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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 사 63:7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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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구약의 말씀 : 이사야서 63: 7 - 9

나는 주께서 베풀어 주신 변함없는 사랑을 말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일로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신 은혜, 그의 긍휼과 그의 풍성하신 자비를 따라서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크신 은총을 내가 전하렵니다. 주께서 이르시기를 "그들은 나의 백성이며,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이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사자나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께서 친히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


서신서의 말씀 : 사도행전 13: 26 - 31

아브贊纛?자손과 여러분 가운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말도 깨닫지 못해서, 그를 정죄함으로써, 예언자들의 말을 그대로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일만한 아무런 까닭도 찾지 못하였지만, 빌라도에게 강요하여 예수를 죽이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에 대하여 기록된 것을 다 행한 뒤에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와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백성들에게 그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 요한복음 21: 4 - 8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바닷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고 물으셨다. "못잡았습니다."하고 그들이 대답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지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였다.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라는 말을 듣고서 벗은 몸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배를 탄 채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그들은 육지에서 백 자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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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을 만나러 가신 곳은 갈릴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미 예언했습니다. 부활하면 반드시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무덤을 지키던 천사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으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으면 주님의 선교의 출발점인 갈릴리로 가십시오."

오늘 이야기는 이 갈릴리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갈릴리는 공생애를 시작한 곳입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며 복음을 처음으로 선포한 곳입니다. 열두 제자들을 택한 곳도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고기 잡던 어부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신 곳도 갈릴리 바닷가였습니다. 오늘 바로 그곳,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던 갈릴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었을 때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서의 기록에는 "오른편에 던져라" 하지 않고 "깊은 곳에 던져라" 했습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른쪽이 깊은 쪽이라고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이란 누가는 그곳을 "오른쪽"이라고 표현했고, 본문을 기록한 요한은 "깊은 곳"이라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물론 그 표현들에는 각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적 의도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허탕친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대로 오른쪽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헤아려 보았더니, 백 쉰 세 마리의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엄청나게 많이 잡혔습니다. 성서에는 여러 가지 숫자가 나오는데요. 이 숫자 자체가 그리 의미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하필 백쉰세 마리라고 기록했는가에 대해서는, 초대교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해석도 하고 해명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초대교회 교부인 어거스틴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153마리 물고기 숫자를, 기도하고 생각해본 결과 이렇게 해석합니다. 구약시대에는 10을 완결된 숫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명도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완전 숫자는 7입니다. 구약의 완전 숫자 10과 신약의 완전 숫자 7을 합치면 17이 됩니다. 이 17을 1부터 시작해서 1 더하기 2, 3, 4 해서 17까지 더해 보았더니 그 숫자가 153입니다. 물고기 153마리와 딱 맞아떨어집니다. 어거스틴이 내놓은 숫자 풀이입니다.

그 숫자 풀이가 옳든 그르든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신약과 구약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로 아울러서 물고기 153마리로 표현하려 했다고 본 것은 역사 해석상 의미가 있습니다.

어거스틴 이전에, 지금은 이집트에 속한 지역입니다만,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에
교회가 크게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정교회에서는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초대교회의 유일한 교구 중의 하나로 숭상합니다. 이 교구의 교구장은 씨릴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씨릴" 하면 정교회에서는 존경받는 귀한 교부입니다. 이분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100이라는 숫자는 이방인을 말하는 것이고 50은 유대인을 말한 것으로, 합하면 150인데, 여기에다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는 3을 더하면 153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류, 그러니까 물고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예수 당시 소위 1세기에 지구상에 살
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고기를 연구 조사해봤더니, 그 종류가 153종이라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사실을 안 요한이 153이라는 숫자에 자기 나름의 신학적 해석을 담았다고 보았습니다. 요한이 갈릴리 바다의 물고기 종 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가정에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만, 다만 중요한 것은 153마리로 표현되는, 그물을 끌어올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은 제자들이 크나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으신 다음에, 절망과 좌절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국 다시 결심한 것이 옛날로 돌아가자, 예수를 만나기 전의 그 원점으로 회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삼 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녔던 과거의 시간에는 일단 엑스 표(×)를 치고, 없던 일로 여기고, 다시 옛날 직업으로, 갈릴리의 그 해변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제자들은 어부가 되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나간 삼 년 간의 과거 세월을 건너뛰어 어부로 살았던 그 이전의 역사를 되살리려고 했지만 그 역사는 되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더욱더 좌절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원점으로 찾아와서 제자들에게 다시 말합니다. 그 말은 "나를 따르라"가 아닙니다. 그들의 직업을 활성화시킵니다. 부활의 능력을 지닌 예수가 명합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깊은 바다 위에 던져라. 그러면 많이 잡힐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복음서를 더 읽어보면, 그렇게 잡은 고기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화로에 숯불을 피고 구워서 같이 먹으면서 오손도손 정담을 나누는 아주 낭만적 장면이 나옵니다.

