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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짓예언 - 참예언 / 렘 23:16 . 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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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예언 - 참예언

구약의 말씀 : 예레미야서 23:16 . 30~32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 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한 뿐이다. 그러므로 보아라, 내 말을 도둑질이나 하는 이런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 나 주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제멋대로 혀를 놀리는 예언자들을, 내가 대적하겠다 ! 나 주의 말이다. 허황된 꿈들을 예언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내가 대적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들은 거짓말과 허풍으로 내 백성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하는 자들이다. 나는 절대로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칠 수 없는 자들이다. 나 주의 말이다."

서신서의 말씀 : 요한 1서 4:16~21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이것으로써 사랑은 우리에게서 완성된 것이니, 곧 심판 날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형벌과 맞물려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 요한복음 5:39~47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너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내가 알고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는 나를 영접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할 것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를 걸어서 아버지께 고소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를 걸어서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것이 나를 두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나의 말을 믿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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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어디엔가 자신을 등록해야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일정한 기간 내에 동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데, 출생신고를 마치면 번호를 하나 부여받습니다. 소위 주민등록 번호입니다. 이 번호는 평생토록 변하지 않습니다. 열세 자리 숫자에 담긴 인생입니다. 이 주민등록증에 있는 열 세 자리의 번호에는 140여 개의 개인 신상 정보가 담긴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최근에 법이 개정되어서 78개가 행정전산망에 연결되어 공동 관리된다고 합니다.

아마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는 "번호판 인생"이 된 겁니다. 우리의 신상 정보가 완전히 번호판에 담겨서, 마치 누구나 볼 수 있는 투명한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인간처럼 살아갑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제국에서도 개인에게 번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부여하는 번호는 주민등록 번호가 아니고 소위 보험카드 번호입니다. social security number라고 해서, 사회보장 카드 번호입니다. 우리처럼 개인 정보를 입력하는 카드는 아닙니다.

이런 사회에 살면서 우리의 사생활은 우리 자신만 알고 있는 게 아니고, 남들도 다 아는 공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언제가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논란이 되었고 지금도 논란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도청과 감청입니다. 법적인 절차를 밟아 감청하는 경우도 있고 불법적인 도청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소리를 전부 훔쳐 듣습니다.

오디오가 생겼을 때 우리는 기술혁명이라고 했습니다. 소리를 담아내는 기술은 오늘날에는 굉장하게 발전되었습니다. 오디오를 통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CD판에 녹음된 소리도 듣고, 압축된 파일에서 재생된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이런 발전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순기능도 있고, 말하고 듣는 소리를 감청하는 역기능도 있습니다. 모든 기술문명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런 기술을 어떤 사람이,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말하는 소리, 듣는 소리만 감청하고 도청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에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잡아냅니다. 넓은 주차장 공간에 가보면 폐쇄회로TV라는 CCTV가 걸려 있습니다. 교통상황을 알려 주느라고 CCTV를 통하여 모든 고속도로의 상황을 지켜봅니다. 직장에서도 CCTV 회로가 있어서 사원들이 제대로 일하는지 놀고 있는지 다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시내버스 운전사 머리 위에 소규모 CCTV 회로를 설치해 놓고 운전사가 담배를 피우는지, 농담하는지, 친절한지, "삥땅"을 하는지 감시한다고 합니다. CCTV 회로 역시 좋은 목적에 사용하면 유용한 것이지만, 악용하게 되면 우리는 완전한 감시체제에서 꼼짝못하고 살게 됩니다. 요즈음에는 오디오와 비디오의 감시 기능을 고도화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서, 온 지구를 감시망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구약성서에도 오디오와 비디오를 연상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활동입니다. 듣고 보고, 총괄적으로 감지하고, 조직화하고 분석하고, 그리고 옳고 그름을 지적해주는 것이 예언활동이었습니다. 예언이 다른 게 아니고 오디오, 비디오 활동입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오디오나 비디오 기계만 없었을 뿐, 왕이 말하는 것, 백성이 탄식하는 소리 다 듣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왕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발견해서 질타도 하고 축복도 해주었습니다. 오디오 기계, 비디오 기계가 없었을 뿐, 이런 오디오와 비디오의 감찰과 감시 기능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세 종류의 인간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류가 정치를 관장하는 왕이고, 두 번째 부류는 신앙의 문제를 관장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왕이 하는 일과 제사장이 하는 일, 정치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예언자들입니다. 오늘은 세 부류 중에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서, 사사기 등이 있는데, 이 책들은 주로 왕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신명기나 민수기 등을 보면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들을 다 적어놓았습니다. 엘리야 등에 관한 전기 예언자에 관한 기록으로부터 시작해서 후기 예언서, 곧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 이르는 대예언서, 소예언서들의 기록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예언자들의 활동을 전해줍니다.

