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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길- 좁은길 / 사 35:3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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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길- 좁은길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35:3 ~ 10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 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하고 말하여라.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질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거기에는 큰 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께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이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 주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서신서의 말씀: 요한계시록 3:11 ~ 13
내가 곧 가겠다.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이기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써 두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 21:25 ~ 33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의 태풍 소리와 성난 파도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괴로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서 기절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일어서서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구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으면 너희는 스스로 보고서, 여름이 벌써 가까이 온 줄을 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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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즐거운 찬송을 많이 들을 수 있고, 부를 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아마 우리가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롤이나 이 시기의 찬송에 가장 많이 들어 있는 말은 "거룩"이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옛날 예배용 찬송들은 다 라틴말로 되어 있어서, 찬송가 가사 중에 "쌍투스!, 쌍투스!"(santus) 하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쌍투스, 거룩.
사실 이 말은 구약 성서에서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구약 성서의 여러 대답 중 가장 많고도 중요한 대답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함의 첫 역사를 보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광야로 나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려 줄, 또 거룩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주님이심을 알려 줄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받은 십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받으러 모세가 여러 번 산에 올라갑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올라간 산은 호렙산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해, 호렙산에 올라간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신발을 벗어라." 이 장면은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갔을 적에, 산 속에 가시떨기가 있는데, 그 가시 떨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고, 그 불타는 가시 떨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입니다.
가시 떨기가 뭐냐 하면, 오늘날 우리가 '아카시아'라고 부르는 나무들입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아카시아 나무는 쓸모도 없고, 뿌리가 너무 깊고 넓게 뻗어서 홍수는 막아줄지 모르지만 다른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카시아 나무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천대받는 나무 중의 하나였습니다.
보잘것없는 나무들, 그 보잘것없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호렙산, 그곳에 불이 타고 있습니다. 아마 모세는 하나님께서 형편없이 버림받은 아카시아 나무들을 불태워서 없애버리는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버림받은 아카시아 나무들은 불타는 게 아니었습니다. 불이 활활 타고 있었으나, 나무는 하나도 타지 않았고, 결코 재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네가 서 있는 곳, 거룩한 땅이다." 하나님의 영이 불길이 되어 가장 보잘것없는 아카시아 나무를 태우는 그곳이 바로 거룩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인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땅이 불탈 때, 버림받은 것이 활활 불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할 때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쌍투스!" 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어라." 모세는 그 말씀을 듣고,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우리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 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우리 민족의 처지는 아카시아 나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집트의 넓고 비옥한 땅덩어리가 우리를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땅에서 종살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버림받은 민족, 천대받는 민족, 종살이하는 민족, 우리는 아카시아 나무입니다. 이 아카시아 나무에다가 왜 하나님은 성령을 다시 부어 주십니까? 활활 불이 타게 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땅, 내 거룩함이 있는 땅에서 너는 신발을 벗어라. 신세 타령은 그만 해라. 너희들의 사백 년 종살이의 강박관념은 다 버려라. 기존 사고방식도 다 버려라. 운명론도 다 버려라. 과거에 가졌던 닳고닳은 관습도 다 버려라. 이제는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니, 신발을 벗어라.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만나시려면, 여러분의 이념, 사상, 생활방식, 체제,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는 모든 신발, 지금 벗으십시오. 신발을 벗고 하나님의 영이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 한번 서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발을 벗어라. 서 있는 곳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왜 신발 신고 있느냐? 그것 벗고 내가 주는 새로운 신을 신어라."
하나님은 이 땅, 이 흙에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아담,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만, 첫 인간 아담을 만든 원재료는 흙입니다. 땅입니다. 그래서 '아담'에 '아'를 붙여서 '아다마' 하면 땅이라는 뜻입니다. '거룩'은 히브리 말로 '코데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여, 네가 서 있는 땅은 하나님의 영이 들어 가 있는 코데쉬! 신발을 벗어라. 하나님의 영역에 올 때에는 세상의 영역, 인간의 영역을 가져오지 말아라. 여기서는 새것을 입어라."
'거룩'이 무엇인지 연구한 사람들의 결론을 보면, 거룩은 너무 경외롭고 신비한 것, 두렵고 떨리는 것, 놀라고 충격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누미노제! 그것이 거룩이라는 말속에 담겨 있는 경험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거룩함을 보여 주셨던 하나님은, 그 산 아래 있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은 복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읽어서 들으신 말씀,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는 것, 그것은 거룩하다.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리면, 그것이 거룩하다.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는 것을 보면, 거룩하다. 말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르면, 그것이 거룩이다." 거룩이란 사상이거나 응축된 개념이 아닙니다. 거룩은 현실입니다. 뒤바뀌어지는 현실입니다. 입이 열리고 귀가 열리는 것이 거룩함이지, 그런 기적적 역사가 없는 것, 현실이 아닌 것은 거룩이라고 이름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사건이요 현실입니다.
