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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부흥의 새 패러다임 / 행 9:26 -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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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부흥의 새 패러다임 (Paradigm)
사도행전 9 : 26 - 31
 
영감의 사도 바울도 한 때는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사울 때가 있었습니다. 다메섹도상에서 홀연히 하늘에서 빛이 비취고 빛으로 인해 땅에 엎드려진 사울에게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는 음성은 당대의 석학이자 유대인 중에 유대인인 사울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얼마 후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동안 보지도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였습니다(행 9:8-9). 그 후에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고 했을때(행 9:17),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며 강건해졌습니다(행 9:18-19). 사울은 즉시로 유대인의 각 회당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행 9:20).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사귀고 싶었으나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아니했습니다(행 9:26).
왜냐하면 사울이 기독교인들을 악독하게 핍박하였기 때문에 그의 개종사실이 사람들에게 믿어지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사울이 개종했다는 사실에도 오히려 사람들은 사울의 핍박을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개종과 함께 그가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부흥되어 갔습니다(행 9:31).
사울은 개종한 후부터 죽는 날까지 복음전파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복음운동은 사울의 개종으로 인하여 그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Ⅰ. 전도자를 인정하고 그의 신상 (身上)을 보호해야 합니다.

본문 9장 27절에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는데 사도들이 바나바(위로의 아들)로 개명해 주었습니다. 지금 사울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사울을 죽이려 하고 있었고 기독신자들은 그의 회개를 믿지 아니했습니다.

이때의 사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고독에 몸서리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는 사람들로부터 예전과는 다르게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울에게 바나바가 찾아왔습니다. 위로자 바나바는 지금의 사울을 볼줄 아는 인격과 영적인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원사도들에게 갔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예루살렘에서 소개했습니다. 그는 사울의 인격을 바로 알아보는 지혜가 있었고 주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울같은 일꾼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소개하는 내용은 첫째로 사울은 기적적으로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확실히 회개했다는 것과 둘째로 사울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한 사실과(행 9:20) 셋째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과(행 9:22) 넷째는 복음전파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던 것을 증거하였습니다(행 9:23-25).

바나바가 사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인들에게 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그후부터 제자들과 함께 거하면서 예루살렘을 출입하게 되었습니다(행 9:28). 바나바의 증거로 인하여 사울은 원사도들로부터 예수의 행적과 교훈에 대하여 들었고(갈 1:18) 그 후로는 사도들과 대립하거나 다투지 아니하고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려면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복음이 전파되려면 전파하고 가르치는 자의 진실과 신앙인격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오해 같은 것이나 전파자에 대한 선입관은 금물입니다.

드물기는 하지마는 어떤 이들은 지도자가 넘어지고 잘못되는 것을 기대하고 취미로 삼는 사람도 없지 아니합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사람들은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사람은 정의롭고, 지도자의 진실을 옹호하고 변호하면서 의리를 지키는 자는 오히려 아부하는 사람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는 의리와 아부를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앙인이라기 보다는 이기적이고 편엽된 사고방식이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믿음에 관해서는 전무한 상태입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Ⅱ. 전도자가 담대(膽大)히 말하도 록 해야 합니다.

본문 9장 28-30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는데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때 바나바가 사울을 사도들 앞에서 변호해 주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출입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사울은 기독교인들의 경계 대상도 아니고 기독교인들에게 배척당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담대히 말하고』 (파르레시아조마이, )라는 말은 '거리낌없이',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의도는 사울의 설교보다는 사울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자의 설교 내용에 앞서서 전도자가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전도자는 모든 자들과 대화와 교제가 가능하도록 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전도자가 이 세상 역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사건들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성경에서 그 답을 제시함에 있어서 능숙한 기능을 가지고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이것은 전도자 자신이 해야 될 일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협조가 적극적이라야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Ⅲ. 평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값을 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교회에 대한 외부적인 박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 갈리굴라(Caligula)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려다가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반발이 일어났고, A.D 41년 1월 24일 그가 피살됨으로 정치적 박해가 잠시동안 잠잠해진 때였습니다. 이 때를 교회부흥의 호기로 삼은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없는 시대에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육체적 자유를 만끽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다른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한 시대를 사는 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경건해야 합니다.

