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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 시 11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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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 시편 116:12~14

우리 인간에게는 자타가 대부분 인정하는 어리석은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을 손에 쥐고 있을 때는 그것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것을 잃어버려 손에서 떠나게 되면, 그때서야 '아, 그토록 소중한 것을 미처 몰랐구나!' 하고 아쉬워 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현재 국가적으로 볼 때 경제상황이 좋지않고 선진국에 비해 생활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이만큼 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집에, 자가용을 운전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직업을 통해 적절한 보수나 대접을 받으면서 자녀를 키우고, 가정 생활을 행복하게 꾸려가고 있다는 것.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에 대해 날마다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난 9일에 있었던 사건을 아시지 않습니까? 25명의 중국 젊은이들이 없는 형편에 돈을 빌려 알선 업자들에게 거액을 주고는, '코리안 드림'(Korean Dream)을 안고 밀항하다가 1평밖에 안 되는 그물 창고에서 전부 질식사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는 그 시체들을 바다에 다 던지지 않았습니까? 한편으론 탄식하고 싶은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얼만큼 그들의 눈에 잘 사는 것으로 보이면 저런 모험을 할까?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는 존재인가?'에 대해 다시금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진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갖는 약점이자 어리석은 부분입니다.
오늘날의 형편으로 보면 그래도 한국의 여성들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백 번이나 감사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조건들이 많습니다. 5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 너무나 비참했을 텐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오히려 남편들이 부인들 앞에서 떨고 있습니다. 다들 대단한 인격적 대우를 받고, 여자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고마워하는 여자가 몇 명이나 됩니까? 날마다 내 신분을 놓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소중한 보배를 내 손에 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감격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만이 더 늘어가지 않습니까?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아래서 지금 고생하는 여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과 비교해보면 우리 여성들이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의 디벨트(Die Welt)지가 소개한 탈레반 치하의 아프칸 여성들의 생활은 지옥생활과 같음을 금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집 밖에 나가서 일도 못합니다. 집 밖에서 운동은 물론이고 자전거도 타지 못합니다.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 역시 안됩니다. 교육도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공중 목욕탕에도 못 들어갑니다. 베란다에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도 안됩니다. 가게에 나가서 남자 점원과 값을 흥정해도 안됩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도 남자의사한테는 진찰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남성과 함께 버스를 탈 수가 없습니다. 택시도 이용하지 못합니다. 무슨 성적인 혐의가 있으면 끌려가 돌로 쳐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아프카니스탄 여성들의 입장입니다. 그들에게 자유가 있다면 단 하나뿐입니다. 숨 쉬는 자유,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 여성으로서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감사한 줄 모릅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약점중의 약점이요, 어리석음 중의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구원을 받은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설악산에는 온통 단풍이 물들어 무릉도원과 같은 시절이 왔다고 떠드는 데도 이 놀러 가기 좋은 세상을 뒤로하고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형제 자매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경배하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은 보통 사건입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이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마운 것인가?'를 가슴 깊이 느끼고 입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구원 받은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을 잘 못합니다. 더욱이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을 담대하게, 기분 좋게 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좋아야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결론은 나에게 별로 안 좋다는 말입니다. 나 역시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남에게 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야 이미 발목이 잡혔으니 어쩔 수 없지만, 괜히 상대방에게 말해서 젊은 시절에 놀지도 못하고 교회에 끌어다가 예배드리게 하면 그것도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내가 예수 믿는데 대한 감격과 기쁨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셔서 우리의 이러한 점을 고쳐주시고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말씀의 저자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는 구원의 감격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2-14절) 이 말씀을 가만히 보십시오. 그 속에 감격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기쁨이 차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무언가 너무 고맙고 좋아서 어찌 할 줄을 모르는 모습을 눈 앞에 그릴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감격과 기쁨을 소유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을 앉혀놓고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주겠다.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기쁨이니라.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너희를 떠나도 너희 가슴 속에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세상의 그 무엇이 와도 이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이것이 무슨 기쁨입니까? 