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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이 도적같이 오면 / 욥 14:5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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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이 도적같이 오면

구약의 말씀: 욥기 14:5 ~ 9
인생이 살아갈 날 수는 미리 정해져 있고, 그 달 수도, 주께서는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주께서는 사람이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셔서 그가 숨을 좀 돌리게 하시고, 자기가 살 남은 시간을 품꾼만큼이라도 한 번 마음껏 살게 해 주십시오. 한 그루 나무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찍혀도 다시 움이 돋아나고, 그 가지가 끊임없이 자라나고, 비록 그 뿌리가 땅 속에서 늙어서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 죽어도, 물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

서신서의 말씀: 데살로니가 전서 5:1 ~ 6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립시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 17:20 ~ 24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인자의 날들 가운데서 단 하루라도 보고 싶어 할 때가 오겠으나,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더러 말하기를 보아라, 저기에 있다. 또는 보아라,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따라 나서지 말고, 찾아다니지도 말아라. 마치 번개가 하늘 이 끝에서 번쩍하여 하늘 저 끝까지 비치는 것처럼 인자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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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누가복음 본문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질문을 드리고, 예수께서 그 질문에 답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 요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옵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하시는 대답이,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방식으로는 안 온다.”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이 답변을 조금 더 보충을 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갑자기 오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데살로니가전서의 표현으로는, 밤의 도둑처럼 온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질문은, 우리가 셀 수 있는 날과 주일과 달과 해,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몇 년, 몇 월, 몇 일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느냐는 것입니까? 정확한 셈을 통해서 시간을 알려 주면, 그 시간에 맞추어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그때와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산술적인 계산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오는 시간을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그럴 정보도 당신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도둑처럼 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도둑은 예고 없이 오지 않습니까? 예고하고 오는 도둑은 도둑이 아닙니다. 여러분, 문 단단히 잠그고 사시지요? 옛날에는 열쇠도 없이 살았다고 하는데, 요즘은 문에 자물쇠를 참 많이 달고 삽니다. 제가 심방하면서 봤더니, 옛날에는 문에 달린 열쇠가 하나였고 많아도 두 개쯤이었는데, 요즘은 세 개 달린 집도 있고, 또 네 개 달린 집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 자물쇠가 많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딸아이가 어머니한테 물었습니다. “엄마, 왜 이렇게 자물쇠로 잠그고 다녀요?” 그랬더니 그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물쇠를 잠그는 이유는 도둑이 못 들어오게 하려는 게 아니다. 도둑은 아무리 잠가도 자물쇠를 따고 들어온다. 무엇 때문에 자물쇠를 채우는가 하면, 마음이 착한 사람이 혹시 문을 열어 보다가, 문은 열려 있고 사람은 없어서 유혹을 받아 도둑질하게 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자물쇠를 잠그는 것이다. 결코 악인을 위해서 잠그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 그 여자아이의 가슴에 박혔고, 자란 뒤에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제일 중요한 기도가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라는 것임을 깨달았답니다. 사실 악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면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시험에 안 들면 악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자물쇠 얘기 하나를 듣고 인생관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 여자아이는 성장해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라는 말씀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단지 도둑을 막기 위해서라면 자물쇠를 많이 달지 마시고, 착한 이웃들에게 유혹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자물쇠를 많이 달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잠그고 단속하는 것이 인간사회를 보다 더 아름답고 신용 있게 만들기 위한 조치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데살로니가를 쓴 사도 바울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올지, 나도 모르므로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립시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생각하는 계산된 시간 속에 온다고 생각지 마시고, 모든 인간 존재의 매순간에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생각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올 시간이라고 믿으면 지금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 되겠습니까?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서 신앙집회를 가졌습니다만, 어느 교회에 가면 1년 중에 신앙집회, 부흥회를 여러 차례 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년에 딱 한번, 그것도 오후에 합니다. 횟수와는 상관없이 진하게 갖는 신앙수련회, 아마 많은 감명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매주 신앙수련회를 하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괜찮으시겠어요? 52주, 매주 오후 신앙수련회를 한다면, 아마도 지겨워서 은혜가 안 될 겁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이 묻는 질문에 담긴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올지를 알면, 그때에 맞춰서 인생관을 바꾸겠다, 그때에 맞춰서 사는 방식도 바꾸겠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을 좀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이다가 다음 날은 지옥이 되고 그런 나라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함께하십니다. 함께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분명한 때를 알면 바로 그때에만 각별하게 하나님을 믿고, 일반적인 때에는 그냥 적당히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자연스런 바람, 또는 고민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아름답고 값지게 사십시오. 아름다운 시간, 진실해야 할 시간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을 그 시간으로 살아가십시오!
