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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를 축복으로 /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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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를 축복으로 / 고후 12:1-10   

사도 바울은 모든 사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도입니다. 본문에도 나타나 있지만, 그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큰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는 말 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령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한 고백을 들어보면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사단의 사자처럼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끊임없이 큰 고통을 주는 무엇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는 말뚝 이라는 의미 와 더욱 가깝습니다. 아주 뾰족한 말뚝이 사람을 찌를 때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 가시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요한 칼빈은 이 가시란 바울에게 있어서 영적인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어려움이 많고 반 대가 있으니까 복음 전파하는 의무를 피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유혹에 빠졌을 때 그의 양심은 괴로웠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바울이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반대 와 박해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반대하여 그의 일을 파괴하려는 자와 끊임 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고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가시란 육욕의 유혹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수도승들이 수도원에 묻혀 있을 때 그들은 성 본능은 마지막까지 억제하기 어려운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의 이상인 금 욕주의에 따라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터툴리안이나 제롬 같은 분은 바울이 매우 지독한 두통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바울이 간질병 때문에 또는 안질 때문에 고통을 당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영광을 본 후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아나니아에 의해 눈이 보이게 되었지만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많은 고생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 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고 한 말이 있습니다. 갈라 디아서 마지막 부분에 가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고 했는데, 이 말은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이 쓰는 커다란 글씨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바울이 동부 지중해안 지대를 휩쓸고 있던 말라리아 열병에 만성적으로 걸려서, 그것이 무서운 증상으로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이렇게 저렇게 추측하여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 니다. 어떻든 바울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주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가시를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기도의 횟수도 세 차례였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비슷합니다. 예 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 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대한 응답도 같습니다. 예수님께 대해서 이 잔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 난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에게 큰 능력을 주셔서 그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대답도 거의 같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는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주께 봉사한 것입니다. 저는 종종 제가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많은 편지를 받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여러 가지이 지만 대개의 경우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의논해 오는 것들입니다.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불구의 몸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어떻게 살아가면 좋겠습니 까? 사업에 실패하고 앞길이 막연한데 무슨 좋은 길이 없겠습니까? 실직을 당했는데 좋은 직장 을 하나 소개해 줄 수 없겠습니까? 머리는 좋은데 학비가 없어서 공부할 수 없으니 어떻게 공부 할 수 있는 길을 좀 열어 줄 수 없습니까? 심지어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서 심히 외롭고 슬픈 사정을 호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그 몸에 가시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 우리 중에도 바울의 몸 의 가시와 같은, 남모르는 고통을 당하고 계신 분들이 더러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내 몸에 있는 가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 까? 우리가 성경을 읽은 대로 바울은 육신의 가시를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가시의 문제를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한번 기도 드린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드렸다고 하는 것을 보니 간절히 기도한 것 같습니다. 내 살을 찌르고, 나를 아프게 하는 가시가 내게 있 으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이 가시를 좀 없애 주세요 라고 주님께 자기 가 시에 대한 문제를 솔직히 고백하고 이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해결의 길입니다. 우리도 이런 가시의 문제를 당할 때 혼자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를 주 님께 가지고 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기도하지 않고 혼자 근심하고 염려하며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비관하여 몸도 더 약해지고, 일도 더 안되고, 나중에는 큰 고통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 습니다.이렇게 근심하고 걱정하는 생활을 계속하게 되면 이것 때문에 더 큰 병이 날 수도 있고, 더 큰 실패가 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심하게 되면 정신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고, 극도의 염세주의에 빠져 비관하게 되며 심지어는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 니다. 이 가시의 문제는 혼자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가시 때문에 주저앉아 원망만 합니다. 반항을 합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없는데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왔나? 왜 내게만 이런 슬픔이 왔나? 왜 하필이면 나만이 이 렇게 괴롭게 살아야 하나? 하며 사람을 원망하고,사회를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자포자기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만 생깁니다. 또한 잘 해 주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악하게 대하고, 나중에는 흉악한 죄악에 빠지기까지 하는 사람도 종종 있습 니다. 이 가시 때문에 자신이 아프니까 공연히 남을 괴롭게 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에게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가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내게 어떠한 가시가 있어서 큰 고통이 오고, 괴로움이 올 때에 제일 먼저 할 일은 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모두 쏟아 놓는 것입 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라고 주님 앞에 온전히 다 고해야 합니다. 그것 이 해결의 비결입니다. 야고보서에도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라 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50편에 보아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 고 하셨습니 다. 환난 당할 때 하나님을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응답하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때 주님은 두 가지 길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첫째,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도드린 대로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바울이 육신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간절하게 세 번씩이나 기도했는데 그 가시를 없애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 잔을 떠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능력을 더하셔 서 십자가의 고통도 능히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도 역시 그렇습니다. 바울의 몸을 찌르는 가시는 없애 주지 않으셨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라고 하시며 그 가시를 능히 견딜 만한 족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 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라고 했습니 다. 어려운 일 당한 때에도 족한 은혜 주시고, 내가 심히 고단할지라도 내 앞의 반석에서 새로 운 생명수를 주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제일 많이 알려진 분은 요한 번연 일 것입니다. 