오늘날의 국가에도 왕의 기능이 있고, 제사장의 기능이 있고 예언자의 기능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는 오늘의 용어로 삼권 분립적 하나님의 통치기구였다고 봐도 틀림없을 겁니다. 물론 오늘날의 삼권분립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듣고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비판하고 교정하는 예언자적 기능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단지 다르다고 하면, 듣고 보기 위해 오늘날 사용하는 것과 같은 그런 도구나 기술문명은 옛날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에도 못했고,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은 다 녹음할 수 있고, 우리가 본 것은 사진기나 비디오로 다 촬영하여 판단할 수 있으나, 사람의 가슴속에 있는 생각은 녹음도 촬영도 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 속에서 굴리는 생각만큼은 담아낼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도 속을 아는 것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다만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 것을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옳은지 그른지 판단했을 뿐입니다. 판단의 기준은 항상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이혼을 하고 싶으면 눈으로 볼 수 있는 비디오적 증거만 제시하면 되었습니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소문에 의해서 귀로 듣고 말해진 것이 사실로 확인되면 처벌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서.

구약시대의 고민은 이러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은 것은 예언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으나, 가슴속에 담긴 속뜻은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가슴속에 담긴, 눈에 보이지 않고 말로도 할 수 없는 인간 심연에 있는, 역사 심연에 있는 인간의 뜻,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메시아를 기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시니,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온다고 한 그 사람입니까?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그런 뜻에서 새로운 예언자입니까? 예수가 예언자라면, 그것은 메시아로 서의 예언자입니다. 그냥 예언자가 아닙니다. 메시아적 예언자란 말은 속에 담겨 있어 보이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것까지도 파악하여 판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구약시대는 공의로 대표되었으나, 예수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는 공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한 사람만 아니라, 살인하고 싶은 욕망을 품은 사람도 살인자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사람만이 죄인이 아니고 간음의 생각만 품어도 범죄자다."예수께서는 율법의 차원을 더 높은 복음의 차원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의 모든 기준이 하나님의 공의라면, 메시아 된 예언자 예수가 말한 예언의 기준은 공의 속에 담겨진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에서는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은 그 이름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심연을 뚫고 들어갑니다. 공의는 거죽의 증거밖에 취급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심연까지 꿰뚫고 들어갑니다.

구약의 예언이 신약의 예언에서 완성되었다는 말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공의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용해되고 융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약이 신약에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겉으로 짓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속으로 생각하는 만으로도 죄입니다. 구원도 율법에 따른 겉모양을 갖추는 것만이 아니라 인생의 심연이 뒤집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복도 거죽의 복만 아니라 영혼 가득히 넘치는 복이 있어야 참된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있는 예언!

