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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희생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입니다. / 히 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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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히브리서 10장 1절 - 18절
제 목 : 예수님의 희생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입니다. 


리스라는 신학자는 히브리서의 특징을 "논설로 시작하여 설교로 이어지다가 편지로 끝난다"고 하였습니다.

논설이라 함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증이고 설교라 함은 예수를 잘 믿을 것에 대한 설교입니다.

저희가 오늘 살펴 보는 히브리서 10장 1-18절은 이 논설 부분의 맨 마지막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셨으며 그 예수님과 인간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에 대하여 결론적 매듭을 짓는 부분입니다.

10장 1-18절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1-4절>은 율법을 따라 드린 제사의 한계를 밝히고

<5-10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온전한 희생 제사를 밝히고

그리고

<11-18절>은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완전한 용서를 밝힙니다.

율법을 따라 드린 제사는 인간의 생명을 대신하여 많은 동물의 피가 드려진 것으로서 한 마디로 죄를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를 더 생각나게 해 주는 일시적 효력만을 지닌 그림자에 불과해서 사람을 결코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에 따른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사를 드리겠습니까? 국민의례하듯이 형식적, 요식행위처럼 되겠지요. 왜 그렇게 국민의례처럼 되어 버렸습니까? 지겹기 때문입니다. 식상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제사를 드리는 마음의 느낌이 어떻겠습니까? "이거라도 해야지... 이거라도 안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려움이 지배적일 것입니다.

결국 형식적이고 반복적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해야 하는, 이 율법의 제사를 드리면 드릴수록 사람의 마음에는 어떤 갈증이 생기겠습니까?

정말로 온전한 죄 용서의 기쁨은 없는 것일까? 이 갈증이 쌓여만 갑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명하게 선포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언제 하셨는지 아십니까? <요7:3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여기서의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일년 중 대제사장 한 사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날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다 모였습니다. 우리 나라 백성들, 추석 때 힘들어도 고향에 다 가는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다 모였습니다.

힘들지요..옛날에 나귀에 싣고 아니면 손에 들고 이동하여 몇 일씩 이동하여 다녀오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사를 드리지만, 그러나 유월절 제사가 끝나고 나면, 소란함과 긴장감 때문에 지치고 더욱이 차라리 그냥 일상에 바쁘게 살다보면 잊어 버리고 사는데,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진노가 생각나고 남몰래 죄악된 생각, 행동을 했던 것 더 생각나고...오히려 더 불편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사람의 마음에는 한 갈망이 솟아 오릅니다. "언제까지 이 힘든 일을, 하고 나면 오히려 기가 죽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

"정말로 죄를 용서받은 기쁨,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 받으신다는 확신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 갈망이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입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 우울의 그림자를 아셨습니다. 이 말씀은 완전한 죄 용서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여 지치고 눌린 심령들에게 "소망의 빛"을 던져 준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여러분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는 비유적 표현처럼, 당신의 영혼의 목마름이 해소되는..내 마음안에서, 저 깊은 속에서부터 죄사함의 기쁨,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알게된 흐뭇한 행복감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셨습니까?

오늘날에도 마치 옛날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듯이, 이번 주일의 의무 끝. 빨리 끝나라. 이런 식으로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나도 그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지시는 분은 오늘 나머지 설교 잘 들으십시오.

요는 율법에 따른 제사는 사람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른 제사의 한계는 사람편에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편에서도 드리워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황소와 염소의 피로 드려지는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5-7절>은 <시40:6-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두 가지 사실이 중요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의무감에서 치루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제사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순종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사무엘이 사울의 정곡을 찌른 유명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15:22>

이 하나님의 마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종교의식, 종교행위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내 소망, 내 목표를 가지고 날마다 새벽기도하고 열심히 종교의식을 따르는 것보다도 그렇게 열광적으로 종교생활하지 않았어도 내 인생의 비젼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내 하는 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순종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기뻐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우리가 종교 의식,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삶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이요, 잊어 버리기 잘하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안에 잠기기 위함이요, 변덕스런 우리 마음이 세상 것들이 혹하는 유혹을 이기고 한결같은 마음의 열정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오늘날의 종교의식이 옛날의 제사와 다른 것은 교회생활은 의무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무감에서 행하는 사람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간신히 내 종교의무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사람에게는 주일 예배 한번이 그것도 짧으면 짧을수록 좋은 것으로 느껴집니다.

올해 신간 중에 예수전도단 대표인 문희곤 목사가 쓴 책, "예배는 콘서트가 아닙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배는 근사하게 멋있게 관람하고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의무감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인생의 비죤이 자리 잡히고 내 생활의 가치가 분명해지고 그래서 기쁨과 소망으로 교회생활에 참여합니다.

