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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보와 티의 대결 / 창 50:15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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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보와 티의 대결


구약의 말씀 : 창세기 50:15 ~ 21

들보와 티의 대결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셉에게 전갈을 보냈.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곧 이어서 요셉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서신서의 말씀 : 베드로전서 3: 8 ~ 12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이 구원을 추구하고 연구하였으며, 그들은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일들은 이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일들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 합니다.

복음서의 말씀 : 누가복음 6:39 ~ 42

그 무렵에 마리아가 일어나,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서둘러 가서,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아기가 그의 뱃속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해서,큰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고, 그대의 태 속에 있는 열매도 복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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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께서 누가복음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보면 들보와 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본래 직업이 목수였기 때문에 나무를 자르고 패고 대패질하고 그래서 나무로 대들보를 만드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나무를 만지는 과정엔 나무 조각이나 가루가 날리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들보"는 뭐냐하면, 목수가 대패질해 가지고 만든 집을 지을 때 세우는 석가래, 대들보에서 "대"자를 떼어서 "들보"라고 했습니다.

눈 속에 들보가 들어가면 아마 눈이 보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나무 껍질 조각이나 나무 가루가 눈에 들어가도 눈을 뜨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상대방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자기 눈의 티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대들보를 보고 욕하는 사람도 위선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만약 언급하셨다면 그런 사람들을 작은 위선자라고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세상은, 우리가 보는 인생은, 심지어 교회를 포함한 모든 집단은 모두 싸웁니다. 그들이 무엇을 내세우며 싸우고 있습니까? "네 눈에 티가 있어서 제대로 못 본다. 내가 본 것이 바른 것이다."하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대로 살펴본다면 한쪽은 들보가 있는 것 같고 한쪽은 티가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둘 다 시야가 어두운 것 같은데 누구도 자기 눈먼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눈에 들보가 든 집단이 있고, 티가 든 집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집단은 결코 자기 눈에 들어있는 것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내 눈은 아무 티도 없는 맑은 눈입니다. 당신 눈에만 티가, 들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싸우게 됩니다. 여도 야도, 노도 사도, 정부와 국민도, 언론과 정치권도 이렇게 싸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서는 우리한테 자기편에 서라고 강요합니다. 패거리 싸움의 한 쪽에 서라고 몰아세우는데 굉장히 괴롭습니다. 우리 눈에 있는 게 있느냐고 물으면, 어느 눈에는 보다 큰 들보가 있고 어느 눈에는 보다 작은 티가 있다고 구분해 주겠는데, 우리 눈에는 들보든 티든 아무것도 없고 당신들 눈에만 있다니 답답한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라인홀드 니버는 사회비평가, 정치사상가, 또 신학 윤리학자로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분이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장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인간 사회에는 완전한 선은 없다. 다만 악이 있고 그 악보다는 약간 덜한 악이 있다." 그래서 이분은 "인간 사회는 good and evil 둘이 싸우는 세계가 아니고, evil and lesser evil, 즉 악이 있고 그보다 조금 덜한 악이 있어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이야기한 배경은 모르겠습니다만, evil은 들보요, 티는 lesser evil이니, 덜한 악도 악은 악인데, 왜 악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왜 덜 악한 것을 선이라 하느냐는 항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도 이 테마를 끄집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만 보는 사람을 나무라셨다고 해서, 티는 눈에 넣어두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이란 들보도 빼고 티도 빼내는 것입니다. 들보를 가지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티 가지고도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들보냐 티냐의 대결이 아니라, 들보와 티를 뺀 다음의 시야, 시각, 많은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들보와 티의 대결은 세상을 망하는 데로 이끕니다. 그러나 그것을 뺀 큰 시야와 작은 시야의 협력은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한 사회가 잘 되고 행복하려면 들보와 티의 대결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들보 든 집단과 티 든 집단이 서로의 한계를 시인하고 들보와 티를 빼고서 서로 협력하는 사회가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과제는, 누가 "들보"고 누가 "티"인지를 놓고 티격태격 싸우지 말고, 티든 들보든 그걸 빼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새로운 눈으로 희망을 쳐다보며 그것을 현실화해 가는 것입니다. 