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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 합 1:2-3, 롬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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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공평하신가?
합1:2-3 롬8:32,


지난 4일부터 시작된 게릴라성 집중호우로 인하여 영호남 지역이 큰 물난리를 10여일 째 겪고 있습니다. 특히 김해지역은 침수된 물이 빠지지를 안아 고립된 채 식수공급과 음식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않아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뉴스를 며칠째 들으면서 많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일기예보 상에는 '이제는 비가 그치고 뜨거운 날씨가 시작될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오늘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 세상을 살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수해와 같은 엄청난 천재지변을 비롯하여 경제적인 문제, 질병의 문제, 가정적인 문제 등 많은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괴롭히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여러 일들 중에 즐거운 일보다는 고통으로 상처를 입고 아파하던 날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더욱이 우리 중에 이러한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완전히 면제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심각성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며 지혜롭게 믿음 안에서 신앙 안에서 극복하며 살아가느냐? 가 중요합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저나 여러분이나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싫어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고통은 피하기를 원하고 또 고통 없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면서 그 행복을 추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의 용광로를 통과하는 것을 한동안 내버려두시는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자비하십니다. 얼마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이런 고통, 저런 고통이 얼씬거리기만 해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와서 그 큰 팔을 휘두르시어 모든 고통을 쫓아 주실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첫째 질문은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에 대한 물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토로하며 울부짖어 기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왜 의롭게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이 같은 고난과 핍박이 있고 불의한 사람들은 아무 탈없이 잘 사는가?"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하는 것에 대하여 원망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도 본문 1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 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니이까”(합1:2) 며 항변하는 모습을 봅니다.

아삽도 그의 노래에서 " 하나님이여 침묵(沈默)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히 말고 고요치 마소서" 하였으며 다윗역시 "하나님이여 속히 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소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心思)를 통촉(洞燭)하소서"(시5:1)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해결책을 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때때로 침묵하고 계실 때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숨어계시나? 하는 의문입니다.

다윗은 『 악한 자가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窘迫)하며,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며 외치기를 "하나님은 없다."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악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殘害)와 죄악(罪惡)이 있나이다. 그러하온즉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10:1-7)며 항변(抗辯)하는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엄습해오는 여러 환난과 고통에 대하여 반문해보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저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어떤 때는 불평하기도 하고 믿음이 없을 때는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 하실 까요?◆

①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아무리 불공평하고 어려운 일들을 당하였다 할지라도 예수님만큼 불공평을 당하고 천대와 멸시와 핍박을 받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한 일을 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의 친구가 되시며 어렵고 힘든 자의 위로가 되어주셨던 예수님! 그렇게 짧은 생애를 사시면서 오로지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좋은 일만 하셨던 그 분이 사람들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아 살이 찢기고 옷 벗김을 당하는 수치와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여기까지 보면 십자가는 슬픈 이야기요, 실패한 사건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들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로 짓고, 승리의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최후 승리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만 바라보고 무덤만 바라보고 즉 현실만 바라보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먼 미래를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작은 전쟁에서 진 것처럼 보이나 그 마지막은 승리의 영광입니다.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화를 당하거나 저주받는 것보다 차라리 처음에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다할지라도 그 마지막에 이기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애가 마치는 날 그 마지막은 ‘영생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계2:10)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하를 얻고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할 지라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그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예비 된 하늘나라의 상급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감격 그 기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혹시나 잊어버렸다면 하루빨리 믿음 안에서 성령 안에서 되찾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고 오직 기도함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②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나?

하나님은 우리가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때 바로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손을 펴서 도와주시지 도 않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불을 내리시던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홍해를 가르시고 ,아말렉 군대를 물리치시던 하나님께서 왜 강제적으로라도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고 침묵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정말 주무시고 계시거나 숨어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믿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그들 속에 예수님이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어떤 거인처럼 램프만 문지르기만 하면 '펑'하고 나타나서 "주인님! 찾으셨습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질문해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큰 착각 중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의 소원대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고 도와주신다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정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 됩니다. 다시 말해 필요할 때만 무당 집에 찾아가 굿을 벌이듯 하나님과 우리사이에는 사랑도 믿음도 없는 형식적인 종교 기복종교가 되고 맙니다.