바리새파 사람들의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옵니까?” 장소를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나 저기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있다고 따라 나서지도 말고, 저기 있다고 말하는 것 듣고 찾아다니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그대들 안에 있소이다. 그대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대들 마음속에 있습니다. 장소는 무의미합니다. 그대들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곳입니다.”
인간 세상의 역사를 보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체제를 통해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제도를 통해서 그 나라를 실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 올 것이다.” 하고 여러 사람들이 예언을 숱하게 했습니다만, 이루어진 예언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마다 사람마다 겪는 기쁨과 희열과 재미있고 아름다운 경험들, 거듭나는 경험들은 수많이 존재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그 나라의 방식대로 임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당신들의 시간으로 재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당신이 원하는 공간에다가 제도화, 체제화, 화석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지, 결코 당신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장소와 시간에 묶이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계신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유대백성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시간과 장소를 통해 구체화하고 싶어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혹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냐고 묻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예루살렘에만 있어야 하느냐? 그대들의 착취와 핍박의 대상인 갈릴리에는 왜 없어야 하느냐? 왜 하나님의 나라를 그대들이 독점하고 싶어하느냐?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시지 않느냐?”
그 나라는 누구에게나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님의 나라는 똑같은 방식으로 경험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우는 사람의 눈물을 씻어줄 것입니다만, 울음소리가 똑같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고난의 종류와 깊이도 서로 다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재능이 똑같지 않듯이,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맞는 다양한 방식대로 임하십니다. 한 가지 방식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도록 만들면 그걸 가리켜서 우상화라 이름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많은 종교적 우상을 만들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데올로기의 우상을 만들어 놓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도덕과 윤리를 빙자한 우상을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걸 체제화하지 않았습니까? 절대화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생존하고 있는 그곳, 존재하는 그곳,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는 그곳에 나는 항상 있겠다.”고 하십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우리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임하십니다. 그렇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가슴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 가슴을 경험하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재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계산 너머에서 옵니다.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사람들을 보기에 의롭다고 하는 욥이, 하나님의 복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는 욥이, 물질의 복도 받았고 자녀의 복도 많이 받았고 지식도 많고, 누가 보든 선한 욥이 혹독한 시련을 당합니다. 재산이 다 날아갔습니다. 자식들이 다 죽었습니다. 온몸에 질병까지 생겼습니다. 못 고칠 병에 시달립니다. 부인과 친구마저도 욕하고 다 욥을 버렸습니다. 욥이 고백합니다. “나는 뭡니까? 나한테는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까? 주님의 나라는 언제, 어디에 임합니까? 우리 집입니까? 내일입니까?”
욥의 고백 속에, 오늘 제기한 문제 해결의 한 단초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아까 들으신 욥기 14장의 말씀입니다. “주님, 제게 살 시간이 조금 더 있다면, 품꾼만큼이라도 한번 마음껏 살게 해 주십시오. 주인 된 저의 모습은 뭡니까? 한 그루 나무도 희망이 있습니다. 찍혀도 다시 움이 돋아나고, 그 가지가 끊임없이 자라나고, 비록 그 뿌리가 땅 속에서 늙어 그 그루터기가 흙에 묻혀도 물 기운만 들어가면 다시 싹이 나며 새로 심은 듯이 가지를 뻗습니다. 하나님, 나무 한 그루도 그러한데 저는 뭡니까? 저한테는 물도 안주십니까? 내 인생 남은 시간이 몇 분, 몇 초인지 모르지만, 제 마음껏 좀 살게 해 주십시오.” 얼마나 고달픈 고백입니까? “나무 한 그루만도 못한 인생, 하나님에게 제 존재의미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희극이나 비극 중에 우리가 옛날부터 많이 들었던 비극이 하나 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쓴 「햄릿」이라는 비극 다 아시죠? 제가 그 내용을 다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덴마크의 왕 햄릿이 갑자기 죽게 됩니다. 햄릿이 죽자, 아내인 왕비가 햄릿의 동생을 사랑하여 재혼을 합니다. 그리고 햄릿의 동생이 새로운 왕이 됩니다. 햄릿의 아들 왕자 햄릿이 이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햄릿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하고 삼촌이 왕에 오르는 날 밤에 꿈을 꿨는데, 자기 아버지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네 삼촌에 의해서 독살당했다.”고 합니다.
