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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있는 공의가 강물처럼 / 암 5:21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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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있는 공의가 강물처럼


구약의 말씀: 아모스서 5:21 ~ 24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전서 13:11 ~ 13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0:38 ~ 4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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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누가복음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와 함께 오랜만에 예수님을 집안에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접대할 음식 준비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빠져 나와서 예수님께 발 앞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데, 마르다는 나이 많은 언니 누나로서, 여동생 마리아와 남동생들을 다 길렀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어머니 노릇을 한 것입니다. 집안 살림도 해야 했고, 손님이 오면 접대도 해야 했습니다.
큰언니는 예나 지금이나, 누가 오든지 손님을 대접할 계획도 세우고, 그 실천에 앞장서는 일꾼입니다. 조금은 얌체 같은 여동생 마리아는 빠져 나와서 예수의 말씀을 듣습니다. 큰언니의 불평은 당연합니다. "주님, 우리 여동생 저한테 와서 일 좀 도와주라고 해 주세요." 예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마르다야, 너는 할 일도 많고, 염려도 많고, 항상 그렇게 살지 않느냐? 그걸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마리아가 하고 있는 지금 이 일도 좋은 일이니, 그냥 놔두어라."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리아가 얌체 같지요?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어머니 같은, 아버지 같은 큰언니 마르다, 너의 관심과 걱정, 집안 걱정, 세상 걱정, 그건 그것대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다. 옳다. 계속해서 밥을 지어라. 그러나 지금 오랜만에 온 나의 말을 듣고자 하는 그 마음씨도 좋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 다 옳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도 옳고, 마리아도 옳고.
그럼 뭡니까? 사람에게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어서, 음식을 마련하고 대접할 준비를 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때는 식사 대접하는 것보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식사 대접하는 것에 들떠 있고 염려만 있으면, 언제 말씀을 듣습니까? 사람에게 베풀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 얻어야 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수난주간만큼은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여지, 여유를 조금은 확대해 보십시다.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그 말씀이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마련하십시오. 그곳에 십자가가 세워져야 합니다. 고난의 자리도 있어야 되겠고, 주님의 아픔을 되새길 자리도 있어야 되겠습니다.
수난절은 듣는 기간, 받는 기간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아픔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기간입니다. 부활절 아침까지만 받으십시오. 충분히 받으셨으면, 그것으로 올해 부활절 이후부터 내년 수난절까지 살아 보십시다. 받아야 할 때에 받지 않고, 주려고만 하는 사람은 공허해질 수 있습니다.
마르다의 일, 마리아의 일, 선택이 아니고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마르다는 공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했지만, 오랜만에 오신 예수, 언제 다시 뵐지 모르는 예수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우선적인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도 일주일 내내 교회 나오는 것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주일날 나오시니, 이 날에는 말하려고 주려고 하지 말고, 좀 들으십시오. 좀 받으십시오. 내 말을 하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속을 다 비우고 한번 받아 보십시오. 예배 때는 듣는 겁니다. 예배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이것은 마르다와 마리아, 언니 동생의 일을 빌어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들어야 할 때입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혹시 한반도에 전쟁이 나지 않을까 해서 굉장히 염려를 했습니다. 오늘 장로님이 기도하시는 대로 다행히 전쟁 가능성은 피한 것 같습니다. 제발 아모스의 말대로,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서, 제발 다시는 피 흘리는 전쟁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느낀 게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나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옳게, 정의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우리의 옳은 생각, 우리의 정의에는 힘이 실리지 않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상대적이기는 합니다만, 상대적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힘이 없는 정의, 정의감은 있으나 힘으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정의, 그래서 무력감! 이것이 우리만 아닌, 인간 세계의 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어떤 곳에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이 너무 이기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힘, 그래서 정의가 없는 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비록 힘없는 자의 반발이기는 하지만, 테러는 정의가 없는 힘의 행사입니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폭력이 싫습니다. 우리는 힘이 없으면 없었지, 정의 없는 힘은 내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정의감은 있으나 힘이 없는 것입니다. 걱정입니다. 힘 좀 만드십시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군사, 안보, 정치, 국제문제 모두에서 힘있는 나라에 휘둘립니다. 우리는 힘이 있어야 삽니다. 힘을 기르십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우리의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은 정의로운 힘입니다. 요즘 두세 사람만 모이면 전부, 지금 미국의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열리고 있는 동계올림픽과 김동성 이야기를 합니다. 왜 1등을 못했을까가 아니고, 1등을 했는데 왜 제대로 인정하지 않나, 옳지 않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 얘기입니다. 우리 국민이 1등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된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정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분명합니다.
정의로운 힘이 편만하기를 원하는 것,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것, 스스로의 가치만큼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심리적 요구입니다. 누구나 나도 제대로 대우받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정의가 중요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그대들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고 행사를 치뤘더냐? 그러나 그 절기 행사 속에 하나님의 정의의 물결은 없었다. 절기 행사는 있었으나, 그 속엔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정의의 물은 흐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마실 수 없었다. 성회로 얼마나 많이 모였던가? 유월절, 초막절, 부림절, 얼마나 많이 모였던가? 그러나 모이기는 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정의의 외침은 없었다. 수많은 동물들을 잡아 피를 흘렸으며, 제물로 바쳤으며, 번제물로 드렸으며, 수많은 헌금을 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들끓는, 피끓는 정의의 염원은 없었다. 찬송과 기도 많이도 했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그대들 가운데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다."
