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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한 갈대를 꺽지 말라 / 사 42:1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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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한 갈대를 꺽지 말라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42:1 ~ 4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전서 1:26 ~ 31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롭게 하여 주심과 거룩하게 하여 주심과 구속하여 주심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대로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3:13 ~ 17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그에게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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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사야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 하나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바빌론에 포로로 와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성, 성전에 모여 제사를 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비참한 백성, 함께 모여 민족애나 신앙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민족. 식민지하의 이스라엘의 운명은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처지의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예언자 이사야는 “상한 갈대”라고 표현합니다. 표현을 바꾸어서 꺼져 가는 등불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느끼는 자기의 실상입니다. 상한 갈대!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습니다. “내가 메시아를 보낼 텐데, 그 메시아는 상한 갈대를 결코 꺾지 않을 것이다. 꺼져 가는 등불을 결코 꺼지게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염려하지 말고 메시아를 기다려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넜는데, 그 홍해는 갈대 바다였습니다. 갈대 바다! 아마도 갈대를 생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널 때의 기억을 되살렸을 것입니다. 갈대는 꺾이면 끝입니다. 물결에 휩쓸리며 썩어갑니다. 꺾여진 ‘갈대’는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갈대가 꺾여 버렸습니다. 식민지하에서 마음도 꺾이고, 몸도 꺾이고, 모든 것이 다 꺾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나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다.”
과거 철인이나 사상가 가운데 인생을 갈대에 비유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이, 자기가 쓴 ꡔ팡세ꡕ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인간은 우주라 이름하는 무한한 공간 가운데 홀로 서 있습니다. 장대한 우주 안에서 인간이란 연약한 갈대에 불과합니다. 갈대와 같은 인간을 둘러싼 이 우주는 영원한 침묵으로 인간한테 다가옵니다. 우주의 침묵은 인간을 두렵게 합니다. 전체 우주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너무나 작습니다. 인간은 고독합니다. 고독 속에 들리는 전율과 같은 떨림, 인간은 한 가닥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구나! 인간은 너무나도 약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파스칼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속에 있는 나약한 존재인 자기를 성찰하면서 토해 놓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인간을 둘러싼 엄청난 우주가 갈대 같은 인간을 없애 버리고자 한다면 특별한 무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조금의 물로 갈대를 덮어버리면 됩니다. 한줄기 바람으로 꺾어 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갈대와 같은 인간이지만, 이 인간은 전체 우주보다 더 위대한 것 같습니다. 왜? 인간은 인간의 운명을 생각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갈대! 그것은 인간에게 복입니다. 인간의 존귀함은 생각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있습니다.
생각을 하되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생각하는 그대로 실천하면, 그 갈대는 위대한 업적을 낳습니다. 어디에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냐 하면, 파스칼의 결론입니다만, 창조주 안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창조주와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앞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완전에 이르게 하는 창조주의 뜻을 따라가면 인간은 행복합니다.
파스칼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아마 지금 갈대처럼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상한 갈대처럼 말입니다. 병들어서 아픈 몸 때문에 고통 당하시는 분, 상한 갈대입니다. 몸은 완전한 것 같은데, 마음이 상하고 정신이 병들어 계신 분, 상한 갈대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고 느끼시면, 자신이 상한 갈대라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 아픔, 좌절, 고독, 이것이 갈대 같은 자신의 현실이고, 그것이 유한한 인간의 진실이라고 생각할 때, 바로 그때 위대합니다. 누가 이 위대한 인간의 생각 속에 와서 고독을 몰아내 줍니까? 고통을 없애 줍니까? 배고픔을 달래 줍니까? 목마름을 없애 줍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오면, 바로 그곳에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낸 메시아는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며, 부족한 것을 채워 줄 것이다. 그 메시아를 두려움 없이 맞아 들이라.”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 그 인간이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나는 그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약하지만 위대한 인간,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입니다. 파스칼의 말은 이 점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 몸에는 여러 가지 세포가 있는데, 그것들을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적혈구와 같은 세포입니다. 적혈구는 혈관을 타고 온 몸을 돌아다니면서 산소를 공급해 줌으로써 힘도 생기게 하고 열도 생기게 합니다.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힘을 주다가 자기의 힘이 다 되면, 그냥 힘이 빠져서 죽습니다. 죽기까지 적혈구는 자기 역할을 다합니다.