햄릿은 고민합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복수를 한다는 것은 또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인데, 사람의 생명을 죽인다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다. 한편으로 아버지를 죽인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의 동물적 정욕이란 도대체 뭐냐? 인생이 그렇다면 정말 살기 싫다. 구역질이 난다. 구역질이 나는 생존, 죽여야 하는 괴로움.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
결국 자기가 사랑하던 애인의 아버지를 죽이고, 애인도 죽게 되고, 그리고 어머니인 왕비도 죽고, 자기 삼촌도 죽고 다 죽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죽습니다. 비극으로 끝납니다. 죽음을 바라보면서 햄릿 왕자가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가 목숨을 끊어서 이 고통스런 순간들을 벗어날 수 있다면 기꺼이 죽겠다. 그런데 목숨을 끊는다고 이 고통이 사라진다는 보장은 없다. 누구도 보증해 주지 않는다. 혹시 죽었다가 내가 가진 이 고뇌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옮겨져서, 영원히 내가 매달고 다니게 되면 어떻게 하나? 수많은 사람이 죽음의 세계로 떠났지만 아무도 되돌아온 사람이 없다. 알 수 없고 돌아올 수 없는 세계, 그 세계로 갈 때 고통을 안고 가는 것은 너무 처절하다.”
그래서 “죽을 수도 없고, 살자니 괴롭다”는, 우리 중학교 다닐 때 배운 유명한 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살자니 고달프고 죽자니 아쉬운 그런 극한의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는 질문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죽을 수도 없고 살자니 괴로운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언제 어디에 온다고 하는 것이 확실하면 그때까지는 괴로움을 이기고 살겠는데, 그렇지도 않다면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지금 우리 역사도 살자니 괴롭고 죽자니 아쉽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말씀은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치 오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면 지금의 내 인생과는 무관한 아주 멀고 먼 미래의 일인 양 그냥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생존하고 있는 그대 존재 속에 있다. 한순간 한순간이 다 하나님의 나라가 올 순간이고, 이곳 저곳이 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곳이다. 왜 그대들은 하나님을 특정한 시간에 묶어 놓으려고 하느냐? 왜 하나님의 역사를 특정한 장소에 국한시키려고 하느냐? 하나님은 어디나 존재하시며, 하나님은 항상 그대들과 함께 계신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두려움이겠지만,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들입니까? 이 순간들을 왜 제한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은 결코 제한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의 말씀 속에 여러분에게 주실 은총의 말씀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특수한 사건 가운데만 임하시는 분이 아니라, 단순하게 인간 생존의 매 순간에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욥은 다시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괴로워 죽겠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여기고 살라는 말입니까? 그 질문에 예수의 답변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내 몸에 지니고 있지만, 나는 십자가를 져야 했다.“ 욥만 십자가를 집니까? 신앙의 증인들만 십자가를 집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도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고통이 임하고 힘들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우리가 육체의 한계 안에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는 즐거움일 수만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십자가도 있고 부활도 있습니다.
항상 십자가만 있다면 그 하나님은 존속할 수 없습니다. 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활만 있다면, 그 하나님은 도깨비입니다. 왜? 십자가 없는 부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부활한 사람은 예수 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십자가라는 고난과 죽음 가운데에서 그것을 이기고 부활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속에 부활이라는 생명의 영광이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삶 속에서 교차되며 존재합니다. 어려울 때, 죽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때에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부활의 빛이 비취게 됩니다. 너무 좋고 기쁠 때에는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생각하십시오. 겸손한 마음에 부활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까? 그때만 내가 기억하겠습니다. 어디에 오실 겁니까? 그곳에 내가 초막을 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가 일어나고 생각하고 자고 일하는 그 모든 순간들에 나는 항상 함께 있겠다. 고통과 질곡과 기쁨과 찬송 속에 항상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대림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날이 어떤 날이기를 바라십니까? 그날은 십자가의 날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날 속에 부활의 새 날이 잉태됩니다. 그것을 신앙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영광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항상 부활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요, 삶의 근본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나는 항상 함께 있겠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이 “항상” 속에 임재합니다. “항상”이 없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심판의 주로, 은혜의 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오늘 우리는 대림절에 고대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속히 오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여러분의 구세주가 오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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