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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약하니라 / 렘 29:10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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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약하니라


구약의 말씀: 에레미야서 29:10 ~ 14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으로서,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쫓아 보냈던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 오겠다. 내가 너희를 포로로 보냈으나, 나는 너희를 그 곳에서 너희의 고향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서신서의 말씀: 에베소서 5:9 ~ 16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어 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그들이 은밀히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빛으로 말미암아 폭로되는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다 빛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실 것이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조심하여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처럼 하십시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 10:34 ~ 39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제 아버지를, 딸이 제 어머니를,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슬러서 갈라서게" 하러 왔다. "사람의 원수가 제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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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 교회가 시작될 때 중요한 문학작품 하나가 있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즐겨 읽던 작품입니다. 단테가 쓴 ꡔ신곡ꡕ이라는 작품입니다. 여러분도 이 책에 관해 많이 들었을 줄 압니다. 이 ꡔ신곡ꡕ 가운데 이런 대목이 하나 나옵니다. 단테가 안내자를 따라서 이상한 장소에 도착했는데, 안내자가 다양한 무리들을 소개시켜 줍니다. 한쪽을 봤더니 얼굴의 혈색도 나쁘고 아주 근심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안내자 말합니다. “이들은 천당에서 거절당하고 지옥에서도 거절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근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천당을 갈 만큼 선한 사람들도 아니고, 지옥에 갈 만큼 악한 사람들도 아닌 어정쩡한 군상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좋아하지 않고 사탄도 좋아하지 않으니, 오갈 데 없고 돌아갈 데 없는, 영원히 버림받은 군상들이었습니다. 안내자는 그들을 그냥 지나쳐서 단테를 다른 곳으로 인도합니다.
요즘 전 세계를 보면, 전쟁 때문에 집을 잃은 사람이 많습니다. 또 부모가 버렸기 때문에 가정과 집을 잃은 아이들도 많습니다. 집을 잃은 사람들, 방황하는 사람들, 홈리스(homeless)가 우리 주변에도 굉장히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단테 이야기에 보면, 집을 잃은 사람들은 그냥 물리적으로 집만 잃은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고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상에 있을 때나 또는 하늘에 가서도 찾아갈 고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차든지 뜨겁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할텐데, 아무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 군상들, 그들은 고향을 잃은 사람들, 집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세계에는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중세기 교회가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지옥이 아니라 천당을 가야 할텐데, 그렇게 구원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집입니다. 육적인 집, 영적인 집, 세상의 집, 하늘의 집, 이름하여 교회입니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물론 이 말을 할 때 당시의 중세교회에는 엄청난 이단과 사설들이 날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공(公)교회 이외의 모든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방사람들이 믿는 교회에는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정식으로 선포한 공교회, 이 교회만이 진실한 정통파 교회입니다. 이 교회 벗어나면 교회가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선언은 이단 사설로부터 교회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교회에 오면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을 덧입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믿어 온 역사가 천 이백 년을 흘렀습니다. 천 이백 년이 지나고 나자,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고,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굳게 믿고서 교회를 찾아가 봤더니, 거기에는 진짜 있어야 할 구원은 없고 교회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르틴 루터라는 사람이 뷔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써 붙였을 때, 루터는 그것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리라고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신학자로서, 신부로서 당시 교회의 파행구조를 보고 95개의 반박문만 써놓았을 따름입니다. 교회 문에 붙은 작은 불씨 하나가, 엄청난 바람을 타고 전세계를 불태우는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긴 것입니다. 루터는 의도한 바가 없으나, 루터의 그 행위 속에 하나님의 기(氣)가 활동하셔서 전세계를 뒤덮는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겼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 말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오면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구세주인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하는 주장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옛 사람들도 논쟁을 벌였습니다. 교회가 있으면 바로 거기에 구원이 있는가, 말을 바꾸면 교회가 있는 곳에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있느냐는 문제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교회가 올바를 때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중세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논의를 다시 시작합니다. 교회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계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있겠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다른 게 아닙니다. 교회가 있으면 무조건 그리스도가 있다는 그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임재하신 그곳에 참된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명제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오백 년 이후의 지금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땅의 교회들, 십자가를 내건 그 건물들 속에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계십니까? 우리 경동교회에는 그리스도가 계셔서 우리를 회개케 하고 새로운 생명을 부어 주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항상 그렇게 믿고 이 자리에 섭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 십자가가 세워진 모든 교회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은 다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례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한다고 해서, 우리 속에 항상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리스도가 계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셔야, 그리스도 안에 내가 살고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옛날 사건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늘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제가 우리 나라 말을 사용하면서 몇 번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의식하고서 보니까, 제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氣)”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기운이 없다고 하고, 사람이 맥이 풀리면 기가 빠졌다고 하고, 생동력이 있으면 기가 살았다고 하고, 쇠약해지면 원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명성이 있으면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기(氣)라는 단어가 우리말에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퇴계와 율곡의 이기(理氣)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얘기를 오늘 설교시간에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理)라고 하는 것은 우주와 사회의 원리, 체제와 질서, 도덕과 윤리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힘은 기(氣)입니다. 그래서 이(理)와 기(氣)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 논쟁과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는 다 나름대로 생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산에도 바다에도 바람에도 비 가운데에도 햇빛 속에도 항상 뭔가 생명을 주고 살리는 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산에 있는 하나님의 생동하는 기, 바다를 요동치게 하는 기, 그런 것들을 신격화했습니다. 그래서 산신(山神), 해신(海神), 풍신(風神), 등등 신이 굉장히 많다고 믿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이름하여 다신론(多神論)입니다.