돌아와서 요는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

그리고 두 번째 단락이 두 번째로 깨우쳐 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사 운명하시기 직전에 외치신 말씀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의 순종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이 매어 달리고 생명을 드리심으로까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뜻입니다. 단번에 영속적인 효력이 있는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단번에 영속적인 효력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단번에 영속적인 효력의 제사, 최후의 제사를 드리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원수로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때를 기다리며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우리의 옹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희생, 단번에 드려진 희생제사의 결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의 심령 안에서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고 증거하시는 은혜, <16-18절>에서 밝혀 주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법이 그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집니다<15,16절>.

하나님의 법이 그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진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것부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알기 전에 성경책 보면 어떻습니까? 졸립지요. "나도 교양인으로서 성경도 한번 쯤을 읽어야지 누가 성경 읽어봤냐고 물으면 안읽어봤다고 하기는 챙피하고 .."이런 생각은 하지만 잘 못 읽습니다. 재미없고 졸립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성경책 읽어봤냐고 물어보면, "맨날 낳고 낳고 낳고만 있더라..."

또 마음이 둔탁한 사람들에게 목사님 설교만큼 좋은 자장가는 없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목사님 설교만 들으면 졸음이 스르르 찾아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면, 그 마음이 거듭나면 성경이 읽힙니다. 설교가 들립니다. 재미있습니다. 무슨 중독에 들린 사람처럼, 성경 읽고 싶고 설교 듣고 싶고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새 사람으로서 내면 세계의 질서가 잡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비로소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는 진리를 잘 나타내 주는 성경구절이 <롬8:1,2>입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람이 온전히 죄사함을 받기 전에는 그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에 의하여 지배를 받습니까?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인간의 마음 바닥에는  결국 죄지을 생각을 하고 죽을 생각 혹은 죽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 바닥에서 철저하게 자기 중심의 생각을 하는 것이 죄악이고 죽음에 이르는 병임을 잘 모른다는 것과 또 어쩌다 가끔은 양심적인 생각, 선한 생각을 하는 것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죄와 사망의 법이 지배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자연인의 마음이 죄와 사망의 법이 지배함이 언제 나타나냐면은요, 위기의 때에 나타납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속이 드러납니다. 사상누각인 것이 드러나고야 맙니다.

그러나 <롬8:1,2>이 증거하는 진리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났을 때.. 이제는 그 마음과 생각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용을 써도 안되었었는데, 이제는 성령께서 주체가 되셔서 하나님의 법을 그 마음과 생각에 새겨 주십니다.

이전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그 마음을 지배하여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그렇게 죽을 맛으로 살다가 결국 죽어 지옥에 가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마음을 지배하여 살 맛이 일어나고 소망이 피어나고 사랑의 꽃이 피고 거룩한 열망이 일어나고.. 새롭게 살게 됩니다.

물론 한꺼번에 사람의 태도가, 인격이 확 바뀐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내 안에 없던, 사랑의 마음이, 사랑의 소망이 시작되어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싹이 트고 있어요, 예수님 만날 날부터 내 마음에 사랑이..." 정말로 싹이 터오르는 것처럼, 마치 겨자씨 하나가 떨어져서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내 마음 안에서 사랑의 싹이 터올라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내 마음 안에 거룩한 사랑의 나무를, 거룩한 영에 인도받는 생명의 나무를 잘 키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 씨앗이 뿌려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시작, 이 은혜,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은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부터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2. 완전한 죄사함을 누립니다<17절>.

만약에, 성경의 진리가 이런 것이라면 그 마음이 어떠할 것같습니까?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마침내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어. 그런데 난 아직 도의 경 지에 다다른 사람, 한 사람도 못 만났어. 그래서 나도 열심히 하고는 있어.

"열심히 교회 다녀봐, 혹시 지옥에 안가게 될지 몰라."