본문 9장 31절에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외부적인 핍박이 없게되니 평안해졌습니다. 그러나 외적으로 평안할 때 교회는 이 기회를 잘 선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외부적으로 핍박이 없게 될 때 즉 교회의 평안 상태를 선용하지 못하면 교회는 부패하고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맙니다.

『든든히 서 가고』(오이코도무메나이, )라는 말은 '건설되어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경건을 의미합니다. 경건생활로 인하여 각기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교인들이 신앙 안에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한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교회가 영적인 경건을 잊어버리면 교회는 세속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가 경건을 잊어버리면 영력이 떨어지고 가치관이나 이데오르기가 세상과 같아지거나 비슷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는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달라져야 합니다. 세속화된 교회는 교회적 부흥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경건은 매우 중요하며 교회 부흥의 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주를 경외해야 합니다.

본문 9장 31절에 {…주를 경외함과…}라고 했습니다. 『주를 경외한다』라는 말은 성도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두려움으로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노예적인 공포나 맹수 앞에서의 초조함이 아닙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자발적인 감사에서 오는 복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시키신 그 사랑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격에서 오는 무릎 끓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여기에 성령의 역사가 있고 성령의 위로가 함께 하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3)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본문 9장 31절에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 『위로』(파라클레스시, )라는 말은
'격려한다', '긍휼히 여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보혜사 성령 (파라클레토스, )의 사역을 전제하고 사용한 단어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영적인 요소가 극대화 되도록 하는 교회입니다. 인본주의나 차디 찬 이성주의나 과학적 경험주의나 논리정연한 합리주의가 교회 안에 자리잡으면 그 교회는 참으로 답답한 교회가 됩니다.

4) 수(數)적 상승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9장 31절에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교인의 숫자가 늘어간다는 의미지만 그에 따라 교회적 기능에 필요한 전반적인 수적 상승을 함의합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있다면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거기에 따라 모든 것이 많아지고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수가 증가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성도들은 절대적인 당위성을 가지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교회부흥이 교인숫자의 증가라고 하는데 대하여 엽기적인 반응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특히 재정문제에 가서는 노골적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교인수가 갈수록 늘어나야 합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모든 것이 양적으로 숫자가 증가되어야 하고 내용적으로 성화적 삶으로 말미암아 이전보다 더욱 경건해져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부흥되는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전도자에 대하여 그의 신앙인격을 따르고 변호하는 의리있는 자가 있는 교회입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전도자가 담대히 말하도록 준비하는 교회입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평안한 시대를 선용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1절에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 동안쯤 고요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반 시는 여자적으로 30분은 분명 아닙니다.

① 고요한 잠정적 평안의 시간입니다.
② 심판을 예고하는 시간입니다.
③ 성도들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시간입니다.
④ 무엇보다 성도들의 기도가 재물로 들여지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절대절
명의 시간입니다. 교회적 사명이 극대화되는 시간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입니다. 특히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주님을 경외하며 그를 따르고 복종하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리면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야 합니다.
교회는 날로 숫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교회 재정도 많아져야 합니다. 수가 많아지니 교회 건물도 커져야 합니다. 문제는 교회가 하는 일도 많아져야만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여러 기관이 같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영아부에서부터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남·녀 장년부, 노년부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도 날이 갈수록 많아져야만 합니다.
각 기관의 부흥은 곧 교회전체의 부흥입니다. 각 기관은 자기가 속한 기관의 부흥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각 기관은 교회라고 하는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과 같아서 어떤 기관이 자기 책임을 못하면 그 짐은 다른 기관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 부흥에 충성된 주의 제자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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