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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나의 포도원을 살펴보시면 / 잠 24: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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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나의 포도원을 살펴보시면"
잠언 24:30-34절 "

7월은 본교회 창립을 기리는 뜻깊은 달입니다. 1년 중 가장 왕성한 성장이 이루어지는 때, 그래서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 이 7월에 세워진 우리 교회는 지난 22년 동안 하나님의 에벤에셀의 은총 속에서 오늘을 맞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분의 몸된 교회를 섬긴 여러 믿음의 일군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성령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일구어낸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세워가는 하늘나라 신앙공동체를 '포도원'에 비유하시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그렇지만 이사야 선지의 글에서도 당신의 부름받은 선민 신앙공동체를 '포도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요15장의 그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에서 하나님을 포도원 주인으로 소개하고 당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우리를 포도나무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는 5장에서 포도원에 대해 슬픈 만가를 부르는데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포도원을 위해 더할 것 없는 투자를 해놓으시고 좋은 포도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27:2절 이하에서는 그런 만가가 아니라 장차 당신께서 포도원지기가 되어 가꾸는 포도원의 희망찬 모습, 뿌리가 박히고 움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미래를 노래하기도 합니다.

교회 창립 22주년을 한 주 앞둔 오늘 우리는 '우리의 포도원', 그리고 '나의 포도원'을 한번 둘러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창립일이란 포도원의 주인되신 하나님 앞에서 포도원의 현 모습을 진단하고 점검하고 전망할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의 포도원'인 이 영락제단을 주님이 둘러보시곤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그리고 그 안에 내게 맡겨진 '나의 포도원'을 살펴 보시고 어떤 노래를 부르실까요?... 만가일까, 찬가일까?... 기뻐하실까, 슬퍼하실까?... 유쾌해 하실까, 불쾌해 하실까?... 이런 설레임을 갖는 것이 청지기의 합당한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 포도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혜자가 길을 오가며 눈이 자주 가는 한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눈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평범하지가 않다는 것인데 역시 그 밭은 평범하지 않은 밭이었습니다. 그 포도원이 저의 눈길을 끄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지혜자가 오가며 보게되는 그 밭의 상태를 31절은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가꾸지 않아 황폐화되어가고 있는 포도원입니다. 그 포도원을 보고 지혜자는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 교훈을 받습니다. 지혜자는 그 망가져가는 포도원의 원인을 그 밭을 경작하는 농부에게서 찾습니다. 한마디로 그 농부에게는 두 가지 결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게으름과 무지였습니다. 지혜도 없었는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황폐화된 포도밭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포도원'이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되십니까? 포도원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부름을 받은 사명자에게 주신 섬김의 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움받은 자는 누구나 다 '자기의 포도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 2장에서 그리스도인을 '군인과 운동선수와 농부'에 비유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저마다 그분 앞에 '포도원'을 분양받은 청지기들인 것입니다.
우리 오태동 교회 부지에 과수원이 있습니다. 올봄에 비전21위원회에서 배나무들을 희망하는 가정과 구역들에게 각각 몇 그루씩 분양을 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에 올랐더니 배가 제법 열었습니다. 그런데 밭들이 가지가지입니다. 정성껏 봉지를 씌워주고 주위의 풀을 솎아준 밭도 있는가 하면 거의 손이 안간 그런 밭도 있었습니다. 이제 한 두 달 후면 그 열매들이 주인의 정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태 과수원만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역자로, 당회원으로, 항존직으로, 집사로, 구역장으로, 부장으로, 회장으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선교회원으로 각기 그 맡겨놓으신 은사를 따라 포도원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제 한해의 절반을 살아온 지금 내 포도원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입니다. 뿌리를 잘 내려 움이 돋고 꽃이 피어 이제 알찬 열매를 예고하는 풍성한 포도원인지, 아니면 이 지혜자가 오고가며 보았던 그런 황폐한 포도원인지를 점검해 보아야할 때를 맞고 있는 겁니다.

지혜자가 본 이 포도원은 '가시덤불이 퍼졌고 잡초가 우거지고 돌담도 무너져버린 상태'였습니다. 지혜자는 그러한 포도원의 모습에서 농부의 게으름과 무지를 봅니다. 그 밭이 그렇게 된 것은 바로 농부의 게으름과 무지가 원인이라는 겁니다. 부지런하지 않았고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일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성실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그는 좋은 일군이 될 수 있었을텐데 그래서 참 기분좋은 포도원을 경작할 수 있었을텐데 이 두 가지가 없어 결국은 밭을 망치고 만 것입니다.
