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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을 주시옵소서 / 대상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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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주시옵소서 / 역대상 4:9,10
 
시중에 나가면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라는 조그만 책자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성경교사인 브루스 윌킨슨(Bruce H. Wilkinson)이 쓴 책으로 저는 그 책을 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 출판 이래로 5개월 만에 33판을 찍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런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하고 관심을 갖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제목 때문일까?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을 알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신학교에서 성경을 전공한 사람, 그리고 매일 성경을 읽는 교역자들도 야베스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아주 희소한 이름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베스라는 사람이 단 한 사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한번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따라서 한 번 잠깐 나왔다가 사라진 사람의 이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책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들었을까요? 그 제목의 부제를 보면 작은 글씨로 이렇게 씌어져 있습니다.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아마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사 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그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진 않습니다. 저자는 야베스의 기도를 너무 비약시키고 미화시켜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을 차마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 해석상 상당히 중요한 가이드라인을 지켜야 됩니다.
제가 이러한 저자의 해석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야베스라는 사람을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오래 전 이스라엘 족장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오늘 우리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으며 교회에서 말씀을 배워 영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한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가 오늘날 우리의 기도처럼 수준 높은 영적인 기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기도는 다분히 인간적이요, 현실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도를 가지고 너무 영적으로 깊이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읽으면서 무언가 마음에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참, 인간적인 기도구나!'라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10절) 얼마나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소박한 기도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10절)고 나옵니다.
따라서 야베스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소박하고 인간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후 기도 응답을 받아 복을 누린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 본문을 좀 더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보면 야베스를 놓고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말합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은 다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백성가운데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 자체가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야베스를 더 존귀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기도란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과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유대나라 사람도 존귀하지만 자기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지런히 나와 엎드리는 사람을 더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을 수시로 만나는 사람이기에 자연히 더 존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야베스처럼 더 존귀한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똑같이 믿어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존귀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릎을 꿇고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존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등한히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더 존귀한 자로 인정을 받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보면서 '나도 이런 기도를 좀 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 천인공노할 끔찍한 테러사건을 보았습니다. 공상만화에서나 있음 직한 일이 어떻게 현실로 눈 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질 수 있는지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몇 사람들의 과격분자로 인해서 수 천 수만 명이 생명을 잃는 기가 막힌 비극을 생생하게 보면서 '말세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던 냉전시대가 종식되면 이 세상은 보다 평화롭고 살기 좋은 시대가 오리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서 전세계가 지구촌이 되면 인종적, 국가적 장벽 때문에 누리기 못했던 많은 것들을 서로 공유하는 복된 사회가 우리 앞에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박사가 이미 예언했던 것처럼 냉전시대가 종식되면 이제는 문명의 충돌 시대로 접어들 것입니다. 기독교와 회교가 충돌하고 서구사회와 아랍권이 충돌해서 이 세대는 더 비참한 파국을 맞을 수 있다고 예언한 것이 이제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이번 사건을 통해서 봅니다. 아마 경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전세계가 불황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오늘보다 내일이 더 살기 힘들지 모릅니다.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보다 다음 세대가 더 혹독한 고통을 치루는 무서운 시대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 모두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야베스처럼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도록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이런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존귀한 자로 대접을 해주시면서, 야베스에게 응답하신 그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역대상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1~9장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족보에 대한 말씀은 읽기에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몇 절씩 건너 뛰기도 합니다. 무려 500개 이상의 이름이 나열되기 때문에 하나 하나 신경 써서 읽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는 야베스의 이름에 이르러 조금 멈칫하고 다시 한번 주목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족장들은 그냥 이름만 언급하고 지나치는데, 야베스에게 이르러서는 뭔가 다른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잠깐만! 이 야베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요. 좀 남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에요. 한번 들어보세요." 하고는 그 사람에 대해서 특별한 코멘트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3가지 독특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주 고생하면서 낳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둘째는 특별히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그대로 응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3가지가 우리의 주목을 끌게 만듭니다.
