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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 히 10: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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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히10:35~39)

제가 어렸을 때 성경을 가르쳐 주시던 고향교회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어찌나 성경 말씀을 재미있게 가르쳐 주셨던지 그 말씀을 배우던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교사로 또 찬양대 지휘자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때때로 목사님이 출타하실 때에는 설교를 하셨던 적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그 많은 봉사를 감당하셨지만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늘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셨고 또 자기 일에도 부지런하셔서 온 동네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 분은 정말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내가 신학 수업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고향에 내려갔을 때 저는 형님으로부터 그 분이 교회를 떠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순간적으로 타락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고 교회를 완전히 떠나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너무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어느 누구든지 늘 깨어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배경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점점 극렬해져 많은 배교자들이 초대교회에 속출하던 때입니다. 특별히 네로 황제는 A.D 60년에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수없이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몸에 짐승의 가죽을 씌워 사냥개에게 던졌고 몸에 기름을 끼얹고 높이 세운 기둥에 묶어 불을 붙여 인간 횃불을 삼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악무도한 핍박 앞에서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순교 아니면 배교의 양갈래길 뿐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왕정은 초대교회를 황제를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반정부집단으로 몰아갔습니다. 또한 기독교인의 예배행위를 남녀가 함께 모여 비밀스럽게 부도덕한 짓을 하는 것으로, 그리고 성찬식을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야만스러운 짓을 하는 행위로 매도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예배를 거부하고 로마 황제들을 섬기는 맹세를 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을 쉽게 사면해 주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많은 배교자들이 속출하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처럼 위기 속에 있는 초대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초대교회 당시의 탄압과 박해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종 이단과 과학 문명 그리고 경제적 풍요로움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다시 교회를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배교의 위기를 현대 교회가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큰 핍박을 받았던 초대교회 시절이나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지금이나 신앙인을 향한 위협과 도전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늘 신앙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그 비결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1.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환난을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5)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담대함"이란 헬라어 파레시아( )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담력이 생긴 것을 의미합니다. 즉 본래 나면서부터 있는 담력 즉 육체적 담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의 담력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곧 담대함으로 나타납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담대함을 소유하지 못하고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배 안에서 광풍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라고 꾸중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무서워 하느냐"라는 힐책과 "믿음이 없느냐"라는 질책이 병행되어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다. 즉 무서워 하는 것과 믿음이 없는 것이 똑같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코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늘 담대합니다. 예수님도 광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호수에서 두려워 하지 않는 담대함이 곧 믿음인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의 담대함을 유지할 수 있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로마의 박해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무서운 박해와 핍박으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는 가운데 배교자들이 발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심한 환난 속에서도 결코 담대함을 버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담대함을 잃지 않고 환난을 참고 견디면 "더 낫고 영구한 산업"(34절)을 유업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제 막 신앙 생활을 시작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성도가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를 다닌 후부터 회사 동료들이 저를 '예수쟁이'라고 놀립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점심시간이 너무 괴로워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점심을 먹기 전 기도를 하고 나면 짓궂은 동료들이 국그릇, 밥그릇을 숨기고는 안줍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국그릇, 밥그릇을 붙잡고 기도를 했더니 '밥그릇, 국그릇도 못 지켜주는 하나님을 무엇 때문에 믿느냐?'면서 놀려댑니다. 목사님, 식당에 가기 전 화장실에 들러 식사기도를 하면 안될까요?"

목사님은 그 성도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니, 식사기도도 담대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담대하게 내 아들이라고 하실 수 있겠소. 그러지 말고 담대하게 기도하십시오." 그러자 그 성도는 "밥그릇, 국그릇을 숨기는데요?"라고 사정하듯이 목사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정 그렇다면 눈을 뜨고 기도하세요. 성경에 눈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눈을 감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니까요."

순수했던 이 성도는 목사님 말씀대로 정말로 눈을 뜨고 담대하게 식사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동료들이 박장대소했지만 점점 그 담대한 모습에 감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쟁이'라고 놀려댔던 직장동료 후에 그들도 '예수쟁이'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담대한 믿음이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앞에 놓고 하나님으로부터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들었듯이 오늘 우리들도 "담대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인내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처음 시련과 박해가 닥칠 때에는 많은 성도들이 그 어려움을 견디며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박해가 끊이질 않고 더욱이 기다리던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배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36절)고 전합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경주를 완주할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아주 유명한 마라톤 선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달리기 하나로 성공할 것을 소망하면서 피나는 고생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련과 연단이 닥칠수록 성공에의 집착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3년 동안이나 고향집도 한 번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뼈를 깎는 인내의 시간을 보낸 후에 마침내 그는 세계를 재패했습니다. 이 후 그의 삶은 명예와 부가 보장된 삶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의 가정은 가난한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후에 그는 더 이상 피나는 훈련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만 힘이 들어도 그 훈련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더 이상의 인내력을 발휘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마라톤 계에서 퇴출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내를 배웠을 때에 그는 세계 제일의 마라토너가 될 수 있었지만 인내를 잃어버리자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신앙 여정은 마라톤 경주와 흡사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신앙 여정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그러므로 마라톤 경주와 같은 신앙 여정에도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12: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기자는 인내해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렇습니다. 신앙인들이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참고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먼저 십자가를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핍박으로 배교자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서라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순교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핍박 속에서도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기의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박해와 시련에 끝까지 맞서 싸우고 마침내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는 자만이 영원한 나라에서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잠깐 동안의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믿음에서 떠난 자는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에 나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도저히 믿음으로 살 수 없는 신앙의 위기와 모순된 역사 속에서도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8)라고 선포합니다. 이 고백은 공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불합리와 시련 속에서도 의인은 결코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놀라운 신앙의 역설입니다. 이것은 결코 패배주의적 독백이 아닙니다. 도무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역사였지만 이성을 초월한 믿음을 가지고 선포한 위대한 신앙 선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오직 믿음만이 승리의 비결임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오 왕의 신임을 받아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정적들이 왕을 회유하여 왕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자굴에 넣어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그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다니엘을 마침내 사자굴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후에 더욱 형통한 삶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라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5:24)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게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행4;12)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가르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은 대상이 있는 말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은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술수와 모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오직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만이 결국 세상을 이깁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두 친구가 바닷가에 낚시를 하러 나갔습니다. 비록 낚시질은 서툰 사람들이지만 고기는 잘 물렸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손바닥만한 작은 고기가 물리면 그것을 잡아서 가지고 간 구럭에다 집어넣고, 월척이 되는 큰 고기가 물리면 다시 바다에 놓아주었습니다. 옆에서 같이 낚시를 하던 친구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낚시 도중에 물을 수 없어서 궁금하게 지내다가 점심 시간이 되어 준비해온 도시락을 함께 나누면서 궁금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가만 보니까 작은 고기는 잡아 구럭에 넣고 큰 고기는 오히려 다시 물 속에 놔주는데 내 상식하고는 다른데, 나 같으면 오히려 큰 것을 집어넣고 작은 것을 불쌍해서 바다에 다시 놔줄터인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우리 집엔 그릇이 작은 것 밖에 없어서 큰 고기는 요리할 수가 없거든..."

비록 짧은 우스갯 소리지만 혹시 우리가 이와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크신 복을 주시려고 하시는데 내 믿음의 그릇이 너무 작아서 그 큰 축복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없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이 시대에 종교적 탄압은 없다 할찌라도 여전히 많은 유혹들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오히려 시련을 이겨낸 사람들도 현대문명의 유혹으로 인해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떤 유혹에도 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맞서 싸웁시다.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바라보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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