이 분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서 투옥이 되었습니다. 활동적인 분이 수 감되어 감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답답하고 민망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라는 똑같 은 음성이 세 차례 들려왔습니다. 그때서야 요한 번연은 아, 내가 이렇게 감방에 있을지라도 주 님께서 내게 족한 은혜를 주시는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는 원망도 낙심도 아니하고, 오히 려 기쁨을 가지고 옥중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족한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통도 견딜 수 있고, 슬픔도 참을 수 있고, 고독도 견딜 수 있고, 실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 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 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족한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이는 내 능 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가시가 있을지라도 이것을 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가시로 말미암아 주님의 능력이 그 생활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하나님이 그를 쓸 만한 그릇이 되게 하고, 자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집니다. 약한 데서 라는 말은 인간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는 여러 가지 가시와 같은 고통, 질병, 슬픔, 고독, 환난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인간이 약하 여지고, 그 약함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온전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 능력이 인간 가운데서 온전히 나타나지 못합니다. 토기장이 의 능력과 기술은 흙이 부드럽고 연할 때 온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흙이 굳을 때에는 토기장 이의 기술이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심령에 상처를 입을 때, 상한 갈대처럼 약 해질 때,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까닭은 고통의 가시로 말미암아 인간 이 약하여질 때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고, 그 심령은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어 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에야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도 아마 이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령이 약해질 때는 자연히 그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 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 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겸손할 때에는 그 마음에 하나님 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나는 오히려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느니라 고 기록했습니다. 왜 그렇 습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런 때에 내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나는 약한 것 들,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들을 기뻐한다 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약할 때 곧 강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 프란시스를 기억하시지요.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본래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부잣집 아들처럼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큰 병에 걸렸는데,그는 이 중병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약한 가운데서 주의 능력이 나타나 방탕하던 청년이 성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요한 밀턴은 유명 한 문학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실명한 후에 더욱 위대한 작품 「실락원」을 썼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운데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불구의 몸으로 항상 비관하는 분이 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세요.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에게 내 자신을 맡기세요. 약 한 가운데서 주의 능력이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가시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강해지며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슬픔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슬픔 을 통해서도 주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미국이 흑인노예 문제로 남북전쟁을 하게 되었고 결국 흑인노예를 해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 미국에서 흑인노예 해방운동을 일으킨 배후에는 유명한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그 책이름은 영어로 「Un- cle Tom's Cabin」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소설은 스토우 부인이 썼는데, 그 부인의 아버지는 라이먼 리쳐드라고 하 는 유명한 목사요, 오빠는 아버지보다 더 유명한 헬리워드 리쳐드 목사입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는가 하면, 이 부인이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 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귀한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이 부인은 딸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 데 딸이 잘 자라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딸을 읽고 나니 세상을 모 두 잃은 것 같았고, 눈을 감으나 뜨나 딸 생각뿐이었습니다. 자기 마음이 그렇게 아픈 것을 생 각하다가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슬픔을 당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 니다. 그때 흑인노예들의 형편을 보았습니다. 흑인 어머니는 딸이 죽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딸이 팔려 감으로 사방으로 가족이 흩어지는 생이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스토우 부인이 나는 내 딸이 죽어서 이렇게 슬픈데, 살아서 자기 아들 딸과 이별해야 하는 흑인 어머니들의 가 슴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어 소설로 옮긴 것입니다. 그 책이 출간되어 많 은 사람이 읽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미국 사람의 양심을 찌르게 되었고, 흑인노예는 반드시 해 방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약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이루어져 인류 해방과 자유의 큰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 말씀은 얼른 들을 때 모순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진리입니다. 이런 진리를 흔히 역설적 진리(Paradox) 라고 합니다.인간이 약해질 때 겸 손해집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중병에 들어 약해지면 겸손해집니다. 세력 있던 사람이 그 세력이 없어지면 겸손해집니다. 돈 많던 사람이 사업의 실패로 돈이 없어지면 겸손해집니다. 인간은 약 해질 때 그 생각이 깊어집니다. 인생의 문제를 탐구하게 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 광은 꽃과 같습니다.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을 직면하게 될 때 인생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 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는 말씀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것이 없어질 때,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체험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던 모든 것이 끊어질 그때에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의 시작 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약할 그때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며 새 소망과 새 힘을 얻게 되 는 것입니다. 인간이 약해질 때 기도를 더하게 됩니다. 약할 때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은 절망적입니다. 약할 때 신앙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가련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 하면 결국 인간은 허무와 절망에 빠집니다. 우리 사회에는 사업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람, 연 애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람,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 심지어 입시에서 실패하여 자살하는 학 생들도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해지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인생 길을 바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오는 사람은 약할 때 강해지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강해지는 신앙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낙심하지 말고, 자 포자기하지 말고, 겸손히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새 능력을 받아서 사도 바울처럼 약한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자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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