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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의 회복(4) /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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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회복(4)
출 15:22-27,

사람은 배가 고플 때는 밥을 먹어야하며, 목이 마를 때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더욱이
무더운 여름철에는 특히 목이 마르기 때문에 자주 물을 마셔야 탈수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 가나안을 향해 3일 길을 걸어갔지만 그들은 물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곳은 '수르' 광야로 좀처럼 물이 없는 곳입니다. 이런 곳을 유아를 제외한 60만 대군이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여간 큰 고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른들이야 그런 대로 참으며 걸을 수 있다 손치더라도 갓난아이를 업은 엄마라든지 3-4세살 된 어린아이들이 광야 3일 길을 물 없이 걷는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던 차에 한 곳에서 물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이들은 정신 없이 물가로 달려가서 물을 마시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물이 얼마나 짜고 쓴지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곳 물을 '마라'라 명명하였습니다. '마라'라는 말은 쓰다. 괴롭다. 쓰리다. 애달프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발견한 물인데 그만 그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게되었으니 이때에 이들이 느꼈던 안타까움과 억울함과 실망감은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이 같은 실망감은 드디어 분노와 원망이 되어 모세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24절에 있는 대로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물을 우리가 어떻게 마실 수가 있겠는가? 당신이라면 마실 수 있겠는가?"하며 따지는 것입니다.

3일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홍해의 기적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15장에 있는 것처럼 "홍해의 노래"를 부르며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양하였건만 목마름이라는 고통 앞에 이들은 모세에게 "왜 우리를 애굽에서 몰고 나와 이 고생을 시키느냐?"고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 모세는 이러한 백성들의 원망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며 저 나뭇가지를 취하여 물에 던지라 그리하면 그 쓰고 짠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명령을 쫓아 모세가 나무를 주워 '마라의 연못'에 던지니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온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물을 마시고 목마름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라의 쓴 물이 보잘 것 없는 나뭇가지 하나로 말미암아 단물'로 변화되어진 기적을 바라보면서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도 참지 못하여 일어나는 각종 내면의 쓴 물 들 다시 말해 미움, 원망, 다툼, 시기, 분쟁, 혈기, 위선, 두려움, 우울증, 게으름 이런 악한 것들이 다 선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바뀌어져서 보잘 것 없는 나이지만 내가 가는 모든 곳에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과 사랑과 생명을 던져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쓴 물과 같이 막혀있고, 풀리지 않는 사업들이 시원하게 열리고 해결되어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말씀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Ⅰ. 마라의 쓴 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

1. 승리 다음에 나타나는 자만심을 경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지 아니하시고 왜 "마라의 쓴 물"을 허락하셨을까 ? 이 말은 늘찬양교회가 성장가도에 있을 때 더 많은 부흥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IMF의 고통을 허락하사 왜 주춤하게 하셨을까? 라는 물음과 동일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승리다음에 나타나는 자만심을 경계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행한 여러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이 지팡이를 들어 홍해 바다위로 손을 내어 밀 때에 홍해 바다가 양편으로 갈라져 바다 한 가운데가 육지같이 길이 난 것이며, 이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하게 건너갔지만 뒤를 쫓아오던 애굽군대와 병거들과 마병들은 모세가 다시 손을 내밀어 예전처럼 물이 흐르게 함으로 모두다 물귀신이 되어 수장되는 모습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출애굽 시키시고 또 홍해를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물을 드리며 소리 높여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승리감을 누리며 번영의 축복 속에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때 이때가 가장 조심할 때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삶에 커다란 문제가 없이 모든 문제가 순탄해 보일 그때가 더욱 깨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께 감사함과 겸손함과 진실함으로 살아가야 할 때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겸손과 감사함 속에 살기보다는 자신이 대단해서 똑똑해서 승리한 줄로 착각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잊은 채 자신의 쾌락과 부귀영화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풍요 후에 다가올 실패, 불행과 어두움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마라의 쓴 물과 같은 고통을 허락하시므로 교만하여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구하며 날마다 은혜 안에 살아가실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2. 마라는 광야 신학교의 첫 시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지 아니하시고 왜 "마라의 쓴 물"을 허락하셨을까 ?

그 두 번째 이유는 마라는 광야 신학교의 첫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의 땅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일련의 과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과 똑같은 것으로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한편 살펴보십시다.
첫째: 출애굽사건, 둘째: 광야여행사건, 셋째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투, 넷째: 가나안 정착의 사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도 첫째: 구속(구원)의 체험사건, 둘째: 신앙인의 훈련, 셋째: 영적인 전투, 넷째: 승리의 기업으로 나뉩니다.

