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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공시대를 여는 자세 (고후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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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시대를 여는 자세] (고린도후서4:1-10)
          ============================================

[1] 서 론

  오늘의 성공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우리가 품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낙심(1절), 죄라는 영적 쓰레기(2절) 그리고 혼미케하는 지식이나 영들(2-4절)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질그릇같은 우리 속에 품어야 합니다(7절).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 속에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우리 안에 보배같은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재활의학의 아버지 하워드 러스크 박사는 재활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를 내려 줍니다. "재활이란 장애로 인해 잃어버린 능력을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능력이 무엇인가를 찾아 개발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재활의학의 본질입니다. 남아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삶의 영적 원리도 이것과 똑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영으로서 얼마든지 창의적이고 생동적으로 일어서서 성공시대를 열수 있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만을 생각하면 누구든지 쉽게 낙심하고 의기소침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없는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들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고 계심을 자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문제를 보는 시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내가 무지개를 보기 원한다면 먼저 비가 오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낙천적인 생각으로 문제를 해석하는 시각과 관점의 발상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방해물로 보기보다는 기회로 보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문제(problems)보다는 가능성(potentials)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의 사이즈만큼만 봅니다." 왜냐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크기가 그 사람의 크기를 결정지어줍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이즈를 키워야 합니다.
  믿음의 사이즈를 키우는 방법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영력을 키우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앞에 즉시 순종하는 아멘신앙을  가지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그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체험신앙은 더욱 미래에 대하여 하나님이 동일하게 역사 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어 믿음의 사이즈가 커지게 만듭니다. 

  그런 큰 믿음의 표상적인 인물이 곧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비전의 사람답게 문제도 잘 풀어갔던 인물입니다. 그야말로 태산같은 문제들을 평지처럼 헤쳐나가는 역동적 기상을 보여줍니다.  인생은 믿음의 생각과 해석대로 됩니다.

[2] 성공시대를 여는 문제해결의 자세

1.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들라

문제가 안 좋아질수록,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부정적으로 볼수록 낙심하고 의기소침하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신 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해결의 출발점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인물 요셉을 잘 알 것입니다. 그는 이복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다가 집시 상인에게 팔려나가, 결국 애굽의 보디발 집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씌고 감옥에 갔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그는 이집트 제국의 총리가  된 후 자기 가족들을 모두 다 이집트로 이민초청 합니다. 그때 형들은 요셉의 보복이나 앙갚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요셉은 이런 말을 합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창세기 50:20).
  요셉은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역경을 헤쳐 나와다는 고백입니다. 그리하여 빛나는 성공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익 되게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인가하는 믿음의 기대로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안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요?' 라고 항변하는 대신에, "하나님, 나는 주님이 선하신 분인 줄 압니다. 이번에도 주님의 복된 섭리를 믿습니다" 라는 역동적 신앙의 반응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초점을 맞추고 산 자들입니다.

바울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사방으로부터 온갖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핍박, 박해, 음모, 환난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는 로마 까지 선교하러 가는 것이 꿈에도 소원이었습니다. 그 비전 성취를 위하여 수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죄수로 묶여서 로마로 압송되어 갑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지중해 한 복판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파선됩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어떤 외딴 섬으로 상륙하여 모닥불을 쪼이는데 독사한테 물립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 때문에 바울은 더욱 위풍당당하게 로마 까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모든 사방이 우겨쌈을 당한 악 조건들을  역설적으로 해석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빌 1:1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최악을 최상으로 바꾸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를 밝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런 절대적 확신을 심어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29-11-13).
말씀을 묵상하고 좋은 생각, 즉 성령의 생각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에수께로 사로잡아 오십시오.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우리 속에서 평안과 소망으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2. 전지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붙들라.

문제가 커질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일을 하다가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갑자기 건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을 잃고, 사업이 부도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엎친 데 덮친 격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끝이 곧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위기야말로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문제가 커질수록 하나님께 항복하게 되고 돌아온 탕자처럼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 안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탕자처럼 내 멋대로 하겠다고 한다면 돼지쥐엄 열매도 못 먹는 신세로 더욱 떨어 집니다. 문제가 클수록 하나님을 더욱 붙잡을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더욱 역동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한계상황에 많이 부딪쳤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때가 비일비재했습니다.  특별히 그를 핍박하고 반대하는 주모자들의 과격한 공격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전도활동을 방해하고, 길을 가로막습니다. 로마 군인들을 매수하고 지역 주민들까지 선동하여 그의 선교활동을 저지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크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성령님이 크게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힘차게 외칩니다(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능력이요 그리고 빛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예수충만이요, 예수충만은 능력충만이요 은혜충만입니다. 내 속의 세상 자아를 죽이고 온통 예수로 내 속을 채우고 생각하며 닮아갈 때 "약한데서 강함"이라는 비결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역설적인 신앙적 기상을 선포합니다(10절).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이런 내용을 15절까지 계속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약해질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더욱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고후 12:9).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 들어 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태복음 19:26)고 선포하며 일어 나는 자는 성공시대를 열게 됩니다.

