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저버릴 힘 - 발휘할 힘 / 렘 1:4 ~ 10

  • 잡초 잡초
  • 149
  • 0

첨부 1



  저버릴 힘 - 발휘할 힘


구약의 말씀 : 예레미야서 1:4 ~ 10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모낼 예언자로 세웠다." 내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나 주의 말이다." 그런 다음에, 주께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겠다."


서신서의 말씀 : 사도행전 9:3 ~ 6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복음서의 말씀 : 마태복음 9:35 ~ 10:1

예수께서는 모든 성읍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모든 질병과 모든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악한 귀신을 내쫓고 온갖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 주게 하셨다.



--------------------------------------------------------------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새로운 예언자로 인침을 받고서, 절망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러 가는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이런 항변을 합니다. "하나님 저는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예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이 백성한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예레미야를 나이 젊을 때에 예언자로 인치셨습니다.
이스라엘 전통에서 보면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은 제사장 역할만 하면 족합니다. 예언자 전통은 따로 있었습니다. 예언자 전통에 속해 있던 가문의 사람들은 선이 굵고 또 마음도 강한 반면,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은 온유하고 사랑도 깊고 인자한 편입니다. 위로해야 하는 제사장, 정의의 사자처럼 함성을 질러야 하는 예언자들, 그래서 두 개의 전통은 약간씩 달랐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체질상 예언자보다는 제사장 쪽에 속합니다. 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 제사장적 체질을 타고난, 사랑과 인자한 마음이 풍부했던 사람, 그 사람을 지금 야웨 하나님은 두려움과 좌절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 속으로 들여보내면서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할 줄 모릅니다. 저는 너무 어립니다."라는 예레미야의 항변은 당연합니다.
예레미야가 주변을 살펴보고 자기가 보냄 받을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영속할 줄 알았던 자기의 조국 유다땅이 바빌론한테 완전히 짓밟혀서 식민지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이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하고 숭상하던 야웨 하나님을 섬기던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나라도 없고 신도 없고! 주변을 둘러보니 바빌론 사람들뿐입니다. 야웨 하나님 대신에 우상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유일신이 없어지면 우상이 생깁니다. 나라가 없어지면 다른 나라가 와서 지배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무어라고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내용은 단순합니다. "우상을 타파하거라. 거짓 신들을 타파하거라. 그리고 좌절에 빠진, 도탄에 빠진 백성에게 야웨 하나님께서 다시 새 역사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여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좋은 말이지만,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식민지 시절에 압제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곧 나라가 해방됩니다" 하고 선포하면 결과는 뭡니까? 일제 식민지 때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곧바로 뒤따르는 것은 체형이요, 처벌입니다. 그걸 각오하고 독립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완전히 제거하도록 촉구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선포, 정치적인 선포, 사회적인 선포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대답은 이렇습니다. "저는 말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슨 명령이든지 내리거든 가서 말하라."고 하시면서 두 가지 약속을 합니다.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네 입술에다가 내 말을 담을 것이니, 너는 혀만 놀려라." 예레미야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혀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말할 줄 모른다니? 누가 예레미야더러 말하라고 했습니까? 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예언자란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혀에 담긴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것이 예언자입니다.
예언자의 말은 엄청난 효과가 있었습니다. 파급 효과가 컸습니다. 그것은 예언자의 말 잘하는 언변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의 혀를 통해서 울려퍼지는 야웨 하나님의 단순 소박한 말씀이 백성들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영성이란 예언자들의 혀를 통해서, 자기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혀를 통해서 전파되는 말씀 속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게 영성이지 다른 것이 영성이 아닙니다.
