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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교제 (빌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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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교제" (본문 : 빌립보서 1장 1~11절) 

독수리는 먹이를 잡기 전에 높이 올라 전략적, 전술적 위치를 선점합니다. 시야를 확보하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지체 없이 내려 덮칩니다.

사도 바울은 독수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지역으로 가서 전략적인 위치에 거점을 확보한 후 열정과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합니다. 빌립보 지역은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첫째, 빌립보에 페니키아 시대까지 은과 금이 채굴된 광산이 있었습니다. 자연히 상업 도시로 자리 잡게 되었고 상거래가 왕성했던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둘째, 빌립보는 군사적인 요충지였습니다.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있어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빌립 왕이 도시를 건설하고 이름을 빌립보라 명명했습니다.
셋째,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흔히 식민지는 문화적?정치적 지배를 받는 지역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대는 의미가 조금 다른 군사적인 식민지를 말합니다. 로마는 넓은 영토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요충지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그곳에 로마 장병 3백여 명을 파견,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정치적, 행정적 특혜를 누렸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중요한 지역에 빌립보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핍박 문제로 빌립보를 떠나야 했습니다.

복음으로 하나된 '성도'
대개 사람들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집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람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아주 독특한 관계였습니다. 그들은 눈에서 멀어질 수록 더 많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갔을 때 빌립보 성도들은 선물을 보냈고, 또 고린도 지역으로 갔을 때도 작은 정성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일하면서 복음 전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에서 자비량 선교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는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을 기뻐하고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바울을 시중 들게 했습니다. 이런 긴밀한 관계에서 바울은 항상 빌립보 성도들에게 감사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몇 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성도들에 감사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바울을 돕기 위해 로마에 도착한 에바브로디도가 ‘향수병’에 걸렸습니다. 바울은 기도한 후 결정을 내렸습니다. 비록 자신은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 젊은 청년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고향으로 보내기로 하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를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도 작은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젊은이를 고향집으로 돌려보내는 바울의 넉넉함에 우리는 동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감동이 있는 사람입니다. 항상 자신이 올바른 방향에 서 있는지 점검하고 나아가기 원했던 사람입니다. 1,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헤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절 말씀은 빌립보서의 모든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면 빌립보서에서 말하려는 하늘 메시지의 핵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종’, ‘그리스도 안’, ‘성도’입니다. 감독과 집사는 ‘성도’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입니다. ‘거룩한 자들’, ‘구별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구별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요,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도들 즉 거룩한 무리들이 바르게 사는 삶의 자세는 종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죄의 노예에서 그리스도의 노예로
본문에서 ‘종’의 개념은 천하고 고역스러운 노예를 의미합니다. 당시 종들은 일정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로 모든 자유를 빼앗겨 버린 상태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가 되는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먼저, 아버지나 어머니가 노예인 자녀들로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입니다. 다음은 정복에 의해 노예가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자는 패배자를 노예로 삼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채를 변제하지 못해 노예가 되는 경우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배우지도 않은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죄를 본능적으로 짓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절시키지 않으면 삶을 죄인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항상 죄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선을 행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이것이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단적인 이유는 죄의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이라면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아주 위험하고 자만에 가득 찬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기로 결단했습니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말할 때는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노예는 개인적인 의지나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인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 수행하는 게 노예입니다. 만약 주인의 명령을 거절하면 죽임을 당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철저히 자신의 모든 의지를 내려놓고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맡기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주인의 기업에 동참하는 종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나 다윗과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서야 하고 말씀 앞에 철저히 순종해야 하는 대신, 하나님의 축복과 기업을 이어 받아 누리는 게 종의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제외하고, 자신을 본받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자신이 누리는 기쁨과 자유를 빌립보서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바로 빌립보 성도들입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실라가 이미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감옥에 갇혀 원망이나 불평도 아니하고 오히려 기도하고 찬미했을 때, 감옥의 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며 감옥에 지진이 일어난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건을 빌립보 성도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축복하고 그를 위해 에바브로디도를 보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알기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치 치하 시절, 독일 교회들은 나치 정권에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나치 정권에 의해 무너졌지만 ‘본 훼퍼’라는 목회자는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나치들이 그를 감옥에 잡아넣었습니다. 훼퍼는 감옥에서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감옥에서 비로소 자유를 깨닫게 되었다. 자유란 무엇에서부터 자유가 아니라, 무엇에로의 자유만 있을 뿐이다.” 고통, 억압, 핍박에서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했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는 진정 자유했고 감옥조차 자신의 믿음과 이상과 자유와 영원한 삶을 가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복음의 교제로 세워진 빌립보교회