사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부지런함과 직결되는 일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안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부지런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만이 아니라 거기다 교회라는 또 하나의 삶의 자리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1/2은 더 부지런해야할 자입니다. 이른 새벽에 기도회에 나와 기도하고 늦은 밤 기도회에 참여하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없으면 제대로 신앙생활하기 어렵습니다. 예수, 아무나 믿는 게 아닙니다.

물론 비그리스도인들도 부지런합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부지런함의 동기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부지런함이란 즐거움과 관계가 있습니다. 즐거우면 부지런해지고 즐겁지 않으면 게을러지는 겁니다. 물론 건강한 부지런함은 아니지만 밤새도록 노름하는 사람들, 그게 즐거우니깐 하는 겁니다. 시도 때도 없이 자기 건강 잃어가는 것도 모르고 일하는 사람, 돈버는 재미로 하는 겁니다. 즐거움과 재미를 맛보지 않으면 결코 부지런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회 나오세요, 예배 참석하세요, 봉사하세요...' 그거 말로 해서 될 게 아닙니다. 기도의 즐거움을 아는 자는 나올 것이고 기도의 즐거움을 모르는 자는 안나올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맛을 아는 사람은 나올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안나올 겁니다. 봉사를 통해 그 땀흘림의 시원함과 보람을 아는 자는 봉사할 것이고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은 안할 겁니다.
코를 꿸 수도 없는 일이고 강제로 등떠밀 수도 없는 겁니다. 그 맛을 알면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안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경험해서 아시겠지만 이게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게 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기다림의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맛을 알면 새벽에도 나오는 거고 한밤중에도 나오는 겁니다. 말씀의 맛을 알면 주일 낮에도 오후에도,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그리고 새벽에도 나오는 겁니다. 사실 공적 모임만 참여하면 신앙생활 절로 됩니다. 그 말씀만으로 정말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런데 그걸 못합니다. 왜? 즐거움을 못느끼니깐, 재미를 못느끼니깐 우물이 있어도 떠먹지를 못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잠언서에 보면 똑같은 말씀이 두 군데 반복되고 있는데 잠19:24절과 잠26:15절입니다. 한번 찾아보십시오. 뭐라고 하는가...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
우리 교회 이름가운데 즐거울 '락(樂)'자가 들어있습니다. 원래 '영락(永樂)'이란 말은 서울 중구에 있는 동리 이름을 딴 것입니다. 서울 영락교회가 있는 자리가 옛날에 영락동이었습니다.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 동리가 '홍등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그 말은 본디 좋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영락교회가 들어서면서 동네가 바꿔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의미도 좋은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영락동이 쾌락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자리로 바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포도원 농사를 잘 지으려면 그 농삿일이 즐거워야 됩니다. 그런데 엉뚱한 것을 즐기고는 그 일에는 무심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포도원을 떠나는 사람이 없지않은 겁니다.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는 인생의 즐거움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인생에는 '유익한 즐거움'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즐거움'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무엇을 즐거워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은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익한 즐거움의 첫 번째로 '음악을 즐기는 것'을 듭니다. 공자 자신도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지는데 박자와 화음과 가락이 어우러져서 이루어내는 조화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익한 즐거움으로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말하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칭찬하는 즐거움입니다. 남의 장점을 보고 남의 장점을 얘기하면 그 일 자체가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남의 장점을 즐거워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적지 않습니다. 남의 장점을 말하는 것도 싫고 듣는 것도 싫어합니다. 대신 질투하고 왠지 부아가 치밀어서는 심통을 부리고 불평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어 그 친구와 함께 하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좋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라는 겁니다.
그러나 인생에 유익하지 못한 즐거움, 삶을 해롭게 하는 즐거움도 지적합니다. 그 첫째를 공자는 '제 멋대로 하는 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 될대로 되라, 자기 멋대로 사는 겁니다. 이건 결코 참된 즐거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순간적인 쾌감을 맛볼런지는 몰라도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게으름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결코 인생에 유익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자고 싶은대로 자고, 좀더 눕고 싶은 대로 누워 보십시오. 그 인생이 어떻게 되나... 결국은 후회스런 인생이 되고 마는 겁니다. 게으름은 몸에도 나쁘고, 정신에도 나쁘고, 정서에도 나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포도원 농부가 포도원을 망친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 게으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게으름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병이요 또 불신앙이라고 단언합니다.