바로 구원의 기쁨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쁨을 가지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이 기쁨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매를 맞고 나오면서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집에 있던지 성전에 있던지 기쁨으로 예수님을 전하고 가르쳤다고 사도행전 5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큰 기쁨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하려면 '내가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감격과 기쁨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뜨거울 수도 있고, 어떤 때는 그것이 미지근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 기쁨이 항상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시편 51편에 보면 위대한 성군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나중에 권력 기반이 잘 닦이고, 힘을 쓰기 시작하자 못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소유하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왕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못된 죄악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얼마나 회개하느라고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시52:12) 그가 범죄하기 전에는 '나 같이 이름없는 목동을 하나님께서 크게 보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삼하5:12)는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고 찬송하며 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흥분을 느끼며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자 구원의 기쁨이 마음 속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음이 지옥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구원의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주세요. 그러면 내가 모든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죄인들이 내가 전한 복음을 듣고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이 회복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그 전하는 말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야, 좋긴 굉장히 좋은가 보다. 믿기만 하면 대단한가 보다.' 하는 어떤 감동까지도 전달되게 됩니다. 결국 안 믿던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렌즈를 다음의 3가지 앵글로 맞추어 구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구원은 시간의 주인공이 아니라 영원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영원의 주인공입니다. 시간이라고 하면 현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세상에 와서 건강하면 살다 가는 7~80년의 한 생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 나라를 말합니다. 이것이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간의 노예였습니다. 이 시간 속에 갇혀 살았습니다. 이 시간에 끌려가기도 하고, 밀려 가기도 하면서 한 생을 살았습니다.
구원은 이 시간에서 영원으로 옮긴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영원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시공과 육체를 벗어버린 내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영원입니다. 어느 편이 더 좋습니까? 시간계가 더 좋습니까? 영원계가 더 좋습니까? 아마 누구에게 묻든 똑같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바로 영원이 훨씬 좋습니다. 시간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이 영원한 나라에 없는 것이 5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눈물이, 둘째는 죽음이, 셋째는 곡하는 것이, 넷째는 애통하는 것이, 마지막으로는 아픔이 없다고 합니다. 이 5가지가 없는 나라가 곧 파라다이스 아닙니까?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반면에 세상은 어떻습니까? 눈물의 골짜기입니다. 죽음이 홍수처럼 사람들을 쓸어가는 곳입니다. 오늘도 곡하고 애통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합니다. 아픔으로 인해 고통 당하지 않는 자가 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간세계에서 영원세계로 옮긴 것이 구원이기에 생각만해도 흥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이러한 감격이 별로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병입니다.
박 장로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40대가 되도록 깡패 생활을 했습니다.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시는지, 그분의 간증대로 한다면 인간이 아니고 개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얼마나 싸움을 많이 했는지 온 몸에는 흉터 투성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형님은 목사인데, 상종도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어떤 가정을 찾아가 그 집안 식구들을 몰살시키겠다는 아주 악한 생각을 가지고 서울로 갈 준비를 했습니다. 마침 열차 출발 시각까지는 10시간 정도 남아 있어서 방에 있었는데, 그 사이 약 70분 동안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제가 이 환상이 성경적으로 맞느냐, 안 맞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가 환상을 봤는데, 천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굉장한 분이 나타나서 자기를 수레에 태워 천국으로 데려가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언제인진 정확히 모르지만 자기가 10대, 20대였을 때 돌아가신 외삼촌을 만났습니다. 그 외삼촌은 예수를 너무나 잘 믿어서 사람들이 예수쟁이라고 불렀고, 집안에서는 따돌림을 당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젊은 나이에 병이 들어 집안 재산을 탕진하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고생하다가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외숙모를 붙들고 "아니,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건강해야지, 저게 무슨 망신입니까? 그런데도 외숙모는 예수를 믿을 겁니까?" 하고 대들었답니다. 그러자 외숙모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누구나 다 죽는 거 아니냐?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갔는데 내가 왜 예수 안 믿겠어?" 그런데 외숙모 말대로 환상 중에 천국에 갔더니 거기에 외삼촌이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충격을 받고는 '외삼촌이 이런 좋은 곳에 와 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내 천사가 그를 지옥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6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자기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귀로만 듣던 그 무서운 불 속에서 아버지가 고생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옥을 거쳐 70분 만에 깨어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180도로 완전히 달라져버렸습니다. 누가 믿자고 안 했는데도 스스로 교회를 찾아 갔고, 나중에는 한국, 미국을 두루 다니면서 지금까지 수백 곳에서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천국은 너무나 좋습니다. 그 천국에 안가고 어디에 갈 것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있는 지옥을 갈 것입니까?' 바로 이런 식의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간 것 같습니다.