사람에게서만 그런 거룩함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에서도 일어납니다. 이사야서를 다시 읽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솟아나면, 사막에 시내가 흐르는 것을 보거든, 뜨겁게 태양이 타오르던 땅이 연못이 되는 것을 보거든, 메마른 땅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거든 거룩하다 하여라." 자연의 변화입니다. 이사야 말씀이 계속됩니다. "바로 이런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지는 거룩한 그곳에 길이 하나 날 것이다.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부를 것이다. 그 길을 따라 내가, 거룩한 하나님이 지금, 너희에게 가고자 한다." 이분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입니다.
그 거룩한 길에는 악한 자와 어리석은 자는 서성거릴 수도 없습니다. 사자나 사나운 짐승도 다니지 못합니다. 오직 구원받은 자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에 갈 수 있습니다. 기쁨이 영원히 머무는 길, 즐거움과 기쁨이 넘실거리는 길, 슬픔과 탄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길, 그 길은 거룩한 길입니다. 그 길은 회개하고 용서받고 기쁨의 찬가를 부르는 사람만이 기쁘게 콧노래 부르면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거룩한 길, 거룩한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기 전에 "가까이 오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거리를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 계시는 하나님은 확실히 인간과 거리를 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무 높으셔서, 너무 크셔서, 너무 공의로우셔서, 그분은 인간과 거리를 두셨습니다. 거룩함과 속됨 사이에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거리는 두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항상 너희와 함께하겠다. 임마누엘." 구약의 모든 백성들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지금도 거룩한 길을 통해서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가졌던 이스라엘에 하나의 사건이 생겼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 오셨습니까?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가장 천한 곳, 가장 낮은 곳에, 가장 높고 가장 거룩한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라고 이름하는 아기 속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거룩함이 속된 인간의 모습으로 오늘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거리를 두고 있던 구약의 하나님이 그 거리를 완전히 없애셨습니다. 더 이상 거리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속된 인간의 몸을 입고, 육신의 몸을 입고,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납니다.
사람이 호텔에 머물면서 그곳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둘러보고서 거룩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차마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비천한 곳, 말들이 있는 마구간 구유, 그곳에서 하나님이 태어나니 거룩합니다. 사람이 밟고 지나간 그곳에 하늘이 임하니 거룩합니다. 거룩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이런 거룩치 못한 속된 곳, 미천한 곳에서 생겨났습니다.
제가 이 거룩을 생각하다가, 우리 한국 사람이나 동양 사람들은 거룩함을 어떻게 보았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제가 많은 지식이 없어서, 다른 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글자를 살펴본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한자의 거룩을 뜻하는 글자는 성(聖)자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성자(聖者), 성인(聖人)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룩할 성(聖)자가 무엇으로 만들어졌습니까? 거룩할 '성'자를 살펴보면, 귀라고 하는 이(耳)자에다가, 옆에 입 구(口)자를 붙이고, 밑에 왕(王) 자를 받치면 거룩입니다. 그렇지요? 아하, 동양 사람들은 거룩이라는 말을 심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보지 않고, 철저하게 윤리적, 도덕적, 인간적, 인륜적으로 파악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거룩하다는 말은 백성의 소리를 귀로 듣고, 그리고 꼭 필요한 말씀을 입으로 하되, 왕처럼 한다는 말입니다.
성과 반대되는 속(俗)이라는 글자를 보십시오. 속물(俗物)은 속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속'자를 보면 사람 인 변( )옆의 위쪽에 조그만 사람 두 개가 있고, 그 밑에 입 구(口)자가 있습니다. 입 '구'자가! 아하, 속물이란 뭐냐 하면, 듣지는 않고 말만 하는 사람이구나! 하늘의 소리를 듣고, 들은 만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소리에는 아주 귀를 막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 이 사람이 속물입니다. 그러나 바르게 듣고 바르게 말하는 사람은 성자입니다. 동양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싶으면, 먼저 들으라는 것입니다. 듣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속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음성도 안 듣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아무리 그럴싸한 말을 하더라도 결코 성자가 아닙니다. 속물입니다. 속물 인간들은 권력을 가졌건 아니 가졌건, 지위가 높건 낮건 간에, 제 말만 했지, 남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재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독재자가 다른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안 듣고 말하는 사람, 남 쳐다보지 않고 자기만 쳐다보고 통치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독재자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속물 속에 들어와서, 속물의 옷을 입고, 인간의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죽고 삽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속됨과 거리가 없습니다.
