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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이름을 회복하자 /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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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이름을 회복하자
본문 : 사도행전 3:1-10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성자로 이름난 간디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사렛 예수를 세상에 오셨던 가장 위대한 선생들 중의 한 분으로 존경한다." 간디가 기독교인은 아니었으므로 구주가 되심은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생님이십니다.

그런데 요즈음 천국에 계신 예수님이 고민이 많답니다. 천국에 평신도인 교인이 오면 예수님은 벌떡 일어나서 맞아 주십니다. 수고 많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십니다. 그러나 목사가 들어오면 예수님은 일어나지 않고 보좌에 그냥 앉아서 환영을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목사가 들어오면 일어나지 않을까요? 자리를 빼앗길까봐 그러신다고 합니다. 그냥 웃고자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저는 마음 속에 깊이 새겨두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고치는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말씀입니다.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 사도행전 3장 1-10절의 말씀을 중심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회복하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9시 기도시간에

놀라운 역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규칙적으로 하루에 세 번 기도를 드립니다. 오전9시, 12시, 오후3시 이렇게 세 번 기도를 드립니다. 여기서 9시는 오후 3시를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집에서 기도하는 것보다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가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기도가 중요합니다. 꼭 기도시간에만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가 있어야 역사하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도해야 힘을 얻습니다. 맥스 헨델은 "기도는 전기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전기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전기가 흐르도록 통로를 제공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서 종교개혁을 마무리한 마틴 루터는 "기도는 교회의 강한 성벽이요, 요새이다. 기도는 기독교의 강한 무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 있는 교회, 능력 있는 성도가 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배를 열심히 드려야 합니다. 새벽기도회에도 열심히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금요기도회에도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100주년 사업을 준비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예배시간도 열심히 참석해야 합니다. 오후2시 예배, 수요성서연구에 시간을 내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해야 힘을 얻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데 앉은뱅이가 미문이라는 곳에 앉아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장애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성전 미문에 메어다 놓으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구걸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을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벌떡 일어나서 뛰어 다니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한 말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를 생각해 보십시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더 좋은 것을 주었습니다. 물질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는 물질로도 도울 수 있으나 더 좋은 것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권위는 돈으로 세우지지 않습니다. 돈으로는 회사나 재벌들이 더 큰일을 합니다. 교회는 영적 능력이 있을 때 더 권위가 있습니다.

850여 년 전에 이노센트 4세라는 교황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교황청 발코니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라테란 성당 문으로 보물을 가득 담고 자루들이 옮겨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교황이 말했습니다. "여보게 토마스 아퀴나스경, 이제는 교회와 '은과 금은 없어도'라는 말하던 것은 옛날 얘기일세." 그러자 아퀴나스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던 때도 다 지나갔습니다."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물질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실상은 정 반대입니다. 교회는 물질이 많아졌을 때 타락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영적 권위를 잃어버리고 물질로 때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습니다. 구제 몇 푼 한다고, 복지사업 조금 참여한다고 교회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물론 물질이 있어 봉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어느 신문엔가 났던 이야기입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부정과 부패가 심했습니다. 지방관리들까지도 횡포가 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지방관리로 파송되는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곳은 교회가 왕성한 지역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많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은 고작 1∼1.5%정도였습니다. 그래도 탐관오리들에게는 교회가 무서웠습니다. 교회가 왕성한 곳에서는 부정을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교회들은 영적 권위를 잃고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교인 숫자를 자랑해도, 예산을 자랑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선거에 출마한 분들이나 굽신거리겠지요. 교회의 권위는 교인 수에 있지 않습니다. 예산이 많다고 교회의 권위가 생기는 것 아닙니다. 교회는 성결하여 하나님의 영적 권위를 입어야 합니다.

해방 후에 김구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경찰서 백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낫습니다." 아멘. 그런데 김구선생이 기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교회들이 힘이 없습니다. 경찰서 하나의 관내에 수십 개의 교회가 있어도 힘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영적 권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빨리 영적 권위를 회복해서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은 구걸하는 사람에게 은과 금을 주지 못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구원했습니다.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새로운 삶을 열어 주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손을 잡고 일어났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교회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로 설 때 권위가 있습니다. 은과 금이 문제가 아닙니다. 로마의 교회는 박해를 받는 중에 더욱 권위가 있었습니다. 교회 건물도 없이 숨어서 신앙생활 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로 설 때 권위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할 때 기독교인은 7%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로마황제가 굴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헨리 누웬 박사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지체자들을 가르치는 시설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학원의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신학자가 하버드대학의 교수로서 명예와 많은 보수를 버리고 정신지체자들을 돌보기 위하여 자리를 옮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신학자가 신학생을 잘 길러내서 훌륭한 목회자를 만드는 사명을 두고 왜 장애인 시설로 들어가느냐고 물었습니다. 누웬 박사는 이 질문의 대답으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고 싶어서 장애인시설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하버드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보다 더 큰 권위를 얻었습니다.

누웬 박사가 그의 책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내리막길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종의 모습, 곧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더 큰 권위를 얻기 위하여 좀더 높은 곳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권위가 아닙니다. 진정한 권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 때 교회에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회복하자

예수님의 이름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저 모양인데 예수가 오죽하겠는가"라고 비웃습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우리가 명목상 예수님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해리 포스딕 목사는 크리스찬을 둘로 구별하였습니다. 하나는 심미적 크리스찬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크리스찬입니다. 심미적 크리스찬은 감상하고 즐기는 크리스찬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평화를 즐기고 설교를 통해 위로를 받고 흐뭇한 감정에 젖는 크리스찬입니다. 이에 반하여 윤리적 크리스찬은 예배와 말씀을 접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절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윤리적 크리스찬이 되지 못하고 심미적 크리스찬으로 그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초대 로마교회가 7%의 성도였으나 로마황제를 굴복시키고 국교가 된 것은 확실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성적으로 문란한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크리스찬을 며느리고 삼으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고관집에서는 크리스찬 며느리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크리스찬 자녀들이 고관집에서 태어나고 드디어 로마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단이지마는 몰몬교는 미국의 3대 교파입니다. 침례교, 감리교에 이어 3위의 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가정의 성결을 강조합니다. 미국의 이혼율은 대단히 높습니다. 그런데 몰몬교만 믿으면 가장 하나는 든든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몰몬교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으로서 차별이 있습니까?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구별이 없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빛을 잃었습니다. 빛은 분명하지만 제대로 비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겉모양만 컸지 실상은 허약합니다. 쉽게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의 영광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받는 불명예를 벗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철저하게 사는 성결한 생활입니다. 크리스찬으로서 차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힘입니다. 숫자나 재정이 권위가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성도의 차별성의 교회의 힘입니다. 성도의 성결한 생활이 교회를 권위 있게 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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