눈은 단순히 보는 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눈은 양심의 상징입니다. 우리 양심의 눈 속에는 대들보도 있고 티도 있습니다. 어떻게 할 겁니까? 티와 대들보를 함께 뺍시다. 그래야 우리는 밝은 눈으로 양심의 눈으로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아까 창세기에서 보았습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요셉은 열 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요셉을 너무 편애하다 보니 다른 형제들이 화가 나서 요셉을 죽여 없애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열 한 형제들이 들에서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구덩이에 빠뜨려서 생매장하기로 하고 굴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오가면서 소위 무역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차라리 이들한테 팔자! 요셉을 없애고 돈도 벌자! 이래서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요셉을 산 상인들은 은 이십 냥을 주고 사서 열 일곱 살 난 요셉을 종으로 사서 이집트에 가서 팔았습니다. 당시 이집트를 통치하던 바로 왕의 경호책임자인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아마 몇 배를 받고 팔았을 것입니다.
열 일곱 살 때 종으로 팔린 요셉은 서른 살이 되어서 굉장한 출세를 합니다. 서른 살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꿈을 풀이해 주었습니다. 일곱 살진 소를 보고 그 다음에 일곱 마리의 야윈 소를 본 왕의 꿈을 해몽하면서, 살진 소 일곱 마리는 칠 년 동안 풍년이 들 것을 상징하고, 야윈 소 일곱 마리는 그 다음에 이어 올 칠 년의 흉년을 의미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흉년을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진언했습니다. 왕은 감탄하면서 요셉에게 그 일을 대비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총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보면, 열 한 형제들의 눈에는 분명히 들보가 끼여 있었습니다. 들보가 끼여서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이 사람들은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요셉도 의인, 완벽한 선인일 수는 없습니다. 티 하나는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들보가 티를 팔았던 것입니다. 티는 팔려서 애굽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 요셉은 다행히 총리가 되어 이집트를 흉년에서 구했습니다. 이스라엘도 흉년이 들어 다른 형제가 모두 찾아와서 동생인 요셉에게 절하면서 먹을 것을 구걸했습니다. 요셉이 답합니다. "아버지의 편지도 받았지만, 내가 지금 형님들과 동생을 다 받아들여서, 생명을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자식들도 돌보겠습니다." 비록 한 형제를 다른 형제들이 팔았지만, 팔린 형제가 총리가 되어 나머지 형제를 구하는, 말하자면 해피 앤딩의 역사입니다. 티가 대들보를 구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형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뜻합니다. 그 중에 요셉 하나가 팔렸다는 말은 전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 중에 한 지파가 완전히 팔렸다는 뜻입니다. 열한 지파가 한 지파를 배신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배신한 이스라엘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분명히 팔았다는 겁니다. 들보가 눈을 가려서, 가치관이 뒤바뀌어서 한 지파를 팔고 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비록 배고픔을 해결하기는 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서 전체 이스라엘 백성은 4백 년 동안 이집트에서 굴욕적인 종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들보의 결단이 빚어낸 역사적 귀결입니다. 밥은 먹어서 좋으나 4백 년 노예살이를 그 대가로 얻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 한 형제들이 와서 요셉에게 사정했을 때, "우리가 범한 잘못을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우리는 들보였습니다." 했을 때 요셉이 보복했음직 한데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요셉의 말은 이것입니다. "나도 티가 있는 인간이니, 나도 보복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저의 티눈을 빼주셨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제 눈에서 그걸 빼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들보와 티의 대결은 없게 되었고, 여러분은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신약시대 예수의 역사로 다시 무대를 옮겨 보겠습니다. 이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하나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로 와서 향유를 붓는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이 장면은 이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오래 간직했던 향유를 예수에게 바를 때 향유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을 대표해서 가룟 유다가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 향유를 스승에게 바르지 말고 차라리 팔면 3백 데나리온은 받을텐데, 당시 하루 일당이 1데나리온이었으니, 3백 데나리온이면 일년치 임금에 해당되고, 그 돈이면 3백 명은 도울 수 있을텐데, 왜 이것을 팔아서 선한 일을 하지 않고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정당하고도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판단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오히려 유다를 꾸짖습니다. "이 여자가 나한테 베푸는 것을 그대로 놔두어라. 그뿐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성이 한 일을 계속해서 전파하라."

