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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푯대를 향하여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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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빌립보서 3장 12~16절) 

한스 로코마크 교수(네덜란드 자유대학)는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1,80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후쿠사이’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어느날 후쿠사이에게 한 친구가 찾아와 “수탉을 그려달라”고 부탁합니다. 후쿠사이는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말합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 갔더니 이번에는 “이주일 후에 오라”고 합니다. 이주일 후에 찾아 갔더니 “두 달후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3년이 되었습니다. 3년이 되는 날 친구를 찾아갔을 때 또 미루려고 하자 어이가 없어진 친구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친구의 화난 모습에 후쿠사이는 말없이 종이와 붓을 가져와 일순간에 수탉을 그렸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그려진 수탉이었습니다. 그림은 좋았지만, 친구는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이렇게 잘 그릴 수 있는 것을 왜 3년이나 기다리게 해?”하며 따졌습니다. 후쿠사이는 말없이 친구를 화실로 데려 갔습니다. 그곳에는 후쿠사이가 3년 동안 습작한 ‘수탉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예술가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예술적인 재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술은 끊임없이 훈련하고 노력할 때 완성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참다운 예술가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은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됐다고 해서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언제 왕다운 왕이 됩니까? 사무엘이 그의 집에 찾아와 기름을 부은 13살 때입니까? 아니면 17년의 방랑 세월을 마치고 헤브론에서 왕으로 등극하는 때입니까?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믿음을 지키고 주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왕다운 왕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자격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격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믿음으로 전진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십자가에서 값없이 주신 그 구원으로 만족한다면 웅덩이에 고인 물이 썩듯이 우리 믿음도 본질을 잃고 썩어 냄새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하나님의 부름 앞에 자신을 비워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아름답고 풍성한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목표, 하나님을 닮아가는 목표를 세우고 믿음으로 경주합니다.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 ‘구원을 이뤄가는 자’, 완성된 자가 아니라 ‘완성을 이뤄 가는 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산 재물로 드립니다.

■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자신이 목표를 세운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워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부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 하실 때 주님의 꿈이 내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향한 꿈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그 꿈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붙잡힌 바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힐 때 인간의 일을 벗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팟죽 한 그릇을 팔아 장자권을 얻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권을 얻습니다. 심지어 삼촌까지 속여 재물을 얻습니다. 장자권, 축복권, 미인, 재물을 얻었지만 야곱은 여전히 인간적인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런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께 붙잡혔을 때 비로소 거듭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일을 준비합니다. 마침내 야곱이 변해 이스라엘이 되고 이스라엘에게서 열두 지파가 나옵니다.
‘이집트 왕자 모세’는 사십 세 때 인생의 최고 절정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와 혈기를 믿고 나갔을 때 아무런 일도 감당하지 못 하고 도망자 신세가 됐습니다. 그런 모세가 80세에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붙잡혔을 때 인생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해 민족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일을 감당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붙잡히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얍복강가의 사건, 미디안광야의 사건이 있어야 하고 다메섹 도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붙잡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은 행복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 애썼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을 만났을 때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안타깝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도리어 하나님께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의 방법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행위로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트로우맨’이라는 한 청년이 기독 청년 7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설문 중에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 응답한 사람 60% 이상이 “선행을 해야합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또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만족스러워 하실까요?”라는 질문에 응답자 70% 이상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설문 결과는 무엇을 증명합니까? 현대 교회에도 ‘공로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공로주의를 배격하십니다.

■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십니까?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사람을 인정하십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아무리 경건해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 사람, 자기 몸을 불사르기까지 헌신해도 육체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을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가 있으면 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가서 고통을 덜어주고, 억울한 사람 편이 되어 돕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대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동행하는 그 자리에 내 발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논어에서 자공이 공자에게 “온 동네 사람이 어떤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훌륭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공자가 “아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나쁜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나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까?”하고 거듭 물었습니다. 공자는 “아니다. 훌륭한 사람이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 나쁜 사람들이 그를 향해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결국 누가 인정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옳게 평가한다고 그 사람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바로 그 사람이 옳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붙잡히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편 1편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러분,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물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람이십니다. 하나님은 불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붙잡을 수 없지만 불이신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를 수 있습니다. 물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충만히 임할 수 있습니다. 바람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로잡아 하늘 삼층천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물이신 하나님, 불이신 하나님, 바람이신 하나님께 붙잡힐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깊히 묵상하십시오. 묵상은  단순한 명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 읽고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삶에 반복 적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읽고 이해하는 데서 그치면 우리는 율법박사나 바리새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삶에 반복 적용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군인 중에서도 특공대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똑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 훈련합니다. 지능이 부족하거나 재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수 없이 행동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악가가 어떤 여건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노래하기 위해서는 일만 번 이상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왜 우리가 반복해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왜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을 다시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합니까? 그것은 ‘의식적인 경지’를 넘어 ‘본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 앞에 본능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할 때 우리는 본능적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본능적인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복이 무엇입니까?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편에 기록된 복이 여러분 삶에 이뤄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리아가 몸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놀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천사가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이 내게 이뤄지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품고 “주의 종이오니 주의 말씀이 내게 이뤄지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사로잡힐 때 영광스런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전사로, 하나님의 천사로 살 수 있습니다.