제가 일전에 어느 책을 하나 읽었는데, 이 책은 미국의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어놓은 책입니다. 그 서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잘 나가고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성공하고 존경받는 사람은 항상 자연과 절친한 사람이었습니다. 환경과 자연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한동안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고, 자연은 인간의 지배의 대상, 파괴의 대상으로만 알았습니다. 인간들은 산업혁명 이후로 환경을 파괴하고 자연을 업신여기면서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연의 피해는 인간의 피해가 되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지배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서 천지창조의 질서를 이루어 가야 할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를 끊으면서 살아온 결과가 지금은 인간의 치욕이자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연과 친화하고, 자연과 가까이 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참된 인간성을 꽃피워 가는 사람, 아마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특징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성공한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는데, 남자의 경우는 여성미를 갖춘 남자였고, 여성인 경우에는 남성미를 갖춘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옛날부터 남녀유별,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차별, 여성 비하, 남성 존대가 고착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지적은, 모든 남자는 여성다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여성은 남성다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이어집니다. 여성의 해방, 남성의 해방, 여성찬가, 남성찬가 이렇게 구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여성, 남성 구분해 볼 수는 있지만, 진실한 여성미는 총체적인 인간미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남성미는 균형 잡힌 인간미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해방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만든 전적인 인간, 총체적인 인간 속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조화되어 있습니다. 포괄적인 인간, 이 인간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복 받는 인간이요, 이 인간들이 바로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 남성이신 분들은 여성미도 좀 갖추시고요, 여성이신 분들은 남성미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몸이 되어, 가장 비천하고 낮은 곳에 태어나시고자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높은 곳에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버린 그 곳에서도 하나님은 태어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짓밟고 내버린 곳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함은 고귀하게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버린 모퉁이돌도 하나님은 머릿돌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버려진 시궁창에서 수선화가 피어나게 하는 것, 그것입니다. 척박한 팔레스타인 땅에 백합화가 만발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알프스의 척박한 돌산에 에델바이스가 피어나서 아름다운 노래가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거룩함의 역사입니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곳, 말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잠을 청하는 곳, 마구간에서 구세주가 태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인간과 거리를 두셨지만, 신약에 와서 예수를 통해 나타나신 거룩한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가 되고, 합일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자기를 내어 주는 거룩함입니다. 사랑이 없는 거룩함은 받기만 하고 주지를 않습니다. 사랑이 있는 거룩함은 자기 모두를,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내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시궁창 속에까지 내줍니다. 십자가라는 죽음의 장소에까지 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운명을 자기 운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성서는 무화과 나뭇잎이 무성하면, 여름이 온 줄 알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가을의 단풍이 들면 가을의 결실이 있는 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속됨 속에, 깊은 시궁창 속에 수선화 한 송이가 피어난다면, 하나님의 거룩함이 임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림절의 뜻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육화입니다. '카르네'라고 하는 몸을 담고 있는 성육신, 인­카네이션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거리가 있던 구약의 임마누엘 하나님이 몸이 되어, 인카네이션 해서 지금 오신다고 합니다.
그분이 우리한테 부탁합니다. "내가 갈 테니 너희들 시궁창 좀 열어다오." 여러분이나 저나 솔직히 말해서 자존심이 강합니다. 자기의 치부를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시궁창이 있는가 하면 척박한 곳도 있습니다. 남들한테 말하지 못하는 엄청난 어둠이, 비리가 제 속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나눌 수 없지요. 프라이버시 때문입니다. 그건 좀 유보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하나님 부탁입니다. "나하고는 열자." 못 열었던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하고는 열자는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 좀 파헤쳐 버려라. 내가 들어가야겠다. 시궁창에 가서, 낮고 천한 곳에 가서, 너희들의 강박관념 속을 뚫고 들어가서, 나는 오늘 거기서 거룩한 사랑의 꽃을 피워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썩어 죽는다. 그 거룩한 길에는 나는 회개하지 않은 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거룩한 길에는 죄 있는 자들은 못 오지만, 회개한 죄인은 올 수 있다. 나와 함께 거룩한 길로 가자."
하나님이 여러분의 깊은 곳으로 들어오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의 심중의 문을 노크하고 있습니다. 좀 여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 봅니다. 하나님만 보게 열어 보십시오. 다 연 다음에 우리가 연 그곳에서 시작된 그 길을 따라 갑시다. 그 길은 아마도 좁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길. 우리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받읍시다. 그리고 거룩에 참여한 그 기쁨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노래합시다. 그리고 성탄절 예배 때 실컷 하나님을 찬양해 봅시다.
하나님이 오십니다. 거룩한 분이 오십니다. 사랑으로 엮어놓은 그 길이 우리에게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대림절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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