두 번째 약속입니다. 너무 어려서 못 가겠다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너를 보내든지 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 그리고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의 말씀은 "가는 것은 네 몸이지만, 네 몸을 움직여서 가게 하는 것은 나 야웨이다. 너는 다만 내 말을 전하는 매체가 되어다오. 내 말하는 혀가 되고, 나를 담는 그릇이 되어다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도로 부름받은 것은 말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건강해서도 아닙니다. 아름답게 보여서도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혀 속에 당신의 말씀을 두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야웨 하나님의 임마누엘, 몸으로 말씀으로 임재하신 하나님, 오늘 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냅니다. 가십시다. 나가십시오.
예레미야는 지금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계획만 가지고는 좌절의 현장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온통 무너진 것뿐입니다. 민족의 정의도, 종교의 힘도, 사람의 정서도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수많은 사람이 전쟁포로로 잡혀서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우리 나라도 6. 25 전쟁통에 많은 사람들이 인민군한테, 또 인민군은 국군한테 잡혀서 여러 곳에서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포로수용소에서 질병 하나가 생겨났습니다. 포로수용는 주변을 전부 철조망으로 둘러쌉니다. 포로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하루종일 철조망만을 보고 삽니다. 밤이 되어 잠들 때에도 철조망에 켜진 감시용 전깃불 아래 번뜩이는 철조망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사들이 가서 이 사람들을 치료하다가 공통점을 하나 발견해 냈습니다. 그건 뭐냐 하니까, 이 환자들 모두가 다 우울증에 걸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우울증 걸린 사람은 살이 찌지 않습니다. 전신이 마비될 정도로 쇠약해집니다. 만사가 귀찮아서 누워있기를 좋아합니다. 하루종일 투덜되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면담을 통해서 상담해 본 결과, 그 원인을 밝혀 냈습니다. 원인은 철조망이었습니다.
철조망 안에 갇힌 사람은, 철조망은 자기의 희망을 앗아가는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철조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체념하게 되면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집니다. 만사가 귀찮고 불평스러워집니다. 그들을 치료한 군의관들이 이 증상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철조망병"이 그것입니다. 영어로는 barbedwire-sickness입니다. 철조망 질병. 예레미야가 앓고 있었던 병, 그건 바로 철조망 질병과 같습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망해버린 나라, 파괴된 성전, 좌절에 빠진 백성, 우상의 난립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다 영적, 물적, 물리적 철조망일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야웨의 말씀입니다. "네 입으로 말할 생각 말고, 네 입술에 담기는 내 말만을 생각하거라. 네가 어리다고 생각지 말고, 너와 함께 있는 나 야웨를 생각하라."
철조망만을 보지 말고, 철조망 뒤에 펼쳐진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철조망만 보지 말고, 철조망 밑에 핀 들꽃은 볼 수 없습니까? 언젠가는 철조망을 벗어나서 사랑하는 아내와 형제들을 만날 희망을 굳게 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 가고 싶은 고향으로 언젠가는 간다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현실에 있는 철조망만 보고 현실을 넘어선 미래의 희망은 보지 않습니까? 희망, 철조망 너머에 있는 새로운 지평의 희망!
오늘날 우리 나라는, 6. 25 전쟁의 황폐함 때문에 남과 북 사이는 물론이고, 남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찢어지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는 좌절에 빠져있는 사람 많습니다. 남한이라 이름하는 우리 나라는 북쪽을 보되, 철조망만 보았습니다. 북쪽은 남한을 보되, 겨레의 땅으로 보지 않고 철조망만 보았습니다. 철조망 뒤에 있는 남한이라는 나라, 그 사람들을 못 보았습니다. 우리는 북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철조망만 보지 않았습니까? 철조망만 보고 북을 재단하지 않았습니까? 좌절하지 않았습니까?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악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북이 똑같습니다.
