 책망하는 주인의 말을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에게 문제가 있고 그 문제가 어디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모두가 즐거워야할 저녁시간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입니까?

만약 다른 일꾼들 없이 하루 5만원 일당을 계약하고 온 일꾼과 주인만 놓고 봅시다. 주인이 하루 종일 수고한 일꾼들에게 1인당 5만원의 일당을 지급했습니다. 하루 종일 퇴약볕에서 수고는 했지만 일꾼들은 참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노동의 기쁨도 알고, 자신이 하루 종일 수고해서 포도원이 보기좋게 가꾸어진 것에 대한 보람도 있고, 또 이 받은 일당으로 가족들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가장으로서의 뿌듯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사장님, 고맙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저희를 불러주셔서 일의 보람과 즐거움도 맛보게 하시고 또 이렇게 수입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음 번에 또 일꾼이 필요하시다면 저희를 불러주십시오. 정말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러고 갔겠지요. 이게 행복이겠지요. 그래서 가는 길에 시장에 둘러 아이들 고무신도 하나 사고, 자반도 한손 사고, 수박도 한 덩어리 사서 집을 향하는 그의 마음,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럼 가족들이 그를 반기며 '여보, 수고하셨어요... 아빠, 힘드셨지요...' 그렇게 가족의 격려를 받으며 그로 인해 더없는 행복감을 맛보는 하루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런 행복이 다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는데 행복은 온데 간데 없고 불행만 그득한 저녁나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이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이 일꾼의 모습이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복해 하며 살 수 있는 조건을 99가지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가 행복해하지 못하고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며 삽니다. 한 가지 때문에... 그 한 가지가 무엇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포도원 일군들이 아직 어두운 새벽녘에 집을 나설 때 어떤 생각을 하며 나섰을까요? '하나님, 제발 오늘 제게 일감을 주옵소서. 그 어떤 일이라도 주어지게 하사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게 하시고 저녁 나절 집에 들어갈 때에는 쌀이나 반찬거리 그리고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해감으로 기쁨의 발걸음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하루를 설계하는 거기에 소시민적인 행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 인력시장에 가득 모인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자신이 뽑혔을 때 그는 환호성을 질렀을 겁니다. 하루 일당 5만원을 확실히 보장받는 포도원 일감을 누구보다 먼저 확보했을 때 그는 동료들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뜨거운 햇살에 몸은 곤비했어도 이 일을 통해 가장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콧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그런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은 다 사라져 버리고 기분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의 기분이 이렇게 망가진 것일까요? 한껏 행복에 도취되어야할 저녁시간에 그의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튀어나오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주인의 문제일까요? 다른 일꾼들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그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그 스스로가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데이비드 레온하트가 쓴 '행복을 찾아주는 9가지 생각'이라는 책에 보면 그 첫 번째 권면이 바로 "내 존재에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반응하는 자신이 행복으로 가는 열쇠를 쥐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더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아홉 가지 습관을 제시하는데 그중 제일 첫 번째 권면이 바로 "내 존재에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의 불행은 바로 여기, 자기 존재에 대해 행복하질 못했다는 데서 시작된 겁니다. 다시 한번 12절의 주인을 향한 그의 원망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말인 줄 우리는 금새 알 수가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 존재에 대해 행복하질 못했습니다. 왜 자신들을 저들과 견줍니까? 자신들은 하루 5만원의 일당을 약속하고 와서 계약대로 일하고 그에 상응하는 5만원을 품삯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으로 된 것이고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자기 존재에 행복하지 않고 거기로부터 이탈하고 맙니다. 왜 저들을 우리와 똑같이 주느냐는 겁니다. 기분 나쁘다는 거예요.

정말 이 길밖에 없었을까요? 만약 이런 생각을 저들이 했다면 저들의 저녁시간은 어땠을까요? "야, 이 사장님 정말 멋진 사람이다. 계약을 따라 일한 우리야 당연히 하루 일당을 받았지만 9시간 일한 사람, 6시간 일한 사람, 3시간 일한 사람, 아니 심지어 1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하루 일당을 다 주다니... 정말 자애심이 넘치는 선한 사람이다..." 그리고 다른 일꾼들을 향해서도 "당신들 정말 행운아요. 이런 좋은 사장님 만난 걸 축하합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저녁시간 가지십시오..." 그렇게 반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그게 올바른 처신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문제는 저들이 자기 존재에 대해 행복해 하질 않았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뽑힌 저들입니다. 이건 여러 면에서 저들이 좋은 조건을 가진 자였다는 증거입니다. 남보다 몸도 더 건강했을 것이고, 힘도 더 세었을 것이고, 인상이나 외모도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남들보다 앞서 불리움을 받은 겁니다. 여러 면에서 나았기에...

그에 반해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모든 조건이 안좋았겠지요. 아마 저들은 이른 아침 집을 나설 때부터 걱정에 사로잡혔을런지도 모릅니다. "나같은 약골을 누가 써줄까? 오늘 하루 과연 내게 돌아올 일감이 있을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일자리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일꾼을 찾는 수많은 사장님들이 다녀갔지만 자기를 향해 손짓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을 흘러서 벌써 점심 때가 되었습니다. 배는 고프고,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하는데 중천에 있던 해가 서편으로 기울어 갑니다. 안타까운 순간들입니다. 마음 졸이는 순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저들이 늦게나마 일감을 가질 수 있었고 또 의외로 하루 일당을 녹녹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리어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그들을 투기하면서 "왜 우리를 저들과 같이 대우하느냐"고 항의합니다.
바로 이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이 곧 저들이 자기 존재에 행복해 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뒤집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저들을 우리와 같이 대우하는구나..." 만약 이렇게 생각했다면 상황은 달리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합니다. "왜 우리를 저들과 같이 대우하느냐..." 이건 저들이 자기 존재에 대해 행복해 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자존감,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저들이 자기 존재에 행복해 하는 자존감을 지닌 사람들이었다면 그 일군을 향해 축하해주고 또 그에게 그런 자비를 베푸는 주인의 처사에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질 못합니다. 그럼으로서 행복할 수 있는 하루를 망치고 맙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러시아의 시인 투르게네프는 "나 자신을 더 이상 찾지 않는 순간부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행복을 발견하기가 더 어렵더라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그런 겁니다. 손을 내밀고 조용히 기다리면 새가 다가와 앉을 지 모르나 움켜잡으려 하면 새는 도망치고 맙니다. 사람이 오라고 부른다고 해서 새가 선뜻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행복을 붙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행복이란 목표로 정해 놓고 노력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놀라움으로, 어떤 것에 덤으로 따라오는 선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의 나날들에서 내 삶을 멋진 축제가 되도록 미리 즐기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 자체가 가장 순수한 행복이며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언제나 기뻐하고 쉼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행복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요 마음 먹기 달린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치우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을 맛보는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옛날에 현명한 왕이 궁전 안의 잘 닦여진 길 위에 돌을 갖다 놓았습니다. 과연 누가 그 돌을 치우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하와 궁녀들은 돌을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돌을 갖다놓은 자를 비난할 뿐 아무도 그것을 치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 소녀가 물 두 통을 들고 지나다가 그 돌을 보더니 물통을 옆에 두고 힘겹게 돌을 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통을 들려는데 돌이 놓여있던 자리에 뭔가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작은 지갑이었고 그 안엔 20개의 금화와 왕이 쓴 편지가 있었습니다. "돌을 움직인 너는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이다..."

행복한 일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행복한 하루, 행복한 순간을 맛보며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행복과 불행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할 때 행복의 파랑새는 바로 내 곁을 찾아올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영락의 권속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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