지금부터 50년 전만해도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더욱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왜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내가 수고로이 고생하면서 아이를 낳았다고 했을까요? 혹시 거꾸로 나왔는지, 아이를 낳기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지, 또는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집안에 감당할 수 없는 우환이 닥쳤는지 정확한 사연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고생 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어머니가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끝나지 않고, 이 어머니는 자기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이 아이를 낳았는지를 아이가 평생 잊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 즉, '야베스'라는 말은 '고생,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Mr. Pain'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은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 고통을 자식이 꼭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 할지라도, 유대나라에서 아이 이름까지 그렇게 짓는 것은 무리수가 따릅니다. 왜냐하면 유대나라에서는 이름이 팔자를 정하고 팔자 때문에 운명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많기 떄문입니다. 
예를 들어 룻기서를 보면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이민 갔다가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말론', 또 다른 아이는 '기룐'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는지 '허약하다'는 뜻을 지닌 말론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여서 '수척하다'는 뜻을 지난 '기룐'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두 아들 다 '허약하다', '수척하다'라고 지어놓았으니 그들이 잘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여 나중에 결혼을 했는데, 큰 아들이 결혼한지 얼마 안 되서 자식 없이 요절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도 결혼 후 얼마 안 되서 자식 하나 남기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무슨 뜻입니까? 그는 '평화'라는 이름의 의미 그대로 한평생 전쟁 한번 치루지 않고 팔자 좋은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이름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따라서 아들을 낳아서 '고통'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Mr. Pain'하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의 의미인 '고통'을 자꾸 느끼게 만드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아 보입니다.
야베스가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성장하면서 그 이름이 항상 자기 뇌리 속에서 불길한 생각을 갖도록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이 이름대로 살아야 될 팔자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이름 때문에 평생 고생하다가 인생을 끝낼지 모르겠다.' 하는 어떤 불길한 생각이 계속 그를 사로 잡았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의 눈 앞에 있는 환경은 그리 썩 좋은 환경이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현실을 보면 넘어야 될 산들이 첩첩산중이고 자기 이름은 불길하게 고통이니,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제가 고민을 했다고 단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하기로 작정한 것을 보면 고민한 사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특별히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우연히 생각한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에는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라고 굉장히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원뜻은 '부르짖는다. 소리를 지른다'는 뜻입니다.
야베스가 왜 갑자기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한번 부르짖어야 되겠다. 하나님의 옷깃을 붙들고 좀 매달려야 되겠다.'고 절박하게 느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언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문제를 앞에 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평안한 사람이 특별히 기도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일제시대 때 기도하던 우리의 신앙 선배들보다 우리의 기도가 약한 이유가 있습니다. 6·25때 가마니 깔고 기도하던 조상보다도 우리가 기도를 덜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만큼 형편이 좋아지고 걱정거리가 적기 때문에 기도하고 싶은 절박감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 심정이 얼마나 절박한 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하나님, 제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소서. 내 지경을 넓혀주세요."라는 절박하고 긴박한 심정이 그의 기도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러다가는 망할 것 같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고통을 물려주었지만,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바꾸어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조상은 나에게 복을 안겨주지 못했지만 내가 나의 고통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부르짖기만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바꾸어 복으로 나에게 안겨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내 운명도 하나님은 바꾸어주신다고 하는 그의 믿음이 작용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야베스의 자세를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운데 고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여기저기 고통으로 얼룩져있고, 고통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태어나든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슬픔과 고통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은 없습니다.
고난, 고통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은 체념하는 것입니다. '내 팔자, 더 이상 무엇이 더 좋아지겠냐? 되는대로 살자.' 그리고는 모든 탓을 조상이나 자신의 무능함에 돌리면서 좌절하고, 되는대로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이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면 긍정적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나는 내 팔자대로 살고 싶지 않아. 엄마가 나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주었던지 나는 그 이름대로 살고 싶지 않아. 나는 도전할거야. 나는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야베스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는 자세를 취하면 그것은 나의 고통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야베스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통을 안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까? 긍정적인 반응입니까? 긍정적인 도전입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반응입니까? 여러분, 스스로가 살펴보셔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잠깐 보십시오. 자꾸 반복하지만 그의 기도는 굉장히 인간적인 기도입니다. 그리고 단순합니다. 그 기도를 가만히 읽으면 참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기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복을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기 힘으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 누리는 은혜가 복입니다.