이런 것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광야의 시련을 건너야만 축복의 땅 승리의 기업이 있는 하늘나라에 당당히 들어감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의 역사를 맞이하기까지 특별히 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모세와 아론의 수고가 있었을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늘찬양교회가 이곳에 새 성전을 건축하기까지 여러분의 특별한 고통과 아픔 그리고 헌신적인 참여가 없었습니다. (단돈 1백만 원의 헌신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계속적인 부흥만 있었다면 아마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되었으며 나는 어떤 목사가 되었을까? 먼저 나는 곳곳에 유명세를 날리며 부흥강사로 바쁘게 뛰고 있었을 것이고, 여러분들은 아름다운 색동저고리를 입고 많은 사람들을 교회입구에서 맞이하며 행복감에 젖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 건강한 성도로서 거듭나는 영적 체험의 고통은 그만큼 얻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프로그램 중심적으로 또는 총동원주일 몇 명 돌파운동으로 성도수가 날마다 늘어서 기쁘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데 왜 그렇게 내적 성숙은 일어나지 않는지 어느 한 사람 나서서 선교사를 지원하고 또 놀라운 물질을 드려 신앙의 고백을 하고 날마다 성전에 나와 뜨겁게 기도하며 전도의 본을 보이는 사람이 없는 자신의 가정을 오픈 하여 삶으로 본을 보이는 그런 성도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풍요 속의 영적 빈곤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 꼭 그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느냐? 고 불평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해 자기성찰의 기회를 얻게됩니다. 그리고 요점을 재정리하여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시험관은 문제를 출제할 때 잊어서는 안될 것과 가장 중요한 요점들을 골라서 출제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여러분의 어려움과 사정을 돌아보시자 구원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위하여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 단적인 예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 가서 이삭을 받치라는 시험입니다. 그 외에도 출애굽기 15장에서는 마라의 쓴 물을 통하여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며, 16장에서는 굶주림의 시험을 통하여 만나를 내려주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17장 1절부터 7절에서는 목마름의 고통을 통하여 반석에서 샘물이 솟케 하시므로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17장 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아말렉 군대와의 싸움이 나오는데 모세의 기도의 손을 통하여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치료하시는 하나님, 공급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에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 사탄과의 싸움에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시며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고로 너무 광야의 신학교에 입학했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이 시련 뒤에는 여러분을 위한 승리와 축복의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참고 인내합시다. 별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인생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3. 마라는 정착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지 아니하시고 왜 "마라의 쓴 물"을 허락하셨을까 ?

그 세 번째 이유는 마라는 정착지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홍해를 건너 사흘 길을 걸어온 이곳이 가나안 복지 땅과 같이 기름이 흐르는 땅이었다면 이들은 더 이상 행군을 하지 아니하고 이곳에서 영원토록 안주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나 이곳에서 마실 수 있는 물조차 없다보니 더 이상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마 이곳에서 우물을 파고 살아보자고 모세가 권유했어도 이들은 떠나자고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님들이여! 지금 여러분의 생활이 무척 힘이 들고 어려워도 그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족함이 없기 때문에 더 큰 행복과 기쁨을 얻기 위해 노력하게되고 연구하게되고 일을 하게 되며 또한 이 세상에 참 만족이 없고 정착지가 없음을 깨달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처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오묘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느냐? 하며 또 자기와 남을 비교함 속에 열등감을 가지고 자신을 욕하고 증오하며 부정함 속에 절망과 타락의 나래 죽음의 나래로 빠져드는 것을 봅니다.

지금 이 땅에 자살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가 외부적인 만족으로 채워짐으로 행복감을 누리려던 사람들이 그런 외적인 요소가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압박해오자 불안감과 두려움 절망감으로 생명을 끊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어렵고 좋지 않다고 곧 실망함 속에 하나님과 자신을 원망하며 불평과 낙심가운데 살지 말고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 하나님을 믿음으로 찬양하며 살아가시기를 원합니다.