그런데 성서 말씀에 보면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시고, 그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인간과 모든 피조물에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 천지만물 중에 임재하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신의 기(神氣)가 모든 만물 속에 존재합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다신론이라 하고, 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고 하여 범신론(汎神論)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에서 보면 다신론도, 범신론도 맞지 않습니다. 신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인간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는 신이 아니라, 한 분이신 하나님의 입김이 들어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의 기가 사람의 기 속에, 자연의 기 속에 있어야 사람과 자연이 참다운 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범신론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물 안에 영으로 계시다고 해서 범재신론(汎在神論)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로서 만물이 존재합니다. 그 기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셔서 이 세상 만물과 인간 속에 존재합니다. 사람이 인기(人氣)가 많은 것 같지만 인기란 어느 정도 유지되다가 나중에는 거품이 됩니다. 거품 인기가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기 속에 신의 기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만으로, 사람의 기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제한적이고 끝내는 허무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물거품 같은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교회라는 건물을 만들어 놓고 그 건물 속에만 그리스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신기(神氣)가 아니라, 교기(敎氣)입니다. 그러나 교회 속에 진실로 기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안 계시면,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끝내는 95개조의 반박문이 나오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 창세 때에 주어졌던 하나님의 입김, 생명의 입김, “루아하”라 이름하는 하나님의 기가 오늘 우리 각자와 가정과 사회에 임해야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그래서 구원받는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비극은 인기(人氣) 절대주의 때문에 생겼습니다. 신기(神氣)가 사라진 곳에는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곳에는 좌절이 있습니다. 평화가 아닌 전쟁이 있습니다. 테러가 있습니다. 신기(神氣)가 없는 인기(人氣)의 절대화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는 인기만 가지고 오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인(人)이라는 것을 절대화해서 신화(神化)한 것 아닙니까?
오늘 다시 루터를 통해서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곳에 믿는 자의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기가 먼저입니다. 그 위에 사람의 기를 세우십시오.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입김은 본질적으로 평화지만, 하나님의 입김이 빠지고 사람의 입김이 절대화된 그 곳에는, 하나님은 평화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칼 가지고 싹둑싹둑 잘라냅니다. 하나님의 기가 빠진 곳은 잘려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아버지와 아들이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고, 어머니와 딸이 적이 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입니다. 전쟁입니다. 신의 기가 빠져있는 곳은 서로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신기를 모셔야 합니다.
칼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상대를 찌르는 무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겨레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지난번 북쪽과 남쪽이 합의해서 제4차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쪽에서 연기 통보를 해서 아주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러고서 얼마 전에 8월 15일 평양에서 있었던 경축행사 때문에 난리가 난 것을 우리가 다 압니다. 남쪽에서 간 일부 사람들이 다소 현명하지 못한 짓을 해서 우리 남쪽에 난리가 났던 것입니다. 일부 과격한 사람들 때문에 민간 통일운동의 전체 물이 흐려졌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평양축전이 축전이 아니라 스캔들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 하나가 우리를 갈라 놓았습니다. 그게 칼이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북은 갑자기 이산가족 상봉을 취소한 뒤에, 장관급 회담도 관례를 벗어나 금강산에서 하자고 했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고 사정을 조사해본 결과 남쪽에서는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8월 15일 축전 때, 우리 남쪽 대표들이 갔는데, 뒷이야기에 의하면, 남쪽의 민주인사, 평화인사, 통일인사들이 왔는데, 얼마나 자유분방한지 북쪽에서는 그들을 만나는 곳마다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자유분방한 접촉이 통제 아래 사는 북쪽 사람들한테 혼란을 가져온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단독회담이든, 이산가족 만남이든 이제는 평양과 서울에서는 안 되겠다. 아예 한 곳 지정하자. 금강산!”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8.15 경축 때문에 고민이 생겼지만, 북은 북대로 고민이 생긴 모양입니다. 제가 이 말을 듣고 아하, 시퍼런 칼도 무섭지만 자유분방함 자체도 엄청난 칼이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깨져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 남쪽도 깨져야 되고 북쪽도 깨져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다 깨진다면,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뭘 만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남쪽의 기(氣)만 가지고 만들면 됩니까? 북쪽의 기(氣)만 가지고 세우면 됩니까?
우리가 깨버려야 할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신이 없는 기입니다. 그것을 깹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가 들어 있는 것으로 다시 만드십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기를 받은 몸이라면, 회개하고 그 몸 속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새로운 열린 공간을 만들어 가십시다.
사실 이런 눈으로 보면, 오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위해서 죽으려고 결심하는 사람은 산다.” 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이 말의 뜻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기만 가지고 그것을 철통같이 지키고 절대화하고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기는 거품이 가라앉을 때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를 받아서 사는 사람, 하나님의 기가 요구하면 내 기를 버릴 정도, 나를 스스로 희생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하나님의 기가 여러분을 살려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란 교회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이란 인간 됨의 개혁이 필요할 때 개혁하는 일이고, 정치에 개혁이 필요할 때 개혁하는 일이며, 사회에 개혁이 필요할 때 개혁하는 일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한 가지 지혜를 얻습니다. “여러분, 그 길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세월이 악합니다. 때가 악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아끼라는 말은 헬라어 본문에 보면 “쓰지 않고 아낀다”는 말이 아니라 “되사다” “속량의 은총으로 받다”라는 뜻입니다. 세월은 뭡니까? 하나님이 주신 긍정적이고 유일한 기회입니다. 카이로스라는 기회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개혁의 때를 놓치지 말고 최대한 활용하라는 말입니다. 이 때를 놓치면 인간 구원은, 가정 구원은, 교회 구원은 빗나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으면 홈리스가 됩니다. 오늘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찾으면 찾아질 것이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세월을 아껴라.” 주어진 지금을 최대로 활용하십시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 경동교회가 이 일에 앞장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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