■ 과거를 잊어라
사도바울은 이렇게 자신이 예수에게 붙잡힌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것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13~1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940년대에 ‘에드먼드 힐러리’라는 한 청년이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 등반에 도전하려다 실패했습니다. 그는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가며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산이여! 너는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란다. 내 기술도 힘도 장비도 경험도 자라날 게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너를 정복할 것이다.” 약 10년 후에 다시 에베레스트산에 도전한 이 청년은 다른 두 명의 산악인과 함께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실패란 감기와 같아서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문제는 ‘어떻게 실패를 딛고 일어서느냐’입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뒤에 있는 것은 잊으라’고 말합니다. 부끄러운 과거, 실패한 과거를 잊을 것을 권면합니다. 과거는 바뀌지 않지만 용서받을 수는 있습니다. 용서는 잘못된 과거에서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바울은 과거에 하나님의 대적자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사람들을 박해했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께 붙잡혔을 때 주님은 그의 과거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용서하셨습니다. 용서 받은 바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과거를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자신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많이 힘들었지. 괜찮다. 내가 너를 용서할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우리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저를 용서하신 것처럼 저 자신을 용서하겠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내 과거를 용서하신 주님! 주님 앞에 내 미래를 산 재물로 드립니다. 내 미래를 새롭게 이끌어 주십시오.” 여기서 ‘과거를 잊어라’는 말은 ‘망각하라’와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잊으려면 미래를 붙잡아야 합니다.

■ 미래를 향해 전진하라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참된 미래, 참된 가치, 참된 존재를 발견할 때 빛 앞에서 어둠이 물러가듯 과거는 사라집니다. 과거는 마약과 같습니다.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씁쓸하지만, 되씹을 수록 유익이 없습니다. 과거에 붙잡힐 수록 사람이 병듭니다. 과거를 잊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미래를 향해 전진하십시오.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미래는 믿음을 갖고 도전하는 사람이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합니다.
남유다의 히스기야왕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고 성전을 수리하고 이방의 산당들을 없앴습니다. 앗수르가 공격할 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죽음, 닫힌 미래 앞에서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 15년이나 생명을 연장했습니다. 그런데 말년에는 미래가 닫히는 상황에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제국이었던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하자 히스기야 왕은 마음이 높아졌습니다. 너무 자고한 나머지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이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높아진 히스기야를 징계하셨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사형선고를 당했던 날을 기억하고 닫힌 미래 앞에서 기도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환관으로 잡혀가든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하든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무책임한 말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된 것은 자신이 얻은 부와 명예와 평안함에 안주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참된 왕이 되었습니다. 노년의 때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룁니다. “하나님, 제게 있는 모든 것으로 성전을 짓기 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아, 너는 성전을 지을 인물이 못 된다. 네 손에는 피가 많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하고 응답하셨습니다. 이때 다윗이 화를 내며 따질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소원이 하나님 앞에 상달하지 않고 이루려는 일이 막혔지만, 하나님 앞에 계속 머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너는 안 되지만, 네 아들 솔로몬을 통해 그 성전을 받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다윗이 아닌 솔로몬의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가진 모든 권세와 능력과 지위로 아들의 미래를 준비합니다. 이것이 다윗과 히스기야 왕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어디까지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현실에 만족하며 자신이 얻은 선에서 적당히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과거를 잊으십시오. 과거에 붙잡히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위해 전진하십시오.”하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온전한 자는 ‘완전한 사람’이 아닌 ‘원리를 붙잡은 사람’을 일컫습니다. 온전한 자, 원리를 붙잡은 사람은 푯대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삶이 조금 잘못됐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궤도 수정’을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붙잡으셨다면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의 꿈’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이 있습니다. 전진하십시오.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희를 사로잡아
이곳에 앉히시니 감사합니다.
주의 말씀 듣게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를 통해
주님의 꿈을 이루실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그치지 않고
자손들의 생애까지 보게 하시고
우리 가정에서 멈추지 않고 주님이 주신
세계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믿음과 기도와 말씀으로 미래를 열고
진정한 푯대를 향해 전진하는
예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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