  문제가 어렵고 커질수록 낮은 자세로 모든 것을 주님의 손안에 맡길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크고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생각하고 선포하십시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스가랴 4:7).
태산보다 큰 믿음만이 태산을 평지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태산보다  큰 믿음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3. 임마누엘 하나님을 붙들라. 

문제가 어두워질수록,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21세기 미래 사회는 문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전망이 어둡다는 현실입니다.  경제는 그야말로 불투명이요, 불안한 상황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흉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다윗은 간증합니다(시 112:7).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밤이 깊을수록 새벽을 보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정지 표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는 방향 표시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어두워질수록,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확신하고 주를 바라보고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혼자 걷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 분의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깊은 밤중인데도 예수님은 벳새다 언덕에서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다가 역풍을 만난 위태로운 광경을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마가복음 6:48).  시간이 언제인데 예수님이 보고 계십니까 ?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3시입니다. 이미 밤이 깊고 캄캄하여 아무것도 안 보이는 시간인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난 당하는  현장을 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최소한 5-6km 떨어진 먼 거리인데도 내려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요한복음 6:19). 그리고 위난을 당한 제자들을 구하러  물위로 달려 오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약해 예수님을 못 보아도, 예수님은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어둡고 험난한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아파하고 신음할 때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시달리는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곁에 있으니 안심하라』(마가복음 6:50). 할랠루야!
  문제가 어두워질수록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지금 바로 내 곁에 계십니다.
 
  바울이 지중해 한 복판에서 광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 생사가 경각에 달렸던 그 날 밤에 주님은 바울 곁에 가까이 찾아오셔서 동일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사도행전 27: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으니 안심하라.  너의 비전과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두 걸음 다가오십니다."


4. 문제가 클수록 더욱 세차게 기도하라.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7:36).  겟세마네동산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시키고 예수님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 하셨습니다.
  사람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 힘과 노력만으로는 결코 평안할 수 없고, 계속 행할 수 없고, 끝까지 인내할 수 없습니다. 정말 인간은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27장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 후 십자가를 향해 당당히 나아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46절)  조금도 동요없이 평안하십니다(50절). 오히려 칼을 쓰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사랑으로 원수의 잘려진 귀를 다시 붙여 주십니다. 원수를 물리칠 권세를 갖고 있으면서도 조용히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을 자처하십니다(53∼54절). 그리고 온갖 모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하시면서(67절) 인간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길로 기꺼이 나서는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의연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다름 아닌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린 피땀 어린 기도가 예수님의 인성의 한계를 넘어서게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주의 뜻과는 상관없이 칼을 휘두르는 충동적 행동을 합니다. 다른 제자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6절).
  왜 이렇게 제자들의 모습은 초라한 것입니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 할 때에 기도하지 않으면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40절)

  성공 연구가 지그 지글러 박사의 이론에 의하면 벼룩은 최대 2m까지 뛸 수 있는 점프의 천재입니다. 그런데 벼룩을 병에 담아 뚜껑을 덮어놓으면 몇 차례 점프를 시도 하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한계를 정합니다. ‘아, 뛰어봐야 내 능력은 10㎝구나!’ 그때 다시 뚜껑을 열어 놓습니다. 이때야말로 높이 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지만 벼룩은 더 이상 뛸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혹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조금 어렵다고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는 뛸 생각도 없이 포기하는 벼룩 믿음으로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며 더 이상의 성공은 없습니다. 이 한계를 넘어서는 최상의 방법은 ‘기도’입니다.
  주님은 친히 기도로 인간의 한계를 넘으셨기 때문에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요14:13∼14,15:7·16,16:23∼24·26). 오직 기도로 무릎 꿇는 자만이 현재의 한계를 넘어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실패를 자처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기도로 무릎 꿇어 한계를 극복하는 인생 승리자가 되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29-11-13). 할렐루야!

사건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조용히 묵상기도가 필요하지만, 능력을 불러오고 기적을 불러오는 기도는 부르짖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강청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방법입니다. 아멘.


[3] 결 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를 당면할 때, 우리는 문제 중심으로 보지말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해결 중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가 무지개를 보기 원한다면 먼저 비가 오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시각과 관점의 발상 전환이 필요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으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그리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며 찾는 자는 문제를 풀어 가는 정복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성공시대를 여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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