철조망은 포로수용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북한 사이에도 있습니다. 언제까지 철조망만 보렵니까? 북은 언제까지, 남은 언제까지 이럴 겁니까? 철조망은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놓은 휴전선에만 있습니까? 여러분 가정에는 없습니까? 자식과 부모가 서로 사의의 철조망만 보고 살면 좌절과 절망뿐입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아니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너와 나 사이에, 노동자와 기업가 사이에 철조망만 보인다면, 그 나라와 그 가정, 그 사회에는 망할 수밖에 없지 안겠습니까? 좌절밖에 없지 안겠습니까? 철조망 건너편에 있는 새로 열리는 파란 하늘, 그것은 남들만 즐길 수 있는 꿈입니까? 우리의 희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철조망병! 그 병부터 고칩시다. 야웨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철조망을 걷고, 내가 너희 혀에 담아주는 말씀을 전하여라. 말씀이 작동할 것이다. 내가 가라 하는 대로 가거라. 네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간다." 임마누엘 하나님, 그분이 가십니다. 모세는 자기의 좌절과 운명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라는 말씀을 다섯 번이나 거부했다고 출애굽기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다 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라고 했는데, 딴 길로 가다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모세 이야기도 알고, 요나 이야기도 압니다. 그리고 자문 자답합니다. "나는 어떻게 할건가? 나는 못 가겠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는 건 네가 아니다. 가는 건 나 야웨다. 말하는 건 네가 아니다. 누가 네 말을 듣고 감동 받겠는가." 누가 야웨의 말씀이 아닌 설교자의 말을 듣고 감명을 받겠습니까? 설교자의 입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감명이 됩니다. 말씀을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찬양 속에 담긴 하늘의 찬양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 사도 바울의 얘기가 연속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름이 본래는 사울이었다는 건 다 압니다. 사울은 당시 유대사람으로서 최고의 지성을 갖춘 지성인, 지식인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사람은 유대교 백성으로서는 최고라 할 만큼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의 깊이와 지성, 이 두 개를 함께 가진 사람, 그의 이름이 사울입니다. 이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예수라는 얼빠진 사람에게 빠진 백성들이었고, 그래서 이 백성들을 건져주어야 한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혹세무민을 일삼는 예수쟁이들을 잡아다가 처벌해야 했습니다. 그는 사명감에 불타서 다메섹으로 갑니다.
그 도상에서 사울은 자기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를 환상 가운데 만납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예수쟁이를 잡으러 가는 사울인데,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네가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괴수이니라." 어떻게 이런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울은 물리적 힘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유대교적 철학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환상 가운데 만나는 순간, 물리적 힘을 숭상했던 사울의 유대교가 완전히 깨지면서 십자가의 무력함이 또 다른 힘이 되어 그를 압도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결심합니다. 이제 물리적 힘의 갈망을 버리고 무력함의 상징인 십자가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겠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서의 예수만 알리기로 하겠습니다. 가장 무력한 십자가, 가장 어리석은 십자가, 그것이 힘의 근원임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이 유념할 게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눈이 멀어서 3일 동안 보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일이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뜻은 이것입니다. 사울의 힘에 관한 지금까지의 인식, 지식, 철학, 사고방식, 생활방식이 이제, 눈이 완전히 안 보이듯이 다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울 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의 세계입니다. 가치가 완전히 뒤바뀐 세계입니다. 우리가 강력하다고 생각한 힘은 무기력하게 되고, 가장 약하다고 생각했던 무력함이 진정한 힘이 됩니다. 그 힘을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힘," "힘없는 자의 힘"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본 것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무력함에서 부활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는 새롭게 나타난 이 힘에 압도당합니다. 이전의 힘은 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3일 동안 장님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힘! 그래서 사울에서 바울로 전환합니다. 바울로 전환한 사울의 입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분," 그 말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엄청난 변화와 파고를 몰고와서 오늘 경동교회도 만들게 해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볼품이 없었습니다만, 임마누엘 하나님 그분이 사도 바울의 발자국마다 함께하셨습니다. 역사가 뒤집어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회개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완전히 다른 힘만 받아들입니다. 부활하신 그분의 새로운 힘을 가집니다. 진짜 힘은 십자가의 죽이는 힘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힘입니다. 그 당하는 힘만이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힘으로 등장합니다."