Ⅱ. 마라의 쓴 물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
이번에는 마라의 쓴 물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원망보다 고통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자

먼저 우리는 자그마한 불만족과 불편함 어려움 속에서 쉬 좌절하고 원망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원망보다는 고통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라의 쓴 물 뒤에 숨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하고, 굶주림의 시험 뒤에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아야 하고, 목마름의 고통 속에 진정한 해갈과 참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하며 아말렉과의 전투를 통해 광야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적 전투가 있음을 기억하고 이 모든 싸움에서 믿는 자가 항상 승리하도록 도우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장미꽃 화원이 아닙니다. 험한 파도와 시련을 이겨낸 꽃이 더욱 향기가 진한 것처럼 많은 시련과 환란을 이겨낸 사람일수록 더욱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 요한복음 8장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깨닫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진리가 말하는 참 자유를 얻기 위해 많은 책도 읽어보았고, 또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면 자유 할까 싶어 물질을 얻기 위해서도 열심히 뛰어도 보았고, 또 능력을 받기 위해 열심히 산상기도도 해보았고, 또 교수님에게 특별강좌를 듣기도 하였지만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과 아픔으로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힘이나 의지를 잃어 버린 채 절망감에 빠져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의 아픔 고통 번민 슬픔 외로움을 주님께 맡기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누구든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나아와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저는 실패한 그대로 상처 난 그대로 아픈 마음 그대로를 하나님께 들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 순간 내 안에서는 참된 평화와 기쁨과 자유 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찾고 찾던 자유 함을 실패와 좌절과 절망 속에서 찾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저는 지금의 내 아내를 만날 수 있었고 내 아내에게 던진 질문의 하나도 "당신은 자유 함을 발견하였느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제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너희가 땅에 것 많을 위해 살지 말고 하늘의 것 영원한 것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나누어주는 은혜의 삶, 영적 충만한 삶을 살아라. 땅에 것을 소망하고 쫓다가는 미라의 쓴 물처럼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너희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2. 기도로 문제해결을 구하자.

'마라'라는 광야의 시련 장에서 보여진 두 가지 분명한 모습이 있습니다. 먼저는 "이렇게 쓴 물을 어떻게 먹느냐?" "우리를 왜 이곳까지 끌고 와서 고생을 시키느냐?" 며 원망하는 백성들의 모습과 두 번째는 마라의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로 아픔을 토로하며 문제해결을 구하는 지도자 모세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그마한 시험이 닥쳐와도 금새 좌절하고 절망함 속에 자신과 남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시험이 다가올 때 그 시험의 내용을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마라의 쓴 물과 같은 문제가 있을 때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히스기야의 100일 기도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그 병으로 인하여 죽고 살지 못하리라."(1절下)는 사명선고를 받고서는 당황함과 안타까움에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주 앞에 행하며 주의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20:2-3)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생명을 15년 동안이나 연장시켜 주셨듯이 ..... 우리 모두는 「 ① 늘찬양교회의 목사님이 물질로 인해 저희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② 늘찬양교회가 이 귀한 장소에서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전인적인 목회사역을 할 수 있도록 15년을 연장시켜 주옵소서 ③ 엘리야에게 보여준 7명의 기도용사 7000명의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성도를 붙여주옵소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숫자가 새벽과 저녁에 기도함으로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조금만 더 참고 더 인내하자.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가장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라'를 지나 '엘림'이라는 곳에 도착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반갑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녜 그렇습니다. 「물 샘 열 둘과 종려나무 칠십 주」가 마라의 시험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열 둘과 칠십이 가르치는 숫자에도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하나님께서 12지파를 택하게 하셨고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12제자를 택하여 일꾼으로 세우셨으며, 또한 70인 전도대를 택하여 복음을 증거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열 둘과 칠십」은 넉넉함, 풍성함, 온전한 것, 대표적인 것을 나타내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지금은 마라의 쓴 물과 같은 장소에서 사업이 뜻한 대로 잘 안 풀리고, 막히어 여러 가지 짜증스러움과 답답함으로 보내지만 그런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잘 참고 나가면 너희에게 머지 않아 참 만족과 참 기쁨과 참 은혜를 가져다 줄 엘림의 축복의 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님들이여!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지금 우리 곁에 새벽의 여명이 별빛같이 빛나는 기쁨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Ⅲ. 결 론

오늘 마라의 쓴 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영적 교훈은 조금만 참으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엘림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처럼 원망만 하지말고 모세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면 순간순간 나뭇가지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나무이지만 보잘 것 없는 믿음이지만 감사함과 순종함으로 드리면서 합심하여 나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쓴 물이 단물이 되어지고 이내 엘림의 축복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 여러분!
여기서 중단하지 마십시다. 늘찬양교회를 절대로 포기하지 맙시다.
반대로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을 모아 담대하게 전진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 늘찬양교회를 부흥시켜 주시고 저와 여러분을 삶을 축복의 땅 엘림처럼 귀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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