"예수님 믿기 전, 지금까지의 죄는 다 용서해 주었으니 앞으로는 네가 책임져야 하니까 죄짓지 말고 살아라."그러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우리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 미래의 죄값까지도 다 치루신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 다녀봐, 혹시 지옥에 안가게 될지 몰라." 이것이 성경의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기 전, 지금까지의 죄는 다 용서해 주었으니 앞으로는 네가 책임져야 하니까 죄짓지 말고 살아라." 이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마음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인간에게 올무이고 덫입니다. 이런 복음이 아닌 것으로서는 사람을 온전하게 세우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의 죄뿐만이 아니라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우리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 미래의 죄값까지도 다 치루신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결심을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죄는 다 용서해 주었고 앞으로 죄짓지 말라" 그 반쪽 복음으로서는 사람을 온전하게 세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다 용서해 주십니다. 옛날부터 반복되어 온 습관적 죄악까지, 예수 믿기 전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예수 믿고난 이후로 새로이 개척한 죄까지도 다 용서하시고 그 죄값을 이미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소식, 복음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죄책감에 눌리지 않고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고.. 넘어짐은 있을지라도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우당탕탕 거리는 모습은 있을 수 있어도 죄의식에 눌려서, 죄책감에 시달려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기죽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넘어짐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아직 어리니까, 어린 짓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은 당신의 자녀들을 보실 때, 아버지가 아들을 귀여운 놈, 아직 어리니까 바라보시듯이 그렇게 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도 않는 당신의 죄를 당신이 고이 품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죄를 계속 곱씹고 있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신의 죄이든, 다른 사람의 죄이든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 죄를 기억하고 있으면 당신의 마음에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미쳤지, 죽일 놈 이런 생각을 하면 자연히 분노, 자학이 그 마음에 가득 차지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도 않는 죄를 당신이 기억하지 마십시오. 코리텐붐의 표현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에서 떼어내어 저 바다속 깊은 곳에 수장시킨 죄를 다시 낚시질하여 건지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도 다 용서하시고 잊어 버리셨으니 당신도 다 맡기고 용서하고 잊어 버리십시오. 자꾸만 "나는 바보야.." 생각하게 하는 자학의 자리에, 자꾸만 치밀어 오르려는 분노의 자리에, 그 마음의 자리에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은혜의 사실로 대치하십시오.

완전한 죄사함이 맑고 밝은 삶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임이 신나는 삶의 시작입니다.

이 은혜를, 완전한 죄사함의 은혜를 당신은 받으셨는지요?


3. 제사를 끝장냈습니다<18절>.

여러분, 흑백 TV, 흑백 모니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그 때 그 시절을 기억하시는지요? 칼라 TV가 있으면 흑백 TV 안봅니다. 칼라 모니터가 있는데 누가 흑백 모니터로 인터넷하고 있겠습니까?

실재가 나타나면, 그림자는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18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번에 영속적인 효력을 지닌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이제는 제사가 필요없다.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의 단은 제단이 아닙니다. 강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강단이지, "이거 드릴테니까 한번만 봐 주십시오" 비는 제단이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제사, 제단이라 할 때가 있습니다. "주의 제단 앞에.. "그러나 그것은 비유이지 사실 묘사가 아닙니다. 예컨대, <롬12:1> "너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을 드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효력의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제사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의무감에서, 두려움에서 눈감아 달라는 제사의식은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의무감에서의 종교생활,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에서 쫓겨서 이런 거 안하면 지옥갈지 몰라.. 이런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이 아닙니다. 새벽기도 안하면 복을 못받고 주일 예배 안드리면 사업이 잘 안되고 사실은 이런 것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도 안해도 되고 툭하면 주일날 빠져도 된다는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 목사님 핑계대지 마십시오.

새벽기도를 드리고 주일을 기쁨으로 우선순위를 두고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고백, 표현이지 복받는 수단 혹은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잘 봐달라는 방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신앙생활, 두려움에 쫓겨서 의무감에서 얽매여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격, 소망의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신실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 이미 우리는 다 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복을 다 받았습니까? 제사 안들여도 되는 죄사함의 은혜,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은 완전한 구원의 보장,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특권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승리케 해 주시는 이 복을 다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는 복을 안 주신 것같다구요? "돈 주세요, 유명해지게 해 주세요, 기분좋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복을 이런 욕구충족이 복이라고 생각하니까...  혹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 우리는 복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당신이 교회에 나오면서 의무적인 종교생활로의 접근을 하신다면, 생각을 다시 해 보십시오. 의무적 종교생활은 당신을 더욱 얽어매고 힘들고 눌리고 지치게 할 것입니다.

복음을 들으십시오. 복음의 멧세지 앞에 직면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당신에게 완전한 죄사함,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 종교 의무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당신 마음 안에 새겨지는 은혜를 보장합니다.

그 예수님을 당신의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 은혜를 누리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지배를 받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악된 행동만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되었던 당신을 온전히 용서해주시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은 기쁨을 누릴 것이며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의무감에서 억지로 매어서 종교생활하지 않고, 사랑과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누리게 됩니다.

이 새로운 믿음의 삶에 하나님은 당신을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당신의 몸을 드리신 희생, 십자가에서의 사랑의 희생으로서 이처럼 황홀한 은혜를 당신에게 보장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즐거워하며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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