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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 (마 19: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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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 (마 19:27-30) 


(서론)

우리가 '먼저'라는 말을 좋아하는 것은 그 말속에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고, 능력이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먼저 온자가 반드시 먼저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온 자였지만 나중 되고, 나중 온 자였지만 먼저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유일한 민족이라고 자부하며 먼저될자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중된 자가 되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교만이 그들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먼저될 수 없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은 나중된 자가 됩니다.
그래서 '먼저된 자로 나중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一) 공로에 집착하는 자는 반드시 나중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을 보고 예수님께 무슨 말을 했습니까? 27절에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이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갈등하다가 떠났습니다.

그때 Peter의 마음에 품은 생각이 무엇이었겠는가? '나는 저 청년과 다르다. 저 청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로 인해 갈등을 하다가 돌아갔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 직업도, 물질도 주님을 위해서 다 포기했다. 그렇다면 내게 돌아올 대가와 상급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공로에 대한 의식이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의식보다 강했습니다. 베드로는 상을 바라기 이전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던 뱃사람이 아닌가? 예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며 말씀과 영생도 몰랐던 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제는 천국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영생을 소유했으며 복음을 전달하는 12 제자 중 수제자가 되지 아니했는가? 그런데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교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은근히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수고를 보상하시는 분이십니다. (막 10:30)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보상 때문에 주님을 섬긴다면 진정한 헌신과 봉사는 아닙니다. 그런 자는 먼저 되었어도 나중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로를 내세우고 대가를 바라는 교만한 마음을 지워버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二) 이웃과 비교하며 높아지려고 하는자는 나중됩니다.

이조 중종때 학자 김정국씨는 "천금으로 밭을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의 모습이 다변화되고,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서는 이웃은 사촌이 아니라, 100촌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왜 이웃관계가 이처럼 멀어지게 되었는가? 그 원인중에 하나가 바로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물질이 많고 적음을 따진다.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고, 누가 더 큰 집에 살고, 누가 더 좋은 차를 타고, 누가 더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가를 비교합니다.

이 비교의식은 서로간에 경쟁의식을 만들어내고, 급기야는 서로 비방하고 헐뜯으며 시기, 질투를 하게합니다. 그래서 이웃관계가 깨지고 공동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눅 15장에 나타나는 탕자의 형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비교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행해졌습니다.

그는 잃어버렸던 동생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아버지의 품안에 안기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을 때 분노했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는 동생과 비교했습니다. 자신이 분명 형이고, 더구나 집안의 일은 누가 다했는데 집나갔다 돌아온 동생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가득 찼습니다.
이렇게 동생과 비교한 형은 결국 먼저 왔다가 나중된 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생은 형과 비교의 대상이 아니며, 경쟁대상도 아닙니다. 용납하고 사랑하고 함께 힘써서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가업을 가꾸고 세워야 할 대상이며, 이웃이고 공동체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웃은 비교대상이나 경쟁대상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세워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을 주신 것은 서로 물고 헐뜯다가 피차 망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서로 세워주며 함께 가나안을 향해 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으로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웃을 향한 비교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먼저된 자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三) 지나친 자존심은 나중됩니다.

현대를 살아가려면 자존심을 지키고 자존감을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현대는 '자기 PR 시대'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시대입니다.

C. 슈와브는 "자기의 몸, 자기가 하는 일을 소중히 생각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봉사로 우리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평가, 지나친 자존감은 자신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데오푸라스투스는 교만은 "모든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경멸"이라고 했습니다. 즉 교만은 자신에 대한 평가가 지나친 나머지 모든 사람이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다른사람의 말을 듣지않고, 다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주님께 헌신하며 제자들의 공동체를 리드했습니다. 그는 분명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며, 복음을 전하고 이웃을 돌보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그와 자신을 비교 평가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먼저된 자가 나중될 것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지나친 자존감은 자신을 나중온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Paul은 예수님을 만난후에 어느 누구보다 혁혁한 사역을 했지만 "나의 나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난가? 우리가 지혜로우면 얼마나 지혜로운가? 우리가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내가 헌신했다면 얼마나 헌신했겠는가?
우리 모두 "먼저왔다"고 교만하지 말고, 자랑하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중에 죄인이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자기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바리세인은 죄인과 세리들을 향해 "나는 저들과 같지 않다"고 하며 자기 의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죄인과 세리들은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지나친 자존심을 버리십시다. 주님 앞에서 겸손하십시다. 그러면 주께서 높이시고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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