구원이 뭡니까? 시간의 주인공이 아니라, 영원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축복을 주셨는데 왜 기뻐하지 않습니까? 왜 감격이 없습니까? 왜 남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못 느낍니까? 이 좋은 것을 받고도 모르고 있다면 곤란한 일 아닙니까?
두번째로 구원이 무엇입니까? 정죄의 주인공이 아니라 사죄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는 가장 어렵고 심각한 문제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서로가 용납될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셔서 우리를 가까이 할 수 없었고, 우리는 너무 부패하고 악해서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는 영원히 손을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히 평행선을 긋고 달려갈 수 밖에 없는 불행한 관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셔서 이 둘 사이에 서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쏟으며 생명을 희생시켜서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죄값을 만족스럽게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물을 받으시고 그분의 생명을 받으신 후, 우리에게 내리고자 하시는 모든 심판을 다 거두셨습니다. 정죄를 거두셨습니다. 영벌을 거두셨습니다. 멸망을 거두셨습니다. 저주를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이상 죄인 취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이상 죄인으로 서고 싶어도 설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 받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진정으로 죄를 회개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셨음을 확신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예수 안에 있는 나를 죄인으로 다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합니다. 또 내가 이미 예수 때문에 용서 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하나님 앞에 설 때 죄인이 되고 싶어도 절대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의 신분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용서받고 사죄받은 우리의 입장을 놓고 '행복'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일하지 않았는데 엄청난 삯을 받은 사람처럼 여전히 죄가 많고 죄를 짓기도 하며 하나님 앞에 여전히 악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무조건 죄없는 자로, 거룩한 자로, 완전한 자로 받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만큼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고 구원에 감격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무언가 잘못된 것이고 영적인 병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존재가 아닙니다.
얼마 전에 제가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3일 동안 부흥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인터넷을 통해서도 보셨는지 모르지만, 본당에 12,000석이 꽉 찼었습니다. 그리고 아래 별관과 서울에 있는 약 20여 개의 지성전까지 모두 위성으로 생중계되어 그날 집회에 참석한 분만해도 수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회를 인도하면서 '구원 받았다, 죄용서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몇 번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제가 자주 사용하는 예화를 한 가지 들었습니다..
"여러분, 제 이름 참 외우기 어렵지요? 옥한흠. 참 힘듭니다. 무슨 뜻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한문을 가지고 아무리 풀어도 의미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이름을 안 좋아했습니다. 조용기, 얼마나 멋진 이름입니까? 귀에 단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름이 안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사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는 제 이름을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를 알기 전에는 한없이 흠이 많은 옥이었지만, 예수 믿은 다음에는 한 개의 흠도 없는 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에 낄 수 있는 한 개의 흠도 없는 아주 아름다움 옥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제 이름이 특별히 좋아서 박수를 쳤다기 보다, 아마도 제 말에 동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축복을 주셨구나! 나 역시 한이 없이 흠이 많은 옥이었는데, 이렇게 한 개도 흠이 없는 옥으로 바꾸어주시다니...주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 감격과 감사가 벅차 올라 박수를 쳤던 것입니다.
바로 구원이 그와 같습니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뜁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구원은 실패의 주인공이 아니라, 성공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지 않고 예수 없는 삶을 산 사람은 세상이 그 삶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간에 실패자의 삶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굉장한 수준에 이른 신앙인입니다.