이사야의 말에 이어 아모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너희의 절기 행사가 싫다. 성회로 모이는 것도 지겹다. 제물도 싫고 시끄러운 노래도 싫다. 다 싫다.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의 말이지만, 오늘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포츠 행사에서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정의는 반드시 드높여져야 한다.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당연한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에 대한 요구는 오늘 세계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중국 고대시대에 관한 책을 읽다가, 굉장히 좋은 사화(史話)구나 싶어서 오늘 말씀드립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의 제나라에 제상 맹상군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힘도 있고 덕도 있어서, 거느린 식객만 3천 명쯤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향 고을에, 이름이 설이라는 고을인데, 그 고을에 엄청난 농토를 소유하고 있어서, 그 고을 사람들, 그 지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한테 소작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3천 명이나 되는 식객을 거느렸으니, 돈도 많이 들고 쌀도 많이 들어서, 자기 부하의 한 사람인 풍한이를, "설 지방 내 땅에 가서 소작농들한테 바칠 것 다 바치라고 하고, 곡식도 좀 모아 오너라." 하고 보냈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풍한이가 하는 말이 "돈과 쌀을 가져올 때, 주인님께 어떤 선물을 가지고 올까요?" 하자, 맹상군은 "우리 집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네가 보고 혹시 없는 것이 있으면 사오너라." 하고 보냈습니다.
풍한이가 설 지방에 도착하여, 소작농들을 일일이 다 둘러보았는데, 소작농들 살림이 주인한테 바칠 몫은 고사하고 매일매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고, 다들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풍한이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 주인이신 맹상군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그대들은 오늘부터 모든 빚을 탕감 받았노라." 그러고서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풍한이가 주인 맹상군한테 보고했습니다. "소작농들의 형편이 너무나 어려워서 제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주인님 이름으로.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맹상군의 분노,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맹상군이 묻습니다. "이놈아,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단 말이냐?" 풍한이가 답했습니다. "선물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님 집에는 없는 것 없이 다 있는데,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어서 그걸 가져왔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옳을 의(義)자입니다. 그 의가 빠져 있는 걸 알고서, 가서 소작농들한테 주인님 이름으로 의를 선포하고 왔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맹상군이 제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왕과 갈등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힘을 잃고 정치적 핍박을 받으니까, 3천 명 식객도 다 떠나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입 씻고 다 도망갑니다. 급기야 맹상군 자신도 먹을 게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부하인 풍한이가 제안합니다. "주인님, 여기에 계시지 말고 주인님 동네, 주인님 집안이 있는 설로 가십시다."
맹상군이 설 지방으로 갔더니, 그 동네가 융성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은 동네 모든 사람들이, 우리 의로운 주인이 오셨다며, 맹상군을 환대하였고, 맹상군은 고향에 과거보다 더 큰 공헌을 했다고 하는 옛날 사화입니다.
맹상군 집에 없었던 의가 오늘 우리한테도 부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갖 재산과 재능과 하나님의 복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혹시 하나님의 의가 부족하다면, 이스라엘에게 던진 아모스의 질책이 우리를 향한 질책이 될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것이 지겹다. 싫다. 그 모든 것 다 없어도 좋으니, 나한테 하나님의 공의가 흐르는 강물 한 컵만 떠다 다오."
이스라엘 백성을 통치하는 십계명의 정신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잘못한 사람을 칼로 잘랐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격리시키기도 했습니다. 단절하고 자르고 격리시키고 척결하는 이런 엄격한 공의가 없으면 세상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 땅에는 엄격하게 자르고 처벌하는 이런 정의가 넘치다보니, 전부 잘려나가고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의 정의는 자르고 책벌하는 정의가 아니라, 잘못한 사람, 죄 지은 사람을 회개시켜서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복원시키는 정의임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정의가 훨씬 더 크고 완전한 정의입니다. 책벌하고 자르는 것만이 아니라, 잘려진 사람을 다시 회개시켜서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삼는 회복시키는 정의, 그 정의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강조하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정의가 옳지만, 그 정의는 반드시 만물을 새롭게 만들고 인간을 회복시키는 그런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정의가 참 정의입니다.
구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공의! 그렇습니다.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사랑! 그렇습니다. 공의가 옳지만, 사랑 위에 서지 않은 공의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유일한 아들 예수는 강물처럼 흐르는 정의의 바탕인 사랑의 화신이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가 생수로 흐르게 할 사랑의 사건이 오늘 십자가에서 표출됩니다. 죄 지은 자 다 오십시오. 불의를 행한 사람도 오십시오. 십자가의 피 공로로 회개하고 마음을 바꾸어서, 새 사람으로, 새 가정으로, 새 나라로 거듭납시다.
회복하는 정의, 이 정의는 수난절을 지난 부활절 아침에 새로운 생명력으로 등장합니다. 자르는 정의를 넘어서 다시 회복시키는 정의!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릴 적에는 그걸 다 몰랐지만, 장성하게 되니까 알게 되지 않습니까? 정의와 자유와 믿음과 희망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그러나 다시 살리는 사랑, 그것이 제일 가는 복입니다."
사랑 위에 세워진 정의는 힘이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고, 산 자는 영원히 살게 한다는 복된 말씀이 오늘 성서의 말씀입니다. 사랑은 베풉니다. 사랑은 고쳐줍니다. 정의롭게 만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줍니다. 주님 안에서 회복 받는 정의로운 사람들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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