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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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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본문: 요 5장 1~9절)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서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곧 가르치는 것과 복음 전파 그리고 치유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특히 4복음서는 20% 가량 병 고치는 기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약자를 돌보시며, 소외된 자의 편에 서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인간의 본능적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영적 정신적인 문제만 해결하시는 게 아니라,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질병도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깊고 넓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크고 위대한 사랑보다 상처받고, 병들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 긍휼과 치유와 애정을 보이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 즉 예수님의 사랑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사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게 첫 번째 기적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말씀으로 낫게 하신 게 두 번째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기적을 만나 봅니다. 병에 걸린 지 38년이나 돼 더 이상 희망도 없는 환자를 고쳐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병 고치시는 일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병을 고치는 원리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어떤 죽음, 절망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죽은 자에게 전달돼 살아나며, 귀신이 나가고 병을 낫게 하는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영적 권위, 생명의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각 복음서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때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마가복음은 ‘곧’, ‘바로’, ‘즉시’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은 ‘때가 되어’라는 독특한 표현을 씁니다. 요한복음은 ‘그 후에’라는 단어를 자주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에 7번, 요한계시록에 9번 적용한 것을 보면 사도 요한이 즐겨 쓰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1절 말씀에서도 ‘그 후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한 가지 특징은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는데,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신 때는 언제나 명절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큰 명절 세 가지는 유월절, 초림절, 오순절입니다. 본문 말씀은 아마 세 절기 중 하나일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사역하시고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십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 양의 문
예루살렘 성에는 여러 개 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인 ‘양의 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양의 문 곁에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놀라운 상황을 목격하십니다. 2,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 성 베데스다 연못가에 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은 구약 종교를 대표하는 그림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중에 양떼들이 드나드는 ‘양의 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부서져 느헤미야 선지자가 재건축할 때 가장 먼저 수축한 것이 양의 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나누어 성문들을 수축하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게 양의 문입니다. 양의 문에서 시작해 끝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여러 번 양의 문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양의 문이다’,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다 도적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신 말씀으로 양의 문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병자들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는 ‘긍휼’, ‘자비’, ‘솟구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베데스다 연못물을 애용했습니다. 아마 연못은 현대적으로 생각하면 간헐천 같은 것입니다. 가끔 한번씩 물이 솟구쳐 오르는데 사람들은 천사가 내려와 물이 솟구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이 오를 때 곧바로 가장 먼저 물에 뛰어든 사람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전설입니다. 왜냐하면 들어가서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거기 행각 다섯 개가 있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각 다섯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세오경일 수도 있습니다. 다섯이라는 히브리 숫자는 자비, 긍휼이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요셉은 형제들 중에 특별히 베냐민을 사랑했는데 그에게 음식을 줄 때 다섯 배를 더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때는 보리떡이 다섯 개입니다. 다섯은 사랑과 긍휼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또 행각 다섯은 구약 종교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베데스다 못가의 많은 병자들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종류의 불치병 환자들도 있었을 겁니다. 많은 환자들로 인해 주위는 지저분하고 더럽고 악취도 심했을 겁니다. 그리고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을 겁니다. 왜 그들이 모여 있을까요? 4절 말씀에 나타난 전설 때문입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병자들은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모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익이 있고 돈이 된다면 아우성을 치고 몰려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종교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치 ‘율법을 행하면 구원받을 것이다, 행위로 구원받을 것이다, 제사를 통한 예배로 구원받을 것이다’는 생각으로 종교적인 행위를 일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깁니다.

■ 38년 된 병자에게 주목하시는 에수님
그런데 이런 허황된 꿈에서도 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은 성경 말씀과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스로 돕지 않아도, 아무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병이 깊은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5, 6절 말씀을 보십시오.

거기 삼십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병자들의 처절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연못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탓으로 돌리는 38년 된 병자에게 초점을 맞췄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을 보시는 것 같지만, 자신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도 없고 삶에 의지도 없는 38년 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런 질문에 병자는 신세 타령으로 대답합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참으로 슬프고 애달픈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희망을 안고 신세 타령하는 이름 모를 38년 된 병자, 가족도 버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버린 이 병자에게 예수님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경쟁에서 낙오한 병자는 하늘만 쳐다보고 자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련이 남아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미련 때문에 직장을 떠나지, 일을 버리지 못하고 끝자락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현상일까요? 여기서 배울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 구약종교, 해답 없는목마름
구원을 갈망하는 구약 종교 현상입니다. 구약 종교는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습니다. 율법은 있으나 해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예루살렘 성전, 제사 방법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에 목숨을 걸고 구원받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 구원의 목마름이 너무 컸기 때문에 날마다 제사를 드리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나라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잘 살게 해 줄 수 있다’는 구호들로 가득합니다. 무너져 가는 교육, 도덕적 파탄, 빚 갚기 위해 다섯 명을 무참하게 죽이는 수심, 사회 양심의 벨트가 무너져 가는 현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우리 곁에는 북한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어도 고민, 되지 않아도 고민입니다. 누가 통일 비용을 댈 것입니까? 우리가 안 대면 또 어떻게 할 겁니까? 국내외 정세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가정으로 들어가 보면 그런 문제들은 산재해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중심의 구약 종교를 통해 배우는 것은 율법의 행위나 종교적인 행위로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기다리지만 해답 없는 목마름과 갈증만 되풀이할 뿐입니다. 인간의 선행, 노력, 철학, 종교, 환상으로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 인생의 변곡점
또 잘못된 환상은 구원을 만들지 못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 설득합니다. ‘누가 나를 던져주기만 하면 살텐데…’라는 잘못된 희망,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8, 9절에서 이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명쾌합니다. 38년 된 병자를 설득하지도, 설교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병자여! 일어나시오, 자리를 들고 걸으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확실하고 능력에 찬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세 가지 말로 구성돼 있습니다.
하나, 일어나라! 38년 동안 누워있던 사람에게 하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불가능한 가운데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자리는 38년 된 병자의 친구입니다. 테너 파바로티는 수건을 들고 다니며 노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형일 수도 있습니다. 병자는 38년 동안 자리를 끼고 살았습니다. 38년간 친구가 됐던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셋, 걸어라! 너의 과거, 상처, 불가능과 단절하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왕의 신하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아들이 죽게 된 신하에게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순간 나았습니다. ‘돌아가면 살 것이다’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에는 권위와 능력이 있습니다. ‘일어나 걸어라’고 하신 순간에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걸어라! 너를 38년 동안 묶고 있던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무릇 나를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나는 부활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이 오늘 여러분의 가슴속에 나팔소리처럼 울려 퍼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이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양심이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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