오른편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제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그물을 던질 때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역사 속에서 그물을 던질 때, 역사의 주변이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에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수한 역사적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이천 년 동안의 역사는 그만두고라도, 한해가 지나면 책으로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좋은 이야기, 나쁜 이야기, 좌절의 이야기, 희망의 이야기,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어떻게 기록됩니까?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이 있습니다. 역사가는 자신이 보기에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건만 가위로 잘라서 모아 놓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나름대로의 사관에 따라서 이야기를 만듭니다.

3년 동안 있었던 예수의 하나님나라 역사 이야기, 이 이야기도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이 그때 일들을 각자의 눈으로 기록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마태라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의 이야기를 적습니다. 마가라는 제자도 그렇게 합니다. 누가도 그렇게 하고 요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네 사람이 기록한 예수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 그 이야기 중에는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네 제자의 관점에 따라서 예수 이야기가 달리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역사의 핵심은 네 복음서를 관통하여 똑같습니다.

역사 현장에 몸을 던지고 그곳에서 의미를 찾으십시오.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은, 특별히 남한에 사는 우리들은 5월, 이 달에 겹쳐진 우리 역사가 내세울 만한 역사만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5·16이라 이름하는 하나의 사건이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 5·17이라는 역사도 우리의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5·18 역시 지금도 가슴을 찌르는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 날이 5월의 달력에 연속해 있습니다.

저는 이 5월의 역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기둥 위에 죄명을 팻말로 써서 붙인 역사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위의 팻말의 내용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과 바리새파 사람과 제사장들이 함께 해석한 십자가 역사입니다. 힘을 가진 자들의 해석입니다. 그 해석에 따르면, 예수의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했던 역사, 민족 해방이라는 대의를 내세우고서 권력을 잡아보려는 엄청난 정치적 사건의 역사였습니다 5·16, 5·17, 5·18에 담겨 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권력과 상관이 있습니다.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한 가지 목적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인리(INRI)라고 쓴,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라고 쓴 지배자들의 십자가 해석 뒤에는 예수라는, 죄 없이 죽어간 희생자가 있습니다. 5·16, 5·17, 5·18이라는 권력의 역사 속에 무수한 사람이 희생물로 죽어 갔습니다. 이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역사를 향해 외칠 말은 이것입니다. "십자가 사건 속에서 '왕'이라는 죄명으로 죽임 당한 예수의 희생이 지금까지 이어진 희생의 끝이어야 합니다. 다시는 어떤 혁명이나 정변이나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인간의 희생은 없어야 합니다. 예수의 희생이면 족합니다. 다가오는 역사에는 이런 불행한 역사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 겪는 희생은 한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요된 희생은 아프고 괴롭습니다. 한이 맺힙니다. 예수는 타의에 의해 희생을 당한 건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희생을 걸머지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희생적 봉사입니다. 그것으로 이제 다시는 희생이 없도록 하십시다. 유대 사람들에게 있었던, 동물 제사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함께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동물 희생도 없습니다. 하물며 인간의 희생이야 십자가 이후의 역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교훈을 이제부터 다시 새길 수 있다면, 잔인한 5월의 달이 오히려 우리를 깨우치는 복된 달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WCC에서는, 인간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폭력으로 규정하고, 개인적인 폭력, 학교의 폭력, 부모의 폭력, 경제적 구조의 폭력, 정치적 독재의 폭력 등 이 모든 폭력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 희생당하는 현실 앞에서, 폭력을 근절하고 하나님이 주신 샬롬의 평화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동안의 토의 끝에 서기 2001년부터 2010년까지를 모든 종류의 폭력을 극복하는 10년으로 삼아 캠페인을 벌이기로 하고, 세계의 모든 교회는 물론 타종교에까지 호소하여 평화문화를 이뤄가는 10년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래서 "폭력 극복의 10년", 영어로 그냥 말씀드리면 "Decade to Overcome Violence"입니다. 각 단어의 첫 글자만 따서 'DOV'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DOV'라는 명칭이 전세계에 퍼지면서, 이제 'DOV'라는 말은, "다시는 폭력과 희생의 역사가 없는 평화의 문화를 만들어 가십시다. 폭력의 문화는 예수의 십자가로 끝났다고 고백하십시다. 십자가 이후의 부활의 역사부터는 폭력이 아닌 비폭력, 사랑의 역사로 다시 우리 역사를 쓰십시다."라는 외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이뤄지는 모든 역사의 한가운데는 폭력을 극복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가 역사 한가운데에 있으니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길에 투신하십시오. 그리고 역사를 다시 씁시다. 십자가 역사는 실패한 역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는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지식도 없는 불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말로 민중이었습니다. 어떤 맑스주의자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의 모든 열두 제자는 프롤레타리아였고, 따라서 열두 제자가 예수를 중심으로 이루려고 했던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었다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민중의 역사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예수와 함께했던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의 역사는 십자가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실패한 혁명의 상징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오늘 좌절한 제자들에게 부활의 예수께서 나타나시듯이, 인간의 눈으로는 실패한 역사 속에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다시 부활이란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예수의 혁명 역사가 성공해서 유대 땅이 로마에서 독립했더라면 그 역사는 유대인의 민족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 역사는 없었을 것이고 경동교회 역사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실패한 인류의 혁명사 속에서 움텄고 그것이 부활로 확증되어서 오늘 나타났습니다.

