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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교와 동역 / 고전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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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4-9
하나님의 선교와 동역

여러 교우들의 기도와 성원에 힘입어 지난 6일부터 13일까지 7박 8일의 베트남 하노이 선교 탐사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녀왔습니다. 그 동안 기도로 도와주신 여러 교우들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36, 7도의 기온에 습도가 높아 육적으로 지치기 쉽고 영적으로도 눌리기 쉬운 현지상황이었지만 영육간에 강건한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세밀하신 인도하심을 절절히 체험한 뜻깊은 여정이었습니다.

이번 선교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고 한다면 그건 역시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깨달음입니다. 물론 새로운 건 아닙니다만은 다시 한번 '선교는 하나님,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역사구나'하는 것을 맛보았습니다. 출발 두 주 전부터 함께 가기로 한 두 교회의 팀원 8명이 저희 교회에서 몇 차례 예비모임을 가졌습니다. 수요일 삼일예배와 주일 오후 예배 후에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또 그곳 현지 실정도 파악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도 챙기면서 준비모임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저 기도로,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 가셔서 준비해 주시기를 기원하며, 비록 우리는 부족할지라도 우리의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장도에 올랐었습니다. 그렇게 출발해서 그곳에 한 주간 머무는 동안 하루 하루, 시간 시간 적절하고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회 헌신예배로 드리는 오후 예배 시간에 사진과 함께 구체적인 선교보고를 드리겠습니다만은 하나님이 왜 이번에 우리에게 그곳을 향한 마음을 주셔서 우리로 하나되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여정이었습니다.
이번 선교여행에서 하나님은 우리교회와 구미항곡교회, 구미시민교회 그리고 서울 신림동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함께 연합하여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안드레 남선교회 회장인 서장로님과 제가 갔고, 항곡교회에서는 김목사님과 아예 '동남아선교회'라고 이름을 바꾼 남선교회 회원 4명이 갔고, 구미시민교회에서 청년 한 명이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 현지에 도착해보니 같은 일정으로 단기선교계획을 갖고 떠난 서울 아름다운 교회 청년 여덟명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 네 교회가 현지 인터콥 간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한 주간의 선교 사역에 들어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교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단체나 어느 개교회나 어느 개인이 선교의 주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로서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불러 이루어가시는 생명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더욱 분명히 확신케 해 주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올바른 선교관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그 선교 사역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그 땅은 이러한 실패를 맛본 땅이었습니다. 지금 베트남의 기독교 점유율은 전인구의 0.8%로 채 1%가 되질 않습니다. 8천만 인구 가운데 80만도 되지 않습니다. 한 30만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남한이 4천만 인구 가운데 천만이 넘는 25%의 점유율이라고 볼 때 얼마나 미약한 현실입니까? 불교 60%, 이런저런 혼합종교 25%, 천주교 9%, 유교 5%에 비하면 정말 새발의 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베트남 선교역사가 이제 걸음마 수준에 있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사실 베트남 선교역사는 우리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16세기 중반에 기독교를 접했고 1911년 네명의 선교사가 다낭에 도착해서 선교한 것이 베트남 선교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왜 그 오랜 선교역사 속에서 이렇게 복음의 불모지가 되어 있느냐 하면 그건 바로 '하나님의 선교'를 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은 1859년부터 100여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프랑스 출신 선교사들의 사역이 두드러졌는데 문제는 그들의 선교 사역이 순수한 기독교적 사역이 아니다 보니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식민 통치'라는 함수로 정의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라 '프랑스 식민 통치의 앞잡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기독교가 저들이 식민통치를 구현해 가는데 있어 하나의 수단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고 그러한 정서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현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의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동안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마다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종이 여기 있습니다. 종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종을 적절히 사용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사를 부어주사 적절히 써 주옵소서. 종이 섬기는 제단에 선교의 문이 더욱 활짝 열리도록 보여주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소서!...' '내가, 또 우리 교회가 뭘 하겠다'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그분의 역사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로 열심이 지나쳐 마치 내가, 특정선교단체가, 특정 교회가, 특정한 사람이 선교의 주체인 것처럼 착각할 때 거기선 결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교란 하나님이 주도해 나가시는 것이기에 철저한 비움과 간절한 기다림과 온전한 겸손이 선교에 임하는 부름받은 자들이 필히 갖추어야할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느니라..." 복음의 사역자가 가슴 깊이 새겨야할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창설자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심는 수고만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거기에 잘 자라도록 물을 주는 수고만을 했다고 말합니다. 각자가 한 일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각자의 사역의 한계를 분명히 밝힙니다. 한 사람이 심기도 하고 물도 주고 하는 여러 가지 일을 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아볼로도 그리고 그 교회를 세운 자기도 다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 한 부분만을 감당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오로지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선언합니다. 결정적인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 역사를 감당해 나갈 때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봉사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섬김에 있어 내가 다 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분만 알고 부분적인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임을 고백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심기만 하는 것이요, 물만 주는 겁니다. 또 그것으로 족한 겁니다. 왜냐하면 자라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하노이에 가 보고 발견한 고무적인 현상은 그곳에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기독교 점유율이 최하위지만 성장률은 최고였습니다. 전체 종교의 90%를 차지하는 불교, 유교, 기타 무속적 혼합종교들은 더 이상 성장하고 있지 않은 대신에 천주교가 6%가 개신교가 그 곱에 해당하는 13%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의 점유율은 낮지만 그 어떤 종교의 성장률보다도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곧 앞으로 생명의 복음이 그곳에 더욱 퍼져간다는 희망적 조짐이 아닐 수 없는데 그 근거 중의 하나가 그 어느 곳보다도 그곳 선교사들 간의 협력과 화합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오전엔 황자교회라고 불리우는 하노이 현지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신적 존재와도 같은 국부 호치민 묘와 그의 고택과 광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하노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 가정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찬양과 경배를 갖는 곳엘 갔었습니다. 이미 수요일날 그곳 지하교회의 리더들을 성경공부시키면서 미리 설교 부탁을 받았었기에 항곡교회 김목사님을 비롯하여 우리 일행 네 명과 함께 갔었는데 모두 여덟 선교사 가정의 가족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교단이 서로 다른 목사들도 모였고 개중엔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도 있었고, NGO 사회봉사 사역자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파송된 사람, 호주 선교단체인 웩에서 파송된 사람, 인터콥에서 파송된 사람 등등 다양한 사명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모두 20여명의 선교사 가족들이 마치 로마 시대의 초대교회가 그러했듯이 대문과 현관문을 걸어잠그고는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찬양과 경배, 합심기도 그리고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이런 저런 대화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한 회원은 마지막 평가회에서 어떤 시간이 가장 좋았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그 시간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대다수의 선교지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중국, 방글라데시 등등 많은 선교지에서는 교단끼리 서로 반목하고 경쟁하여 교인을 뺏고 빼앗기는 사태가 야기되지만 여긴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교'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그분 앞에 부름받은 종들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로지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곳에서 그분이 주신 은사를 따라 순종함으로 쓰임받으면 되는 겁니다. 심으라면 심고, 물을 주라면 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전체적인 조율을 통해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을 그곳에 자라게 하시고 당신의 몸된 교회가 서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베트남 하노이의 현실만으로 끝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선교 현장, 우리의 봉사 현장에서도 일어나야할 역사입니다. 우리 또한 부지런히 심고 또 열심히 물을 주어야 합니다. 그건 우리 부름받은 자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수고를 통하여 자라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동역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부름받은 자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심고 물을 뿌려야 합니다.
그러나 심는다고 다 사는 게 아니고, 물을 준다고 다 자라는 게 아닙니다. 결국 살게 하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건 뭘 말하는 겁니까? 살고 죽는 게 나한테 달렸다고 한다면 그 부담이 너무도 큽니다. 때로는 절망하기 쉽고 좌절하기 쉽습니다. 잘 심고 잘 돌봐도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부담을 우리에게 짐지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살고 죽는 게 우리 몫이라면 또 반대로 자고하고 교만하기 쉬운 게 인간입니다. 내가 살렸다며 우쭐대고 내 열매라고 과시한다면 그 또한 바람직한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그와 같은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눈에 보이는 사역에 매어 파당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누구는 '바울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누구는 '아볼로가 최고'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최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다 아무 것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님만 최고'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사도들을 인정하려 들지 않던 자들로 그 어느 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은 3절 이하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가 주님의 보내심과 채우심을 따라 저희에게 보내져서 저들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부분적으로 쓰여진 자들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선교와 봉사의 전제'입니다.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이 사실을 우리는 그 어디 자리나 순간에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내가 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하시게 해서 내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힘입어 그분이 하라는 만큼만 감당하는 겁니다. 엄격히 말하면 그건 우리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입니다.