모든 종교가 복에 대해서 장황한 이야기를 합니다. 불교와 유교의 복은 그 주체가 인간입니다.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도 인간이 갖출 때 받는다고 하고, 또 복을 받는 목적도 인간 자신을 위해서 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의 관념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체입니다. 복을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시요, 빼앗아 가는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복을 받아 누리는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라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주체적인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야베스가 이 사실을 얼만큼 깊이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역시 대동소이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곧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합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 소유를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 땅을 대대손손 보존하는 것이 큰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이 땅을 심지어 다른 친척에게 넘기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대로 잘 보존했다가 장자에게는 큰 땅을 주고, 차자에게는 작은 땅을 주면서 분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경입니다. 'territory'입니다.
야베스도 아마 아버지로부터 조그마한 땅을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베스가 보니 그것 가지고는 평생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다가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내가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살다가 끝나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땅이 좀 더 넓었으면 좋겠다. 좀 더 큰 땅을 가지고 큰소리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내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라고 외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여, 나에게 복을 주사 이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사업을 번창시켜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원하는 어떤 소원을 이루도록 해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와 같습니다. 물질의 축복, 성공의 축복, 부요의 축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매우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기도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무슨 기도를 합니까? 무슨 복을 달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근심이라는 말은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번역에서는 그냥 근심이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손으로 나를 보호하사 환난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게 해주시고, 이 환난 때문에 고통하는 인생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이 말은 무슨 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달라는, 즉 잘살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그것을 잘 누리면서 평안하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얻고 싶어하는 복을 야베스가 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가정에 우환이 생기고, 병이 들고, 자식들이 사고를 일으켜서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근심과 고통가운데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따라서 야베스는 2가지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복을 주되 나의 사업과 생업을 번창하게 해주시고, 그 다음에는 그 번창한 생업을 통해서 평안을 누리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야베스의 기도가 유치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저도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애걸복걸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목사는 기껏 복을 받아봐야 월급이 조금 올라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복을 달라고 씨름할 겨를이 없습니다. 목사의 기도는 아무래도 차원이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현실을 살기 때문에 이 현실에서 복받은 사람의 삷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복을 구할 자격이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평생 고생만 하다가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기도라고 머뭇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적인 기도라고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야베스처럼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가정들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가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하나님, 이런 가정 복 좀 주세요. 장사 좀 잘 되게 해주세요. 자금이 부족해서 무언가 제대로 하려고 해도 힘을 쓰지 못하는데, 이럴 때 하나님이 조금만 잘되도록 도와주시면 금방 일어서지 않습니까?' 하는 생각에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주여, 믿음이 좋아지게 해주시고, 천국가게 해주시고...' 이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이 가정 좀 도와주세요. 자식들이 저렇게 고생하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기도입니다. 비록 인간적인 기도이지만 저는 서슴지 않고 이런 기도를 합니다.