또 한 유형의 세포가 있습니다. 백혈구와 같은 세포입니다. 백혈구는 우리가 아는 대로 혈관 곳곳에 숨어 있다가 나쁜 병균이 침입해 들어오면, 온 몸으로 침입한 균을 막고 다른 곳으로 퍼지지 않게 하고, 그리고 그 균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적혈구도 필요하고, 백혈구도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산소를 공급하는 생명의 흐름도 필요하고, 외부의 침략을 막아주는 방어체제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세포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암세포와 같은 세포가 그것입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서도 이것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암으로 고생하는 분들은 점점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이 암세포는 산소를 나르지도 않고, 외부의 병균을 막아 주지도 않습니다. 단지 자기를 확대 재생산할 뿐입니다. 자기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자기를 불립니다. 극성을 부리며 한정도 없이 불립니다. 그렇게 불어난 암세포의 덩어리는 결국 몸 전체를 죽게 만듭니다. 몸이 죽으면 이 암세포도 죽습니다. 자기 파멸입니다. 자기 이기주의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도, 아마 이런 세 가지 종류의 세포들이 엉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라는 공동체, 세계라는 공동체, 가정이라는 공동체, 교회라는 공동체, 이 공동체들 속에도 서로 다른 세포들은 각기 다른 양태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는 백혈구입니까? 적혈구입니까? 혹시 암세포는 아닙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유대 백성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저 사람은 남은 구하였는데,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남은 구하고 자기는 구하지 않은 이의 삶과 죽음, 백혈구와 비슷합니다. 유대 사람들이 본 이 예수의 죽음! 백혈구와 같은 죽음! 그분은 백혈구처럼 죽었지만, 부활하셔서 성령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생명의 원소를 제공하고 계십니다. 백혈구로서 죽은 분이 성령을 통하여 적혈구가 되어, 오늘 우리의 영과 몸을 살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암세포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통을 당합니까? 우리의 몸은 또 얼마나 고통 당합니까? 암 세포가 만연한 사회나 개인은 고통스럽게 죽어 갑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암으로 죽어 가는 현실을 보고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어리석은 자를 들어서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힘없는 자를 들어서 힘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멸시받는 자를 들어서 잘났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바울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여, 힘이 있다고 떵떵거리는 자들이여, 잘났다고 자랑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자신만을 확대함으로, 이 사회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 아닙니까? 권력이 있는 곳, 지혜가 넘치는 곳, 잘난 자들이 있는 곳, 거기에 무슨 생명의 기운이 일어납니까? 그들이 모인 곳, 지도층이 모인 곳, 거기에 무슨 백혈구가 있고 적혈구가 있습니까? 오직 암세포만 늘어 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처럼 상처받고 지친 이 백성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겠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부어 주겠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진정한 힘은 하나님한테서 나오고, 진정한 자랑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하고 싶으면, 주님 안에서 자랑하십시오! 정말로 지혜롭고 싶으면, 주님 안에서 지혜를 찾으십시오! 진실로 힘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주님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하십시오. 그 힘은 십자가의 힘, 부활의 힘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 좋지 못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서 정말 괴롭습니다. 이 나라가 갈대처럼 상하고 꺾여 가는 것 같습니다. 이 나라의 등불이 꺼져 가는 것 같습니다.
흔히 우리는 좋은 음식을 먹으면, 건강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먹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건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을 소화하여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건강합니다. 돈을 많이 벌면 부자인 것 같지만, 돈을 절약하고 또 제대로 쓸 줄 알아야 부자가 됩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지식이 많아지는 것 같지만, 읽는 것 자체가 지식을 주지 않습니다. 읽고 소화하고 체계화하여 기억에 남겨두어야 지식이 됩니다. 설교를 많이 하면 좋은 사람인 것 같지만, 기도를 많이 하면 훌륭한 사람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먹고 마시고 소화하여, 제 속 사람이 살찌게 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가 됩니다.
오늘 이 성서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힘이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힘은 불완전한 힘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 있다고 내세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불완전한 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잘났다고 우쭐대는 사람들은, 자기의 잘남이 불완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다고 보는 것, 다시 말해, 오만, 불손 이것이 죄악을 낳습니다. 이것이 암세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 속에 임하셔서 완전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미완성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미완성인 그곳에 하늘이 오셔서 완성을 이루십니다. 이 땅의 모든 것에는 완전도 완성도 없습니다. 그 속에 하늘이 임해야 완전하고 완성품이 되어 갑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하는 자, 완성을 이루었다고 우쭐되는 자, 그들은 사람을, 가정을, 사회를, 세계를 좀먹는 암세포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보다 앞서 온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요단 강가에서 세례를 받는데, 세례요한이 말합니다. “당신이 나한테 세례를 베풀어야지, 어떻게 내가 당신한테 세례를 베풉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니 그대로 승복하자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받고 물위로 나오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가운데 이런 말씀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겸손하게 세례를 받은 예수에게 하늘이 임한 것입니다. 하늘은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 사랑과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세례를 받으셨죠? 우리 아기들도 유아세례를 받습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불완전한 인간 속에 영원한 하늘 뜻이 임하여 완전을 이루어 가겠다는 약속의 표입니다. 하늘을 품고 사는 기쁨, 하늘을 호흡하며 사는 기쁨, 불완전한 우리 속에 하늘의 완전을 채우는 기쁨, 완성을 이루는 과정 속에 사는 기쁨, 하늘로 채워지는 인간의 기쁨, 이 기쁨을 여러분이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불완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미완성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 속에 하늘이 채워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불완전 속에 하늘의 완전이 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은혜의 풍성함, 하나님의 그 풍성함이 오늘 불완전하다고 고백하는 사람 속에 임합니다. 완전으로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임할 공간이 없습니다. 스스로 완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는 그 무슨 은혜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냥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자신이 불완전함을 볼 수 있는 눈, 자신의 불완전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미완성입니다. 우리 가운데 임하옵소서.” 하고 요청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은총입니다. 하늘이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채워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오늘을 살아가십시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진솔 이것이 우리의 신앙세계에만 아니라, 우리 정치에도 우리 경제에도 우리 사회에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완전하게 해주십니다.
세례 받은 우리에게, 늘 성령으로 세례 받는 역사가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내가 너희들을 좋아한다. 내가 채워주마!” 채우심을 받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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