왜 실패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 목적도 없는 무슨 존재를 만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은 창조자되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었고, 나를 위해서 인생을 살았고, 인생의 모든 화려한 꿈과 비전도 전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러한 생을 살 때, 세상에서는 노벨상도 줄 수 있고, 칭찬할 수도 있고 나중에는 묘비를 세워 길이길이 기념을 할 수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은 실패자의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요구를 거부한 인생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해서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실패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후에는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삽니다. 그리고 적은 일이든 큰 일이든 상관없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의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직업이 하찮은 것이라고 말해도 상관없고, 그 사람의 직업이 존귀한 직업이라고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한낮 인간적인 평가일 뿐, 하나님 편에서는 예수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하는 자의 삶이 승리자의 삶이요, 성공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내가 이제 실패자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과 성공자의 삶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한 사람은 세상에서 별볼일 없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한 사람은 세상에서 부러움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조셉 조렌티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를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뉴욕에 있는 고급 호텔 프라자에서 도어맨(doorman)으로 53년 동안 근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동안 결근은 사흘뿐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충성스럽게 그 직책에 종사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78세로 은퇴를 하게 되자, 그의 변함없는 충성에 감동을 받은 기자들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그런 단순한 일을 어떻게 53년 동안이나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이에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요. 호텔 도어맨은 날마다 새 사람을 만나는데, 이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손님을 맞이 할 때 예수님을 맞이하듯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이 호텔 현관은 53년 동안 제게 천국이었습니다."
자기의 일이 무엇이든지, 자기의 일이 어떤 수준의 직업이었든지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만 있다면 조렌티니와 같이 한 생을 살다 가도 "이 실패자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는 성공자야.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리 오너라. 내가 너에게 상을 주겠다."고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또 다른 한 사람 예를 들겠습니다. 현재 부산복음병원에서 외과 의사이자 교수인 이병욱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까지 암 수술만 3000회 이상을 하면서 재발율이 아주 낮다고 평가를 얻을 만큼 권위있는 의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외과 의사라는 데 평소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외과는 의학도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과입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피를 봐야 하고, 자칫 수술도중 실수할 수 있는 위험부담이 따르며, 게다가 응급환자가 발생시 밤낮없이 뛰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소위 말하는 3D업종인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돈을 벌어 남보다 큰 집에서 살거나, 외제차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남에게 과시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소명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명자의 삶을 사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이렇듯 자기의 패러다임이 바뀌자 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워졌습니다. 원래는 3D업종이라고 생각한 그 일이 NEW 3D업종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3D업종이 되었습니다. 자기 직업이야말로 '드림'(Dream)이 있고, '다이나믹'(Dynamic)하며, '드라마틱'(Dramatic)하다고 정의 내렸습니다. 곧 꿈이 있는 직업이요, 아주 역동적인 직업이요, 죽었던 사람을 수술해서 살리는 극적인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니 삶이 즐겁고,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성공적인 삶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틈만 나면 전도하는 전도에 미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까? 우리는 절대로 실패자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떻게 인생을 살다가 가든지 우리는 절대로 실패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삶은 성공자의 삶이요, 승리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영원의 주인공이요, 사죄의 주인공이요, 성공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런 황홀한 선물을 받았는데, 우리 마음에 감격이 없다면 어딘가 병이 들은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남에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딘가 고장난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손에 쥐고 있을 동안은 그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미국 테러 사건 이후 교회를 나가는 사람이든, 안 나가는 사람이든 간에 제일 많이 부른 찬송가가 'Amazing Grace'라고 합니다. 이 찬송은 존 뉴튼(John Newton)이 작시한 찬송가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사방에서 그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새삼스럽게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테러로 인해서 가장 최대의 수혜자는 교회라고 합니다. 보통 모이는 수보다 5배나 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Amazing Grace'를 부르면서 평소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테러가 나서 그 찬송을 부른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테러가 나든 안 나든, 평안하든 어려움을 당하든 간에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백성 앞에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겠다는 시편 저자의 감동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원을 갚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무엇을 할까요? 내 재산을 주님께 드릴까요? 아니면 날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까요? 아니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은 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서원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너무나 좋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앞에 무언가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무언가 표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남에게 가서 이 좋은 구원, 이 좋은 예수, 이 좋은 하나님을 이야기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감격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뜨거움이 치밀어 오르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감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영원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사죄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성공의 주인공입니다. 이 좋은 것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어선 안됩니다. 전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Amazing Grace'를 부르는 감격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삽시다. 그러면 우리도 행복하고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영원을 주시고, 사죄를 주시고, 성공을 주시고, 그리하여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날마다 날마다 내 마음 속에 찬송이 자꾸만 솟구쳐 오르는 감격적인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구원이 너무 좋아서, 이 예수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너무나 벅차서 남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되고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충동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백성다운 행복을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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