※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사랑이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침묵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아니하고 지체되는 영혼의 갈등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최고의 고백이 하박국 3장17절부터 1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 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 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그러나 이 같은 고백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통해 아픔을 통해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 분을 위해 몸과 마음과 생명을 받쳐 죽도록 주님을 사랑할 수가 있는 자입니다.

※ 하나님은 100살 때 이삭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아들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번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양처럼 각을 뜨고 불태워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실패와 절망과 고통을 통해서 기적같이 얻은 독자 이삭이지만 하나님께서 다 뜻과 길이 계실 것을 믿고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네가 비로소 나를 사랑하는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 완전한 믿음, 완전한 헌신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에게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험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욥이 가진 신앙이 참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축복 때문인가?를 확인하기 위한 사탄의 시험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욥은 그 무서운 고통의 신음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고백하기를 “그가 나를 죽이실 지라도 나는 그를 바라리라”(욥1:21,13:15)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게 하시고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침묵하십니다. 고통을 주십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끝까지 나를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다시 채워주시는 하나님,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도 불어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께서 그루터기 같이 보잘 것 없는 실패자라 할지라도 다시금 아름드리 나무를 만들듯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아름답게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며 늘 찬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로 만들어 주시고자 오늘도 침묵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절대로 불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급이기 때문에 더욱 값지고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의 사랑, 어느 정도의 믿음, 어느 정도의 기도입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전부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③ 하나님은 숨어 계시나?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모든 만물에 편재(遍在)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자연 만물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아니하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빌립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8-10)

※ 사랑의 교회(옥한흠목사) 대각성 전되집회 때 김희두라는 형제의 간증입니다.

『그는 30대의 패기 만만한 나이에 시작하여 16년 동안 피와 눈물로 키워온 회사가 갑자기 자금압박과 노사분규로 도산하여 공중분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은 직접 당해 봐야 그 사정을 알지, 말로만으로는 모르는 일입니다. 허탈과 절망으로 그는 죽음 직전까지 몰려갔습니다. 한 마디로 막장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 때 아내의 손에 이끌려서 생전 와 보지도 아니했던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고통이 그 형제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피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말을 적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교만과 자만으로 나 자신이 전부였던 삶에서'. 다 그렇습니다. 고통을 모를 때는 교만과 자만으로 나 자신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내버려 두세요♬의 노래말 처럼 제 잘난 맛에 살던 사람이 실패와 좌절로 말미암아 이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존재인가를 깨달아 인정케 하시고, 이런 겸손한 자아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를 불러주신 하나님, 당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특권과 구원의 감동으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진정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누가 이 형제로 하여금 하나님께 피하게 만들었습니까? 고통입니다. 』

시련과 고통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는 안경과 같습니다. 돋보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불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언제 맑아집니까?
우리 영혼이 언제 은혜로 풍성해 집니까?
우리 영혼이 언제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는 순수한 은혜의 경지를 맛봅니까?
형통할 때입니까? 곤고할 때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곤고할 때입니다. 고통을 맛볼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공평하시지 않은 하나님으로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영혼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 관심은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은 우리의 겉 사람이 아니고 속 사람입니다.
현세의 사람이 아니고, 내세에 자기와 함께 영원히 살 자아를 하나님께서 더 깊이 마음에 두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고통도 절대 마다하지 아니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고통을 통해서 빚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은 눈 딱 감고 고통을 주셔서 그것을 통과시키십니다. 이것이 저의 간증입니다.

<결 론>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불공평하신가?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영혼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봄 속에 생각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경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부르짖고 간절히 서원 함에도 불구하고 축복의 문을 열지 아니하시고 닫아놓으시고 침묵하시는 것도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진실한 만남, 진실한 사랑, 진실한 고백과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알게 하시고 나누어주시기 위한 하나님은 선별작업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훈련에 대하여 불공평하다 말하지 말고 낙심하여 도중에 주님을 떠나지 말고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일꾼으로 큰 교회로 써 주실 수 있도록 더욱더 하나님의 참뜻을 구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늘찬양속에 살아가는 주님의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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