에서가 자기 동생 야곱한테 장자권을 판 이야기를 다 압니다. 에서는 바보가 아닙니다. 다만 당장 배고픈 에서한테 필요한 것은 팥죽 한 그릇이었습니다. 현실의 만족이 우선입니다. 배고프면 현실을 즐길 수 없습니다. 일단 먹었습니다. 야곱은 그 만족을 주는 대신 장자권을 넘겨달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결국 손에 잡히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판 것입니다. 오늘날 이기주의에 빠진 우리의 모습과 무엇이 다릅니까? 에서는 미래를 팔고 현재를 얻습니다. 좋은 말로 말하면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러나 한번 판 미래는 다시는 되살 수 없습니다. 사울은 현실의 힘에 사로잡혀서 미래의 힘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미래를 주고 현실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미래는 사도 바울의 설교 속에서 현재가 되어 사람들을 감화시켰습니다.
예수께서는 추수할 일꾼들을 찾으십니다. 사도 바울만 아니라,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를 보내고 싶어하시는데, 여러분 역시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나는 힘이 없습니다. 말할 줄 모릅니다. 아직 어립니다. 나한테 대가를 주십시오." 그럴 때 우리가 들을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가거라. 내가 너희 혀에 내 말을 담을 것이다. 너희 가슴에 내 사랑을 담아줄 것이다. 내 십자가의 사랑을 줄테니 그걸 가지고 가거라. 가는 건 너희가 아니라 나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은 하나님을 담을 그릇이 적다는 뜻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얘기를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절망이라는 병, 아까 말한 철조망 안에서 철조망만 보이는 절망이라 이름하는 병, 이병을 키에르케고르라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습니다. 그 병은 어떤 병입니까. 그 병은 자기를 상실하는 병이며, 동시에 자기를 만들어준 창조주와의 관계가 끊어진 병입니다. 이 병은 인간을 반드시 죽음으로 내몹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습니까? 키에르케고르의 처방은 이렇습니다. 상실한 자기를 찾기 위해서는 자기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어떻게 믿습니까? 자기를 창조해주신 하나님을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믿음에 기초한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이 처방입니다.
옳은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적극적 참여입니다. 좌절에 빠지면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벗어나려고 해야 합니다. 결단을 내리고 사력을 다하여 뛰면 우리를 둘러싼 절망에 큰 구멍을 뚫을 수 있습니다. "사력을 다한다"는 말에 유념해 필요가 있습다. 사력을 다한다? 죽을 힘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살기 위해서 죽을 힘까지 다한다는 뜻입니다.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는 늘 삶 가운데 있습니다. 미래의 희망을 위해서 현재 고통을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과 동시에 하나님과 협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일할 생각은 안 하고, 믿기만 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십자가는 있지만 부활은 아직 멀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깊게 하십시오. 그리고 사력을 다해서 뛰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일하십시다. 사력(死力)만이 아니라, 생력(生力)을 다해서 한번 뛰어 보십시다. 부활이 보장합니다.
오늘 우리를 보내면서 예수께서 이렇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도 오늘 현대판 철조망들이 많을 겁니다. 내가 악한 귀신을 쫓아내 주겠습니다. 악한 귀신이 철조망입니다. 온갖 질병을 쫓아내겠습니다. 온갖 허약함도 다 고쳐주겠습니다. 여러분을 짓누르고 옭아매는 철조망을 제거해 줄테니, 그 철조망 뒤에 있고 그 위에 있는 파란 하늘, 곧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그걸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 아시지요. 저도 그 영화를 볼 때마다 감명을 받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영화음악 중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에델바이스"(Edelweiss)입니다. 알프스 산에 가면 에델바이스라는 조그만 꽃이 있습니다. 저도 봤는데, 볼품없게 생긴 조그마한 고산식물입니다. 그런데 이 꽃은 아주 작지만 추운 겨울에 꽃망울이 맺히고 봄이 되면 활짝 피어납니다. 겨울을 견디고 봄에 꽃을 피웁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이 꽃으로 자기들의 확신을 표현했습니다. 히틀러의 군대, 히틀러의 무력에 지금 추운 겨울처럼 짓밟혀 있지만 우리는 꽃망울을 맺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피어납니다. 에델바이스! 우리 나라에도 에델바이스와 똑같은 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설악산에 있답니다. 저는 경동교회에도 에델바이스가 피어나길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 부활의 꽃이 피어납니다. 그 꽃이 여러분의 꽃이길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