넉넉치 못한 가정이지만 머리가 좋아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등록금을 낼 때만 되면 밤잠을 못 자고 고민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 학생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기도를 하게 됩니다. '주여, 이들에게 은혜를 주옵소서. 누구를 통해서 주시던지, 가정에 복을 주시던지, 물질의 축복을 주시던지 해서 등록금 걱정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 역시 과거에 그러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 이런 젊은이들, 너무 지치고 기가 죽지 않도록 복 좀 주세요.' 그 기도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하지 않거나 구해도 아주 힘없이 구해서 하나님께서 주고 싶어도 못 주는 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기도를 등한히 하게 되면 아무리 마음씨 좋은 하나님이라고 해도 못 주는 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복을 받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자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도하지 않는 내 자신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야베스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형통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들처럼 잘못하면 우리가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닌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인간적인 축복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나오시는 많은 성도들 중에는 이런 복을 받아서 가정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직도 이와 같은 은혜를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복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릴 때 그것이 기복신앙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필요한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안 들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우리가 간절하게 구하면 받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가난하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긍정적으로 도전하십시오. 일이 잘 안 된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긍정적으로 야베스처럼 도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머물면 안됩니다. 한가지 더 깨달을 진리가 있습니다. 야베스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충만한 신약시대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야베스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손에 들고 읽으면서 그 말씀을 배우고, 깨닫는 복된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옛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알고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원이 다릅니다. 야베스는 당장 자기 눈앞에 있는 자기 농토를 넓히고, 이 세상에서 잘 살아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긍지를 살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까? 어떻게 하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백성들이 이 땅에 가득하게 될까?' 하는 고귀하고 영원한 비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주여, 복을 주시옵소서. 돈을 주시옵소서. 성공하게 하옵소서. 건강하게 하옵소서. 내 자식 잘 되게 하옵소서.' 하는 인간적인 기도를 구하지 않을 순 없지만 거기에서 머물면 안됩니다. 한걸음 더 올라가야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크게 헌신할 수 있는 사역의 장을 넓혀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주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내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내가 헌신할 수 있는 내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내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힘있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물질, 자녀, 성공, 절망, 자유, 평화,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주의 재단에 올려놓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나의 삶을 드릴 수 있도록 내 지경을 더 넓혀 주시옵소서. 할 수만 있다면 주를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기 원합니다. 더 많은 땀을 흘리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에게 넓은 지경을 허락하시옵소서.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기 원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더 험한 길을 가는 인생을 살면서라도 주님의 뜻을 이 땅에 펴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에게 거룩한 지경을 더 넓혀 주옵소서.' 이러한 기도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야베스와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작은 자라도 천을 이루고, 가장 약한 자라도 강국을 이루는 능력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내 지경을 넓히시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짧은 인생이 쓰임 받게 하옵소서. 내가 가진 물질이 쓰임 받게 하옵소서. 내가 가진 좋은 위치, 명예와 권력,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내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가 없이 단지 야베스처럼 인간적인 기도만 하고 끝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각성전도집회를 앞에 두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복을 받으면 그 복을 가지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더 일할 수 있도록 사랑의교회 지경을 넓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주님을 알게 되고 더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향하여 몰려올 수 있도록 우리의 지경을 넓혀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간적인 기도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영광스런 자리에까지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강영우 박사라는 분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한국 장애우 중 최초의 유학생이자 첫 박사학위 취득자입니다. 그가 쓴 저서로는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등 다수가 있습니다. 그는 중학교 재학 시절 축구공에 맞아 실명을 했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의 실명에 절망한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3명의 동생과 생계를 꾸리고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밤낮없이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누나마저 18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 믿는 집안에 무슨 저주라도 내린 것처럼 끔찍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는 눈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병원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기도하고, 몇 차례 수술도 받긴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결국 암흑이 그의 눈을 덮었고, 그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목사님이 그에게 사도 바울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평생 몸에 가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도 극심한 고통때문에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가시로 인한 고통이 그에게 능력이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강영우 군도 사도 바울처럼 될 수 있어요." 이 말씀을 들은 그는 바울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불행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긍정적으로 자기 불행을 극복하기로 마음 먹고는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도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섬기게 하옵소서. 나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던지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철학박사가 되어 특인 교수로 재임 중입니다. 대학 시절에 천사와 같은 아내를 주셨고, 두 아들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이 얼마나 총명한지 다 하버드대학에 들어가서 한 아들은 안과전문의가 되었고, 나머지 아들은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강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유명한 빈센트 필(N. Vincent Peale) 목사님이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생애를 알고 나서 아무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야 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산 증인입니다." 그는 현재 부시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으로 전세계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지경을 크게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기도는 만능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십니다. 만일 우리가 자주 좌절한다면 그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성실하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려야 될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를 적당히 하는 우리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도합시다. 복을 구합시다. '원컨대 내게 복에 복을 더하시옵소서.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고통이 없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한 단계 뛰어넘어 '주여, 내가 주님을 위하여 한평생 기쁘게 헌신할 수 있는 지경을 더 넓혀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 기적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바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들입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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