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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족하라 (빌 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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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하라” (빌 4장 10~23절)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사랑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신에게 필요한 사랑을 충분히 공급받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필요한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애씁니다. 심리학자들은 애정 결핍을 채우려는 인간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 쟁취형 사람
첫째, ‘쟁취형’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에게 필요한 사랑을 줄 사람에게 달라붙어 사랑을 표현할 때까지 끈질기게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한편으로 이런 사람들을 ‘밀착형’이라고도 합니다.
쟁취형의 사람들은 대개 자기 중심적이기보다 다른 사람 중심적입니다. 쟁취형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안은 굉장히 밀착돼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가족에게 들어가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 사람들은 항상 자기 감정을 중요시하고, 한 사람이 기분 나쁘면 온 가족이 덩달아 나빠집니다. 자기의 사랑을 위해 밀착하여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 도피형 사람
둘째, ‘도피형’입니다. 도피형 사람은 사랑을 요구하다가 거절을 당했어요, 상처를 받았어요, 그게 너무 아파요. 그래서 다시는 사랑의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도망합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도피형은 ‘거리유지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숨깁니다. 악착같이 사랑을 얻으려하기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편안함을 유지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꼭 필요할 때 외에는 사랑의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려고 노력합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마음에 선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선 안에 들어오면 불편해 합니다. 만약, 누가 들어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적당한 선 밖으로 도망합니다.
셋째, ‘혼돈형’입니다. 붙어야 할 때 떨어지고, 떨어져야 할 때 붙는 사람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좇아 당을 짓고, 범죄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 안정형 사람
넷째, 붙어야 할 때 붙고, 떨어져야 할 때 떨어지는 ‘안정형’입니다. 학자들은 세상에서 완전한 안정형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때에는 무리 가운데 계시고, 어떤 때는 홀로 산 속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대해 주셨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안정형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변화하는 사람들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필요에 따라 버리는 이 세상의 법칙과 질서와 기준으로 마음을 채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마음이 하나님 안에 있기를 원했고, 하나님이 자기 안에 가득 차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안에 가득 찼기 때문에 주님은 더 이상 사랑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거절의 순간에도 오히려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자신이 홀로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느니라. 그러니 너희는 두려워 마라. 염려하지 마라. 나로 인해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너희 갈 길을 가라.”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 할 때 거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으로 마음에 위로를 받으려 할 때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하고 목마른 사랑일 뿐입니다.

■ 자족형 바울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유형을 얘기합니다. 본문 말씀은 성공, 능력, 힘 등으로 많이 왜곡해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관계’의 개념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어떤 유형으로 얘기하는지 보겠습니다. 10~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족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자족형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그는 쟁취형의 사람이었습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유치원에서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바울은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을 붙잡고 열심히 쟁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생애는 완전히 바뀝니다. 그의 가슴은 도둑맞아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적대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바울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아라비아 광야로 도망합니다.
3년간의 은둔 생활, 그는 ‘도피형’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은둔 생활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족보, 가문, 학력, 재산, 지위로 채우려 했던 모든 것이 헛된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습니다. 바울은 은둔 생활을 통해 자신의 빈 마음을 하나님 말씀 앞에 펼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읽었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실패한 인생이었고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다시 출발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읽으며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 보니 실패, 절망, 패배도 아니요, 창세로부터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획하신 대로 이끌려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말씀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말씀을 통해 더 깊이 십자가를 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부활을 봅니다. 부활의 그 영원한 세계, 완전한 세계, 우주보다 더 넓고 큰 완전한 세계가 이미 완성돼 있음을 봅니다. 그는 기도 속에서 부활의 세계로 옮겨갑니다. 부활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닙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무한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모든 세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이 십자가 경험을 통해 자기 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는 감격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세계를 누립니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부활이 자신에게 선물로 주어졌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다시 봅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 오늘이라는 것은 어제부터 오늘이 되고 오늘에서 내일이 되는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의 삶과 생명은 미래로부터 오늘로, 오늘로부터 과거로 흘러가는 부활의 법칙, 믿음의 법칙에 의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것임을 깨닫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미래에서 조명하는 삶을 누립니다. 자신을 포함한 자연 만물은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진화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한 영원한 세계를 발견하고 그 세계에서 얻고 누리는 은혜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바울은 새벽이 올 수록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날이 하루 더 다가 온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더는 부족한 것, 연약한 것, 무능한 것도 없습니다. 그는 이미 부활의 세계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 앞에 당당하여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허물까지도 이미 회복했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됐음을 알기에 그 누구도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자신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대합니다. 내면에 치유와 회복과 가치관이 정립되는 때에 주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다소에 머무르며 놀라운 은혜를 더 음미하고 깨달아 자신 안에 채워 나갑니다.

