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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 됨 / 마 9: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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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됨> 마9:9-17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즉 9-13절의 부분과 14-17절의 부분입니다. 이 두 부분의 내용은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그 두 부분은 함께 다루어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본문이 됩니다.

첫 부분에 속하는 11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유대인들로부터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세리들 중의 하나인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많은 그의 동료 세리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한 말입니다. 문장상으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행동에 관해서 문제제기를 했지만 그 문제의 초점은 어떻게 세리같은 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에 속하는 14절에서는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합니다. 여기서는 앞부분의 11절에서와는 달리 예수님 자신에게 그의 제자들에 대해서 문제제기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금식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앞 부분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 됨"에 관한 문제입니다.

다시 첫째 부분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죄인들이라고 지칭하는 세리들과 자리를 같이하실 뿐 아니라 그 중 한 사람을 제자로 삼으신 일을 비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본문 12-13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 속에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뿐 아니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비판도 함께 담으셨습니다. 즉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은 율법의 제자들로 자처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제사드리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율법의 참 뜻인 마음으로부터의 사랑과 불쌍한 이들에 대한 긍휼이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이 본문 자체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사람의 자격에 관해 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는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지식적으로 온 율법을 잘 알거나 형식적으로 율법의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중심을 바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지켜 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바리새인들로부터 비판의 도마에 오른 전직 세리 마태에게로 우리의 눈을 돌려봅시다. 그의 직책에 따라 세관에 앉아있던 그는 그 앞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는 한 마디 말씀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며 누가복음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5:28).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는 과연 한 번도 예수님을 뵌 적이 없이 지내다가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느닷없는 한 마디 말씀에 돈밖에 모르던 세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돌변했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일이 있었던 곳은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거기서 세금을 내셨기에 나사렛이 아니라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본동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이미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지나다니시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산에서 하신 설교말씀을 비롯해서 그가 선포하시는 복음을 전해 듣고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비록 그가 온 동족들로부터 경멸을 받는 세리의 신분이기는 했으나 그의 내면 한 구석에 그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와 수치심과 보다 떳떳하고 보람있는 일과 삶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전해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과 갈망을 더욱 심화시켜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세금을 내려고 세관에 들리신 예수님을 아주 가까이서 아니면 직접 대면해서 뵐 기회도 있었을지 모르며, 그런 일로 인해서 그의 마음의 동요와 예수님을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의 삶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를 하며 그 결단의 때를 모색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희망과 기회를 예수님에게서 찾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나도 저 분처럼 살 수는 없을까? 저 분이 나 같은 사람도 제자로 받아주실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마음 속에 일고 있던 이러한 동요와 변화를 알고 계셨고, 이제는 그를 부르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셨기에 그에게 다른 아무 설명없이 "나를 따르라" 한 마디 말씀만을 던지셨으며, 마태는 이미 마음에 예수님을 따라 나설 준비가 되어있었기에 기다렸던 그 말씀 한 마디에 일어나 따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보고 비난할 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신 것도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대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리로 지낸 세월과 삶에 대한 수치심과 회한과 "과연 나를 예수님께서 받아주실까" 하는 불안감을 잠재워주시기 위하여 마태를 향해 던지신 따뜻한 배려의 말씀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며 모든 삶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갈망과 결단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될 수 있는 자격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여러 견해가 있으나 오랜 전통의 지지를 받으며 가장 복음적인 입장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 즉 세리로 있다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가 된 바로 그 마태가 마태복음의 저자라고 하는 입장입니다. 그 입장에 서서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세리라는 그의 직업상 쓰고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에 익숙했으며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는 그의 그러한 재능을 매국적이고 반민족적인 일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따르게 됨으로써 세세토록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행적과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복음서의 저자로서 그의 모든 달란트를 바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주님 위해 쓸 줄 몰랐다가 주님을 만난 후에는 자신의 달란트를 주님의 일을 위해 온전히 쓰게 되는 전환이 이루어질 때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는 말 수가 아주 적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성경에는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따르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만 기록되었을 뿐,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달리, 그가 한 것으로 전해지는 말이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말을 최대한 자제하며 오로지 주님의 말씀만을 충실히 기억하고 기록하며 전하는 일로 그의 삶을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 됨의 한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말을 많이 하고 자신의 생각을 많이 내세우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되기가 힘듭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으로 옮겨가겠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일단 15절에서 보는 대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금식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경건을 표하고 훈련하는 몇 가지 주된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 자체를 금하시거나 가치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금식의 참 의미와 목표를 새롭게 상기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금식을 하고 안 하고 하는 일의 중심에 신랑 즉 예수님이 계셔야 함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것이나 모두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의례적이고 기계적으로 행하는 금식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에 웃고 즐거워하며 예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기에 슬퍼하며 금식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다 하면서도 슬퍼하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일 속에서는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 됨과 정반대의 삶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그 질문을 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 줄 모르고 있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답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가 곧 기쁨의 근원이시고 그를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곧 우리의 비극임을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곧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율법을 그 중심과 참 의미도 모른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과 삶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를 따라 행해져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석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참 의미를 얻어야 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선언이 바로 16절에서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하신 말씀이며, 17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서는 안되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옛 율법주의를 가지고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새 복음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음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옛 사고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좋던 것이 예수님 때문에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예전에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이 예수님 때문에 무가치해지며, 예전에 우리에게 슬픔과 고통이던 것들이 예수님 때문에 기쁨과 감사의 제목으로 바뀌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도 예전에 세상적으로 살 때의 사고와 행동과 삶의 방식을 벗어버리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 다 망치고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예수님의 제자 됨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열심히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지켜 행하며, 세상적인 옛 삶의 방식을 버리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살되,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주님 위해 온전히 바치는 주의 참 제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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