예수의 판단과 가롯 유다의 판단이 부딪칩니다. 요한복음서는 가롯 유다가 3백 데나리온의 값이 나가는 향유를 팔면 팔아서 남긴 이득을 보관하면서 도둑질하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이 있든 없든 간에 유다는 향유를 팔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 동안 보유했던 향유를 예수에게 드리고 싶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오늘 21세기의 지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항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성적이고 합리적인 가롯 유다! 당신 눈에는 향유만 보입니까? 향유를 가진 나 인간 막달라 마리아는 얼마짜리입니까?"
세상에는 많은 물건이 있습니다. 재산이 있습니다. 지식도 있고, 직위도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인간이 보입니까? 물건이 보입니까? 상식적인 가룟 유다의 눈에는 물건만 보입니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명분 하에, 향유 판 돈을 관리하면서 그 돈을 도둑질하리라는 흑심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눈에는 물건만 보였지, 물건을 가진 막달라 마리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인간성은 보지 않은 채, 생명은 보지 않은 채, 인간이 가진 물건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이 여자를 놔두어라. 이 여자도 값이 있다." 가룟 유다가 못 보는 다른 측면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물건을 판 돈을 가지고 나가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도와서 나눠주는 것만 보았을 뿐 다른 한 가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 물건을 팔면 누가 삽니까? 있는 사람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향유를 바릅니까? 가룟 유다는 답이 없습니다.
제가 겪은 일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완도에 갔을 때 전복을 기르는 집에 갔는데 전복이 너무 좋아서 전복을 먹기로 하고, 좋은 전복을 갖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전복은 길러 가지고 전부 일본에 수출하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좋은 것은 드릴 수 없고, 좀 시원찮은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컷 길러 가지고 실지로 먹는 건 일본 사람들이구나. 외화벌이라는 이름 하에..." 시골 가셔서 무, 배추 좋은 걸 사려고 해보십시오. 차라리 좋은 걸 사려면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가라고 합니다. 좋은 것은 그들에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제가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가서 회 한 그릇을 시켰습니다. "회 싱싱한 것 주십시오." "싱싱한 회는 여기서 찾지 마시고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십시오. 여기는 없습니다."
애써서 키운 것은 막상 누가 먹습니까? 생산자, 어려운 사람이 먹는 게 아닙니다. 향유를 팔면 그걸 누가 바릅니까? 향유는 아마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는 예수가 아니고 그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하던 대제사장이 살 겁니다. 로마의 황제가 바를 수도 있습니다. 서기관이 살 수도 있습니다. 누가 쓰는지는 생각 안 하고, 팔아서 이득 남겨서 나눠먹을 생각만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졌습니다. "이걸 팔면 나를 핍박하고 우리 선생님 핍박하는 대제사장이 바르지 않겠는가! 나는 이 향유를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주님한테 발라서 그분에게 봉사하겠다." 막달라 마리아가 했음직한 생각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 하나님께 기도해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분, 차라리 우리 선생님에게 기름을 발라 드리고 이분으로 하여금 기적을 행하시게 하는 것이, 향유 한 병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류에게 봉사를 하는 것이겠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들보나 티가 있는 눈 가지고는 가롯 유다 이상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들보와 티를 벗고서 바라보는 세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세상은 선과 악의 대결장은 아닙니다. 악과 악이 대결하는 세상에서 작지만 선을 찾아가는 노력, 이 노력을 오늘 하십시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이 세상은 멸망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그 속에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작은 공간이나 길들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속칭 말하는 희망을 향한 제3의 길, 진리의 길, 진실의 길, 그 길은 우리가 찾을 수 없습니까? 무한한 대결 속에서 냉소주의가 싹트게 하지 말고 새로운 샛길을 찾아서 작은 빛으로 갈 수 없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 비록 학벌은 높지 않고, 가진 것도 적고, 몸도 약하나 그 속에 흐르는 작은 새로운 판단과 가치관, 그걸 우리가 오늘 받아들일 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혁명은, 변화는 작은 데서 시작하지, 큰 데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이 말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들보나 티가 있으면 두 마음이 듭니다. 서로 동정하십시오. 자비를 베푸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겸손하십시오. 악을 악으로 갚기보다 악을 선으로 갚아 보십시오.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모욕을 용서로 갚아 보십시오.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봅니다. 주님의 귀는 의인들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들보를 가지고 옳다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들보가 있습니다. 들보를 빼주십시오. 볼 수 있는 공간을 주십시오." 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작은 행실, 작은 빛의 현실, 그 밝은 현실을 보고픈 것이 의인의 간구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보를 통해서 보는 절망, 이것은 묻어 버리십시다. 들보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틈새로 볼 수 있는 가느다란 시력을 통해서 보는 희망의 샘을 지금 팔 수 있잖습니까? 우리 개인도, 우리 가정도, 사회도 이 새로 파는 노력, 이거 한번 해보십시다. 예수께서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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