역사에 그물을 던질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 요한 등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했던 3년 간의 역사를 종결짓고, 이제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눈에는 실패한 한 인간의 역사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함으로, 예수라 이름하는 인간의 역사는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비참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실패한 인간 예수 속에서 부활의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고 해도 그게 누구의 말씀인지도 몰랐습니다.

물고기의 이야기를 좀더 해봅시다. 신약성서는 헬라어로 쓰여져 있는데, 헬라어에서 물고기라는 말은 "익스투스"(IXTHUS)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에서 각 단어의 첫 글자를 모으면 "익스투스," 물고기와 철자가 꼭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유대인의 왕으로 죽었던 실패한 역사가 있는가 하면, 십자가가 아닌, 물고기란 말 속에 표현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새로운 역사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를 상징하는 물고기를 153마리나 잡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실패의 그물로 엄청난 성공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십시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성공한, 인간을 낚는 어부가 되십시오. 이것이 전도자, 제자, 사도가 갈 길입니다." 역사의 깊은 곳에 가면 인간의 실패가 있고 하나님나라의 성공이 있습니다. 인간의 깊은 심연에 가면 인간의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보입니다.

이걸 동시에 볼 수 있습니까? 인간의 눈에는 인간의 역사가 망해야 하나님나라가 보입니다. 인간이 가장 깊은 실패의 나락에 떨어져야 하나님의 성공이 보입니다.죽음으로 모든 것을 마감하고 싶어하는 인간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종말을 맞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기대하며 기꺼이 죽어갔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승리의 증거가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가 부활하셔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남아프리카에 가신 분들은 아마 보셨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제일 아래쪽에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 케이프타운에 희망봉이라는 언덕이 있습니다. 이 언덕의 본래 이름은 폭풍의 언덕(Cape of Storm)이었습니다. 그 언덕 옆을 항해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 언덕 주위에서 몰아치는 폭풍 때문에 죽었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Vassco da Gama)는 포르투갈 사람이 그 폭풍의 언덕의 위험을 이기고 그 옆을 돌아서 뒤쪽으로 항해했을 때, 그는 폭풍의 흔적조차 없는 고요하고 거대한 인도양과, 인도라는 큰 나라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언덕의 이름을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라고 붙였습니다. 언덕 뒤쪽의 잠자는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언덕은 끝내 폭풍의 언덕입니다. 그러나 바스코 다 가마가 그 폭풍의 언덕을 돌아서자 고요한 바다와 새로운 희망이 보인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 언덕의 이름이 폭풍의 언덕에서 희망의 언덕, "희망봉"으로 바뀌었습니다.

뒤틀리고 좌절된 인간의 역사를 넘어서면서, 오른쪽에,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십시오. 그리하여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시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한테 이 말씀을 하십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으십시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십시오."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진 제자들의 결단이 오늘 우리의 신앙의 결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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