그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성령의 사람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숨겨진 사울을 찾아와 설득합니다. 그리고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가서 1년 동안 함께 사역합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인격과 믿음으로 바울을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사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입니다. 전에는 바리새인이었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주님께서 불러 이방의 사도로 세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울은 바울이 되고, 바울로서 바울은 성도와 교제를 갖고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통해 전도자로 길을 떠납니다. 그는 더는 사람의 세력이나 세상의 방법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자기 필요에 따라 바울에게 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존재로 위로를 삼지도, 미련을 두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겉모습이 아닌 영혼을 봅니다. 그 사람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경험하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발견한 것처럼 주님이 다시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주님으로부터 기쁨, 영적인 만족으로 자족을 누립니다. 바울은 어떻게든 자신이 십자가에 거치는 것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자족하기를 원했고 자유하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후원을 받지만, 그는 의미를 새롭게 하는 천막 장사를 하며 경제적인 자족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쟁취형’이었던 같습니다. 바울을 찾고 또 찾아서 그의 필요를 돕고 또 돕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고 부담스러웠습니다. 묶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빌립보 사람들을 선물로 주신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사람들에게 필요 없는 거리를 두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사랑의 필요를 따라 서로 교제하고 돕고 도움을 받습니다. 공급자가 되고 수급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에게,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에게 안정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쁨으로 말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는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뜻은 내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빌립보 사람들, 만약 당신들이 나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기쁨으로 받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이 어렵더라도 나를 도와주십시오. 왜냐하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풍성히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자족한 사람이 이웃을 돕는다
우리의 쓸 것을 넉넉히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14~1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어떤 사람이 남을 돕겠습니까? 가난은 불편한 것이고 부는 부담스런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작은 것을 하나 하려고 해도 신경 쓰이는 것이 많습니다.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도 돈 걱정부터 앞섭니다. 부모님께 작은 선물 하나 드리려고 해도 자식이 눈에 걸립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늘 불편한 삶을 삽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잘 돕습니까? 부자는 부담스러워합니다. 세금도 내야하고 책임도 져야 합니다. 교회에 헌금한 것을 비자금으로 전용했다고 누명을 쓰기도 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 오는 이유는 사랑해서가 아니라 돈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사람을 돕자니 저 사람이 ‘앙앙’거릴 것 같고, 저 사람을 돕자니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을 돕는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자족하는 사람’이 남을 돕습니다. 자족하지 못하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곧 간섭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돕는다는 것은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입니다. 도와주고 그 사람을 자유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와주고 그 사람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와주고 내 것으로 만족하고 도움 준 것은 잊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자족의 은혜
이렇게 우리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자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족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낼 것을 약속했고 그 말씀대로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자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누가 아비한테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주며 떡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육신의 아비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 보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하늘의 아버지, 너의 아버지는 네가 필요한 것을 구하기 전에 네 필요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말씀을 약속으로 붙잡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약속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하고 구원에 대한 약속을 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섭리와 은총에 대한 약속입니다. 빌립보서에 있는 말씀 한 가지만 더 나누기를 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하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좋으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은혜로
부활에 이를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그 영광된 부활의 세계가
이미 내 안에 완성 됐음을 기뻐합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이 부활의 세계를 보고 느끼며 기뻐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법칙’이 아닌
‘믿음과 부활과 은혜의 법칙’을 따라서
날마다 자족하고 기뻐하며
생명을 구원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도록
축복하옵소서.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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