그럼 바울과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아닌 걸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분과 더불어 일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4;1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바울이 없었다면 고린도 교인들을 믿음을 갖질 못했습니다. 아볼로가 없었다면 고린도 교인들은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갖질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각각 은사를 주셔서 저들로 하여금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하고 또 믿음의 지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제가 이번에 베트남에서 본 희망은 바로 그곳에는 이 동역자 의식이 있더라는 겁니다. 어떤 이는 목회 사역으로, 어떤 이는 전문인 사역으로, 어떤 이는 NGO 사역으로 각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섬김의 도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목회자의 공적 선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발각되면 바로 추방입니다. 그래서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나 NGO 사역자들이 많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일을 하면서 실제로는 선교활동을 하는 동역자들입니다.
저는 그곳에 다녀오면서 우리 교회에서도 목회 사역이든, 전문인 사역이든, NGO 사회봉사 사역이든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할 수 있는 은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꼭 목사가 아니라도 자기 전공을 살려서 그곳에 가서 전문인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 가운데 이런 꿈과 비전을 품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베트남에는 54개 소수종족이 있습니다. 비엣족이 85%정도를 차지해서 비엣트남이라고 부르지만 54개의 소수 종족이 특히 북부 하노이 근방에 살고 있는데 이들은 그야말로 미전도종족으로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을 향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우리 교회에서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수도 하노이도 할 일이 너무 많은 땅이었습니다.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공공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지상교회가 있긴 하지만 여러 가지 활동의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반면 Underground Church, Home Church라고 불리우는 지하교회들에서는 제자와 리더 양육이 이루어지며 베트남 선교의 그루터기들이 길러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생명의 사역을 누가 할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그분 앞에 부름받아 주시는 은사를 따라 심고 물을 주는 역사를 감당할 우리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꾸어야할 하나님의 밭과 우리가 돌보아야할 하나님의 집은 너무도 많습니다. 이 하나님의 밭을 가꾸고 하나님의 집을 돌보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심고 물주는 우리가 되십시다. 거기에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평생 이땅에서 애쓰고 살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아무런 상급이 없다면 그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이 땅에서 넉넉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선교사 모임에 좀 낮설어하는 지긋한 연세의 선교사 한 분이 계셔서 물었더니 오랫동안 한국에서 교사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모든 걸 정리하고 선교사로 왔다는 겁니다. 오늘 처음 이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라 좀 어색하다며 좀 멋쩍어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고 있는 겁니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고 소망이 무엇입니까?...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앞서지도 말고, 뒤쳐지지도 말고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는 하나님 나라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아름답고 보람된 인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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