인사말을 마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사랑을 표현합니다. 사랑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시작해 행동으로 완성합니다. 독신으로 감옥에 끌려온 바울은 거침없이 온갖 사랑의 언어로 빌립보 성도들에게 고백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과거 사랑의 교제가 무엇인지 3~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과거에 복음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또한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 속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교제는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해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세 분류의 교인들에 의해 형성됐습니다. 처음에 아시아에서 전도하기 원했지만, 성령님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 와서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곧 마게도냐와 빌립보 지방에 가게 됩니다. 바울이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자주 장수 루디아입니다. 고대 시대에 자주는 값비싼 물건이었고 루디아는 부유한 상인이었습니다. 바울은 루디아를 만나 복음을 증거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런 와중에 길거리에서 귀신들리고 점을 치는 한 여자가 바울을 보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람, 사람들을 구원하실 이여!’라고 외쳤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고 바울은 마음이 괴로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아 줍니다. 여인이 귀신 들렸을 때 점을 봐 알아맞혔지만, 귀신이 나가자 여인은 신통력을 잃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익을 얻지 못한 주인이 바울을 고소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두 번째로 얻은 빌립보 성도는 노예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고 천한 계층이 노예였습니다. 세 번째 성도는 간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 안에서 찬양하며 기도할 때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며 터가 흔들렸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고 로마 시민이며 군인이었던 간수는 책임을 피할 수 없어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자결하지 말라.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그대로 있다”며 안심시켜 줍니다. 간수가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람과 일치와 연합 이룬 공동체
로마 군인 가족, 상류층 루디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가장 하류층인 노예가 빌립보 교회의 성도가 되어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십자가, 복음이 아니면 결코 만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아마 서로 상종도 하지 않았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축복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죄는 분리하고 단절하며 편견을 갖고 사람을 보게 합니다. 복음은 모든 것을 넘어 사랑과 일치와 연합을 이루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교제입니다. 7~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랑의 능력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보면서 ‘정말 사랑의 교회구나, 성령의 교회구나!’하고 생각합니다. 하 목사님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안식년 기간에도 틈틈이 교회를 찾아 교회 지상 5층에서 지하 4층까지 한 구석도 빠짐없이 둘러보시고 점검하고 다니십니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우리에게 진정 사랑의 능력이 있는지, 사랑을 행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9~11절 말씀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랑이 더욱 커지도록 기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식에 풍성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사랑으로 완성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지식에 이르게 합니다. 제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내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을 얻게 되면서 아내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집이 어딘지, 어른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끊임없이 물어봤습니다. 그처럼 사랑은 온전한 지식에 이르게 하는 도구요, 통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사랑으로 완전한 지식에 이르고 그 사랑의 지식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다섯 손가락 기도’
바울은 육체로 서로 떨어져 있지만, 영적으로 교통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누렸던 가장 큰 힘입니다. 사랑의 교제를 가능케 했던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말로 하는 것이지만, 행동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지만, 손으로 실천되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조지 레인 드로포드’의 저서 <비범한 일>에서 기도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간호사는 불평 불만만 늘어놓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호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간호사는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삶이 뒤바뀌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다섯 손가락 기도’를 했습니다. 첫 번째 엄지는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친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가족의 이름,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 검지는 주로 상대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질문하면 대답하는 사람이 선생들입니다. 두 번째 손가락을 붙잡고 가르치는 교사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세 번째 손가락은 가장 크고 높습니다.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네 번째 약지입니다. 피아노 연주자도 네 번째 손가락이 가장 약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빈민,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다섯 번째 가장 작은 새끼손가락입니다. 바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입술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손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교제는 온전하고 믿음의 삶은 완성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종으로 ‘입술과 손의 기도’를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축복하시고
한 자리에 모여 예배하게
하시는 은혜 감사 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를 사랑하고
또 그들이 바울을 사랑한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입술로, 손으로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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