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 4:1~ 9)

  • 잡초 잡초
  • 400
  • 0

첨부 1



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립보서 4장 1~ 9절)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일곱 가지 보석’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서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라, 주 안에서 도우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관용을 베풀라, 주 안에서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주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이 소개하는 일곱 가지 보석, 이를 꿰는 기술이 있을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보석을 꿰는 방법은 바로 ‘주님 안’입니다.

◆ 예수님 향한 거룩한 이동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성육신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장소를 버리고 고통 당하는 인간의 조건 속으로 이동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거룩한 이동을 할 때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 광야로 이동했을 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이동은 우리를 주님에게 속하게 합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청계천으로 들어가심으로, 최일도 목사님은 청량리에 정착하심으로 그 곳에서 하나님 나라 기초를 놓았습니다.
우리는 삶의 안전 장치를 풀고 경쟁, 성공, 인기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 십자가로 거룩한 이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께서 거룩한 이동을 하라고 부르시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부름에 대해 일곱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크게 세 종류로 묶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3가지 이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 서는 것,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 주 안에서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1절 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주 안에 서라’에서 ‘서라’는 말은 ‘굳게 서다’라는 뜻으로 전쟁 용어입니다. 적이 공격해 올 때 초소의 병사가 물러서지 않고 굳게 서서 지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영적 싸움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항해 싸우는 게 아니라 하늘과 이 어두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인 마귀들을 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엡 6:12)

◆ ‘주 안’에서 이루는 영적 비밀
중요한 것은 싸움은 내게 속한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2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부활케 하심으로 영원한 승리를 쟁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전진하라, 행군하라, 쟁취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이미 얻은 승리를 철저히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명한 설교가 워치만 리는 “주님은 승리를 얻으려고 사탄과 싸우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은 지옥 입구에 있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시고 사단과 싸워 이기는 능력을 주시고 부활의 영광을 위탁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굳게 서 있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주의 영광을 지키고, 주의 부활을 지키려 할 때 사단은 구경만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욥의 상황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앙을 지키려는데 예상치 못한 고난이 닥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고 주어진 능력으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님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사단이 영혼을 공격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욥의 ‘영적 싸움의 핵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 안에 굳게 서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 밖으로 내몰려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때로 사단은 우리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합니다. 수치스럽게 만들고 창피한 자리에 머물러 있게도 합니다.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바울의 그림자만 덮여도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간질병으로 사역 도중에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즉시 알아차리고 그 기도를 더는 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교만에 빠지는 것보다 병든 몸으로 믿음 안에 서는 게 축복입니다. 부유함으로 방탕에 빠지는 것보다 가난함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영국의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꿈을 갖고 중국 오지에 들어가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 수록 어려움이 닥쳐와 사역이 무너지고 마침내 자신의 육체에 심한 질병이 찾아왔습니다. 절망과 낙담에 빠진 그에게 어느 날 동생이 보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오빠는 포도나무 가지이지 포도나무가 아니에요. 가지가 할 일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는 줄기로부터 영양분을 빨아들일 때 절로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오빠, 염려하지 말고 노력하지 말고 좀 쉬세요.”
테일러는 용기를 얻고 사역에 대한 쉼을 갖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후부터 사역에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큰 업적을 남기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저는 패배했고 그래서 승리를 간구했으나 도무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승리는 찾아왔습니다”하고 간증했습니다. ‘믿음 안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안에 서 있을 때 나의 연약함은 주님의 전능하심으로 보호받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모든 것을 잃고 신뢰했던 아버지에게도 버림받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그것은 갈등하는 상한 심령을 찾으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상한 마음’입니다. 상한 마음은 갈등하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부르짖으면서 하늘 아버지께 예배하고 모든 것을 의탁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상황, 아버지께서 자신을 버리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영혼의 중심을 하나님 안에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때 십자가의 기적이 일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회복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거룩한 이동을 하십시오. 주님 안에 서 있을 때 인생에 실패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 능력 안에서 회복됩니다. 바울은 본문 3장 21절과 4장 1절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항상 기뻐하십시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주님 안에 믿음으로 서십시오.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가십시오. 염려에서 기도의 자리로 위치를 옮기십시오.