이 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요즈음 베스트 셀러 가운데 피에르 쌍소와 버트란트 러쎌이 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이 있지 않느냐고... 혹자는 그 책 제목만 보고 '게으른 게 좋은거다'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는데 그 책 내용은 그런 게 아닙니다. 러셀은 '하루 24시간 중 8시간씩 일하지 말고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고 나머지 시간을 놀되 여흥이 아닌 고급문화를 즐기자'고 주장합니다. 일도 아닌 일들을 눈치나 보며 붙잡고 앉아 8시간 채우고 나머지 시간은 기다렸다는듯이 주색잡기에 빠져 살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해서 8시간에 할 일을 4시간에 끝내고 나머지 시간들은 예술을 즐기고 건전한 운동을 하는 등의 고급문화를 즐기자는 겁니다. 그게 그가 말하는 게으름입니다. 저는 이 러셀의 주장에 100% 동의합니다. 이게 바로 '주5일 근무제'의 정신입니다. 엿새 할 일을 닷새에 하니 더 부지런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농부의 게으름은 그런 게 아닙니다. 이 게으름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첫째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습니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말입니다. 이게 악한 겁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게으름은 바로 악함의 이웃사촌입니다. 함께 가는 겁니다. 악하기에 게을러지는 것이고 게으르기에 악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처음엔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이겠지만 나중에는 하려고 해도 못합니다. 안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봉사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앞장 서서 해야 합니다.
목회하면서 안타까운 것은 때때로 교우들이 봉사의 손길을 놓아버린다는 겁니다. 이거 참 안타깝습니다. 더 많은 일을 사모하는 게 더 많은 하나님의 은사를 얻는 지름길인데 오히려 자꾸 손을 놓습니다. 그리고는 그게 지혜로운 듯이 여기고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제 꾀에 넘어가는 겁니다. 일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게을러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알 수 있는 것을 배우지 않아서' 게을러집니다. 쉽게 말하면 '공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배우고자 하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인데도 알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이 없었기에 결국 무지해지고 마지막에는 할 수 없는 무능자가 되고 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포도원 농부는 게을렀기에 무지해진 자였습니다. 영농기술을 배웠으면 그 포도원이 그렇게 황폐화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배우기를 멈췄습니다. 그래서 더 기름지고 풍성한 포도원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겁니다. 그래서 바보가 된 겁니다.
게으름에 대한 대가가 이렇습니다. 왜 젊었을 때 세월을 허송하지 말라는 겁니까? 게으름이 가져오는 결과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공부할 때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야할 때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안그러면 후회막급한 내일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게으름이란 자꾸 지연시키는 겁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겁니다. 오늘 할 일을 오늘 끝내야 내일이 다시 기회로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할 일을 내내 붙들고 살면 내일에 올 기회는 잃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건 스스로 자기 생을 포기하는 것이니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얼른 할 일을 마치고 기다리면 새 일이 주어지지만 벌써 끝냈어야할 일을 게으름에 매듭짓짓 못하고 있다가는 다른 기회들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리고 게으름이란 '내가 해야 할 일 남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내가 할 일을 내가 하고 가능하면 남이 할 일까지도 내가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꾸 자기 할 일조차도 남에게 떠넘깁니다. 그리고 좋다고 웃고 신나합니다. 이건 아주 나쁜 병으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엔 아무 것도 못하는 멍청이 바보가 되고 맙니다. '젊었을 때 고생은 돈주고 사서라도 하라'는 어른들이 말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게을러지면 당연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구실 못하는 사림이 되고 맙니다. 인생이란 부단히 그 삶의 질을 높여가는 과정입니다. 부지런함이 생의 부가가치를 높입니다. 인생의 부가가치는 시간의 양이 아닌 시간의 질에 비례합니다. 18시간씩 일하는 사람과 5시간 일하는 사람의 생이 같을 수 없지만 양보다 질이 중요합니다. 5시간 자는 사람과 10시간 자는 사람의 생이 동일할 수 없지만 양보다 질이 중요합니다. 몇 년을 살았느냐 보다 얼마나 깨어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대학원을 2년만에 마치는 사람도 있지만 논문이 안되어서 4년 5년 다니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게으름이란 상승작용을 갖는다는 겁니다. 백화점에 가면 에스컬레이터가 있습니다. 게으름은 에스컬레이터를 탑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상승 작용이 일어나 점점 더 게을러진다는 겁니다. 한번 잠을 마음껏 자 보십시오. 24시간을 자도 모자릅니다.
