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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마음 / 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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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마음 / 빌립보서 2장 1~11절 

빌립보서 2장 1~11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의 행동 지침입니다. 공동체에서 성도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인 동시에 행동 양식입니다. 성도들의 관계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어느 집사님의 간증을 듣고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십 중반을 넘긴 집사님이 어느 날 큐티 시간을 가졌습니다. 말씀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였습니다. 집사님은 평소에 이 말씀을 보면서 그냥 지나쳤지만 그 날은 달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집사까지 되었는데 한 일이 없지 않은가!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수모와 고초를 당하셨는데,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집사님은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다시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자신의 십자가가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부인’이란 말이 뇌리를 때렸습니다. ‘부인! 아내! 와이프! 그렇다. 나의 십자가는 다른 게 아니라 아내구나’라고 생각하고 평생 자신의 아내를 짊어지고 살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 겸손한 마음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결혼합니다. 데이트할 때 느꼈던 사랑과 기쁨 그리고 친밀함이 결혼 후에도 계속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결혼 생활이 참 힘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혼뿐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만나 함께 살아가는 삶에는 항상 그와 같은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먼저 환상기입니다. 보기만 해도 좋고 가슴이 설레는 기간입니다. 환상기가 지나면 환멸기가 찾아옵니다. 기나긴 환멸기를 통과하면서 적응기를 맞습니다. 이때는 적당히 맞춰가며 지내는 기간입니다. 이윽고 서로에게 익숙해집니다.
부부는 서로 선택했기 때문에 취소 불능 관계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고 생명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부부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가족은 결코 헤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적당히 지내거나 마음에서 이별하고 살아서도 안 되는 관계입니다. 하나가 돼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절대 관계입니다. 아내의 존재에서 나의 십자가를 발견하고 수용할 때 아내의 어떠한 모습에도 상관없이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인 동시에 구원이요, 죽음인 동시에 생명이며, 죄와 죽음을 이기는 참된 사랑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만날 때 인간적인 부족함을 넘어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부부만이 아니라 성도들도 십자가 안에서 만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의 관계를 가족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형제와 자매로 만났습니다. 서로 선택하거나 포기하는 관계로 만난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하늘이 맺어 준 공동체 관계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만났으면 항상 하나를 이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1, 2절 말씀에서 간절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이 말씀은 특히 빌립보교회의 상황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린 여자, 루디아라고 하는 상류층 가정, 로마 시민권을 가진 군인과 간수 등이 빌립보교회 초기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세 가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낮춰 겸손히 주님께 드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명성은 재물 이상의 큰 유혹입니다. 칭찬, 존경, 인정받는 것은 행복하고 좋은 일입니다. 

■ 겸손은 거룩한 부끄러움
월드컵 축구 경기는 재방송으로 봐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만이 화면에 비칩니다. 황선홍, 안정환 선수가 주로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방송국에 전화해 물어 봤답니다. 방송 관계자는 “그러고 싶은데 다른 선수들은 내보낼 자료가 없습니다. 그나마 두 선수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해 줍니다.” 자신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더욱 유명해지는 세상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를 선전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세상의 방법이라면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방법과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은 자신을 낮춰서 나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춰라.” 교회에서 높아지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자리에서 오히려 당황하고 슬퍼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이유는 그들의 마음 상태가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하는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겸손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움의 정서가 잘 발달되어 있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신경정신과 의사 이호영 박사님에 의하면 부끄러움에 대한 표현이 영어에는 7, 8개밖에 되지 않지만 한국어는 52개나 된다고 합니다.
부끄러움이란 자신이 객관적으로 외부에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감정도 부끄러움입니다. 부끄러움은 수치심과 연결되는 감정이지만 건강한 부끄러움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기의 한계를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거룩한 부끄러움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타내는 용기와 자신감이 자신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도 없고 감춰지지도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십자가의 은총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게 겸손이요, 진정한 능력입니다. 

■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게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행위로 인함이 아니라 마음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찾으시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 중심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기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살찐 소를 잡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상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부족한 삶을 살았지만, 마음의 중심이 아름다워 하나님께 큰 칭찬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실수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잘못으로 놉에서 여러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그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아 죽게 한 장본인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이십 번 이상 용서받기 어려운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회개한 것으로 그친 게 아니라 징벌을 받을 때마다 인내하며 실패를 통해 교훈을 배웠습니다. 영혼이 성숙해 갔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일정하게 지켰던 사람입니다. 목동이었을 때도, 왕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중심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갖는 겸손이요, 거룩한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믿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우나 좌로 치우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있으라고 이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 스스로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십자가를 위해 사셨습니다. 순간마다 십자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며 사람과 비교해 낮출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셨습니다. 

■ 겸손할 때 하나되는 공동체
둘째, 허영과 다툼을 버리고 자신을 겸손히 낮출 때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됩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으로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보는 사랑의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 보통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당시에 제자들은 대개 모난 상태에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 한 채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베드로는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베드로의 가장 낮은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서워 말라. 이 후로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가장 연약하고 비천한 상태에서 그의 장점을 보시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상대의 못난 모습을 보게 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한 팀을 이뤄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못난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상대를 사랑할 수 있으며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들을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다른 사람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의 좋은 점이 보일 것입니다. 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교회 공동체는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중세에 어느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도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만 다툼이 일어나 한사람씩 떠나게 되었습니다. 최후로 다섯 명이 남게 되었습니다. 수도원 원장과 나머지 네 사람인데 그들은 마지막까지 가장 극렬하게 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는 수도원 원장이 견딜 수 없어서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을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선지자는 묘안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비밀스럽게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누가 찾아와 원장님은 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라는 겁니다. “남아 있는 형제 중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코방귀를 뀌던 형제들이 조금씩 생활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누가 예수님인지 찾으면서 다른 형제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형제는 원장이 예수님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장은 예수님처럼 대했습니다. 또 다른 형제는 자기와 같은 방을 쓰는 형제가 예수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형제가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도원에 남아 있는 형제들은 서로 예수님처럼 대하기 시작하자, 수도원의 분위기는 달라졌습니다.
어느 날 한 여행객이 지나가다가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여행객이 보니까 분명히 다섯 명이 있는데 꼭 여섯 명이 있는 것처럼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원장은 “나머지 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여행객은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고 그 후 수도원은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안에 이미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나와 함께 있는 형제와 자매 안에도 예수님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형제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공동체에 주는 지침은 4절 말씀에 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우리는 맡은 바 본분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그 모습에 축복하고 격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일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일을 소중하게 여길 때 자신의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예수님 마음을 품어라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져야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으시고 완전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인류에게 십자가가 가장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양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 곧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담당하셨습니다.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 보라.” 바울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따라 격려하고 도우라며 부탁하고 있습니다. 5~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끝까지 복종하는 일입니다. 낮추는 것은 나의 일이요, 높이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낮출 때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낮추는 만큼, 십자가를 지는 만큼 높여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한 몸이 되어 한 공동체를 이뤄 하늘의 영광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는 함께 살아갑니다.
나눌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겸손하게 하여 주시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짐으로써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늘의 영광과 크신 능력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나타나기를 소원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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