◆ ‘관계’를 이루는 주 안의 공동체
둘째는 주님을 따라 이동하는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같은 마음을 품어라, 주 안에서 서로 도와라, 관용을 베풀라 등 3가지입니다. 2,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당사자들도 괴롭지만, 주변 사람들이 더 큰 아픔을 겪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싸우면 자녀들 생애에 큰  멍이 듭니다. 교회에서 지도자들이 싸우면 양들이 해를 입습니다. 본문의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로 여인들이었습니다. 헬라 문화권에서 여인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와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지방은 달랐습니다. 마치 제주도 여자들이 활동력 있게 사회생활을 하는 것처럼 마게도냐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사회에서 지위도 있었습니다. 특히 빌립보교회는 ‘루디아’라는 ‘자주 장사’하는 여인, 또 그와 동역하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중심으로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분열의 불씨가 된 지도자들 이름을 말합니다. 바울이 이름을 공개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분쟁이 오래 되었어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이제 더는 방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어쨌든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 싸우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쟁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DNA는 사랑과 관용 
요한1서는 특별히 형제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요한1서 2장 9~11절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하고 말합니다.
형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곧 아버지의 아들로서 DNA가 있어야 합니다. 그 DNA는 바로 ‘형제 사랑’이라고 정의합니다. 성경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성도가 성도를 미워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 3장 10절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마귀의 세력 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이며 ‘주고 받기’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합당하고 가치가 있으며 쓸모가 있어야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자신을 포기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포기하고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 안으로 이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주님에게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해서 안 됩니다. 좋은 것일 수록 주님의 뜻대로 주님 안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불화하고 있다면 날이 저물기 전에 찾아가 화해하십시오.
또 바울은 싸우는 것을 보고 있는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경고합니다. 팔짱끼고 서서 불구경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불구경하는 사람은 불지른 자와 공범입니다. 함께 멍에 맨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싸움의 중재자가 되어 교회 안에 일치와 평화를 가져올 것을 간절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함께 천국에 설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그리스도의 관용을 베풀 것을 강조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은 공정함을 넘어 상대의 허물을 덮습니다. 올바른 곳에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어떤 사람도 관용함을 받지 않고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은 단지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기가 용서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삯를 지불하셨습니다. 이웃을 향한 관용이 그들의 허물을 덮고 용서하는 수준으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견고히 설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야 합니다.

◆ 최상의 삶 향한 거룩한 이동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사회에서 어떻게 주님을 따라 거룩한 이동을 할 수 있는지 8, 9절 말씀에서 가르쳐 줍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8, 9절에서 바울이 연결한 단어를 강조하면 우리는 인생에서 위대한 교훈을 찾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 다가와서 “함께 수소 폭탄 을 만들자”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은 일을 제의할 때 어떤 기준으로 그 일을 결정하렵니까? 성경에서 세 가지 원칙을 말합니다.
하나, 로마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십자가의 용서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금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해 행동할 수 있습니다. 
둘,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함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셋, 바울은 더 높은 차원의 기준을 얘기합니다. 바로 본문 말씀입니다. “모든 것에 참되며 모든 것에 의로우며 모든 것에 칭찬할만하며 모든 것에 사랑할만하며 모든 것을 취하고 선택할 수 있으나 최상의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나 자신의 유익을 따라 구하지 말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각만하는 사람보다 행동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한 청년이 D. L. 무디 목사님께 “성경을 읽다가 의심나면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그때는 성경을 덮고 밖으로 나가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전도하고 생활한 후 다시 성경을 펼치십시오. 그러면 ‘바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아는 대로 행동하지 말고 믿는 대로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넓어질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잘못은 알고도 실천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거룩한 이동을 하십시오. 그러면 삶은 최상이 될 것입니다”하고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 안에 서고 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돕고 기뻐하며
관용을 베풀고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