오늘 이 잠언을 쓴 지혜자는 곳곳에서 이 게으름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게으름이야말로 성공적 인생을 사는데 가장 심각한 장애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장애보다 이 게으름이라는 정신적 장애가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잠언을 통해 게으름을 몇 가지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첫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 두 번째, '잠을 많이 잔다...' 오늘 본문에 보니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한다고 했습니다. 계속 자는 겁니다. 그래서 가사상태에 빠져있는 겁니다.

또 22:13절에 보면 '밖에 사자가 있어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건 겁이 많은 겁니다. 용기가 없는 겁니다. 게으른 자의 특징은 소심하여 자꾸 움추려든다는 겁니다. 게으른 자는 이렇게 변명이 많습니다. 자기 변명이 강합니다. '밖에는 사자가 있다. 그러니 나가면 찢길 것이다. 위험하다. 그런고로 나는 집안에 있을 것이고 집에 있는 김에 잠이나 잘 것이다...'
세상에 모험 아닌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삶 그 자체가 모험입니다. 그런데 '밖에 나가면 사자가 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못하는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만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으른 사람들이 환경탓을 하는 겁니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어렵고...
자전거 배울 때 무릎 안 깨지고 배우는 사람 있습니까?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 배운 사람 있습니까? 넘어집니다. 무릎이 까집니다. 그깟 자전거 하나 배우는데도 상처가 나고 넘어지는데 위험 하나 없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소극성과 부정성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아까 본 말씀처럼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옮기기를 괴로워한다'고 합니다. 음식그릇에 손을 넣고서도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것조차도 힘들어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게으르다보면 이 모양이 되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26:16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문제입니다. 스스로 병자인 줄 알아야 하는데 스스로 건강한 자인줄 압니다. 문제가 심각한 상태인데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자기진단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지혜자의 이 게으름에 대한 진단이 나의 삶에 대한 진단은 아닙니까?... 게으름이 악이요 죄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게으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고 내게 은사를 내려주신 하나님께서 죄를 짓는 겁니다. 그래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들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지난 반년 동안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포도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내게 맡겨진 것에 대해 부지런하였고 지혜로웠습니까?... 사도 바울은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게으름은 원수입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열심히 식어질 때 오는 현상입니다. 열심이란 마음이 뜨거운 겁니다. 그건 곧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그리고 그분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이 잦아듭니다. 그리고 게을러지기 시작하는 것이고 결국엔 포도원을 폐허가 되도록 방치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부지런할 때 잡념이 없어집니다. 부지런한 인생은 후회가 없습니다. 부지런함으로 마음을 지킬 수 있고, 건강도 지킬 수 있고, 행복도 지킬 수 있고, 보람도 지킬 수 있습니다. 의사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의 75%는 게을러서 생긴 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템플대학의 러셀 콘웰 박사가 4000명의 백만장자를 면밀하게 분석 연구해 보았더니 저들에게서 이런 세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더랍니다. 하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다. 둘째는 매사에 부지런함과 열심으로 살았다. 그런가 하면 또 한가지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여러분도 인생을 성공하고 싶으십니까? 게으름을 떨치고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지혜를 쫓지말고 기도함으로 하늘의 지혜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진정한 성공이 있는 겁니다.
근면하기로 소문난 명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아니하면 나 자신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아니하면 평론가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아니하면 벌써 청중이 안다...' 그래서 그 대가도 음악회가 있던 없던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시간씩을 연습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의 음악 세계를 지켜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올 하반기에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십시다. 기도함으로 지혜로 충만하십시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으십시다. 우리의 열심히 기름지고 풍성한 포도원을 일구어서 이 구미영락교회라는 당신의 포도원으로 인해 주님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그런 내일을 이루어가십시다. '그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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