1959년에 호주에서 자그마한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알버트 나마티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당대 굉장히 유명한 원주민 출신 화가였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화가여서, 소위 백호주의를 주장하며 법으로 원주민에게는 술 마시는 것을 엄격히 금하던 백인 정부가 이 나마티라라는 화가에게는 술을 마실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음주의 권리를 부여받자, 포도주를 사다가 마십니다. 이 사람에게 고민이 생깁니다. 호주 백인들이 만든 금주법에 따르면 이걸 다른 사람과 나눠 마시면 안되고, 원주민들의 생활법에 따르면 혼자만 먹고 마시면 죽이게 되어 있으니, 나눠 마시면, 실정법 위반이요, 혼자 마시면 원주민의 생활법을 어겨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결단합니다. 그리고 백인들이 만들어놓은 금주법을 위반하고, 자신이 속한 종족인 원주민들의 도덕법에 따라서 포도주를 가족과 친지와 나눠 마셨습니다. 이게 발각이 되어 경찰에 체포되어서 법원에서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징역을 살고 나오자마자 몇일 안되서 죽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호주에 있는 원주민들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우리들에게 법은 뭡니까? 공의란 뭡니까? 하나님의 정의란 뭡니까? 왜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만들어놓은 법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심판받아야 합니까? 이것이 거대한 운동이 되어서, 지금 여러분이 아는 호주 원주민들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법적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피부색이 흰색이냐 갈색이냐에 상관없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쏟으시는 깊은 사랑, 그 사랑이 없는 모든 법과, 정의와 공의라고 하는 것은 다 헛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찾읍시다." 이 호소를 들고 나온 것이 호주의 교회였습니다. 그것도 백인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호주교회는 최근에 와서는 물론 상징적인 행위이기는 하지만, 총회장을 뽑을 때 백인 한 분, 원주민 한 분 이렇게 돌아가면서 뽑습니다. 외국교회에 대표를 보낼 때도, 원주민 대표가 전체 호주교회를 대표해서 참석할 경우도 상당히 많습니다.

인간이 정의와 달리, 하나님이 세우시는 정의에는 반드시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빠진 공의는 공의가 아닙니다. 유대교의 율법이, 구약시대의 율법이 실패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내세웠으나 그 공의 속에 참된 희생적 사랑을 담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이데올로기, 성전 이데올로기와 이스라엘 민족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퇴락의 상태를 구한 것이 예수의 사랑의 예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이 가득한 새로운 예언을 받고 있습니다. 복도 겉에 보이는 복만이 아니라, 물질의 복만이 아니라 마음의 복, 영혼의 복을 받아야 하듯이, 죄에 대한 회개는 겉으로 나타난 행위에 대해서만 아니라, 속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죄까지도 회개해야 합니다. 벌이냐 복이냐 하는 것이 이제는 겉에 나타난 사실만이 아니라 속마음에 의해서 판가름납니다. 그 속마음은 오디오나 비디오로 포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속생각과 뜻은 지금 하나님나라의 사랑의 법이라는 음반 속에 다 담기고 있습니다. 벗어날 길이 없고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선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선도 행하십시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지금 보이는 생명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까지도 복으로 받으십시오. 구약시대에 선포되던 공의의 예언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희생적 사랑 속에 용해되어서, 새로운 예언으로 우리한테 와야 합니다. 그 새 예언의 목적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랑이 깃든 공의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합니다. 이것은 오늘 요한복음을 통해서, 또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주는 복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많은 원주민들만 죽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종교재판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까? 장로교를 만든 요한 칼빈은 훌륭한 사람이긴 하나, 자기가 만든 교리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이단으로 몰아서 화형에 처했습니다. 종교개혁은 훌륭했지만, 타락한 천주교의 교권주의를 없앤 것은 옳은 일이었지만, 왜 수많은 사람들을 이단이라 하여 화형에 처해야 합니까? 왜 종교전쟁 때문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려야 합니까? 사랑이 없는 공의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가난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모의 눈물이 섞인 밥을 먹었습니까? 눈물이 있는 밥, 그 밥은 우리 자녀들에게는 전설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눈물이 있는 밥,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우리는 교육해야 합니다. 부모의 눈물이 담긴 밥! 그 밥에 담긴 눈물은 반드시 사랑의 눈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밥을 먹이면 자녀들은 인생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과 인간의 사랑이 깃든 밥은 우리의 일상적 생명은 줄 수 있으나, 영원한 생명은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음식으로 삽니다만, 그러나 음식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말씀이 들어가야 지상의 생명도 영원한 생명도 함께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과 공의의 말씀이 우리의 밥과 삶과 정력과 헌신 속에 들어와야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행복은 성령이 보증하는 행복입니다.

십자가에서 던져진 눈물과 피로 물든 빵, 그 빵은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 부활의 빵으로 거듭납니다. 이 빵을 여러분 드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예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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