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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언과 방언의 은사 / 고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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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예언과 방언의 은사
설교본문 : 고린도 전서 14장

고린도 전서 오늘 14장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4장은 예언과 방언의 은사에 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은사를 통한 예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은사가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고린도 교회 안에 은사가 공동체의 예배 가운데 사용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초래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은사 문제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두드러진 은사였던 예언과 방언을 둘러싼 문제에 관해서 바울이 대답을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 문제에 관해서 언제나 두가지의 극단적 입장이 교회 안에 존재하여 왔습니다. 하나의 극단은 형식주의입니다. 형식주의 혹은 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머리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 두뇌로만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 이성적 신앙의 기지를 가진 사람들에 있어서는 흔히 은사를 부인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라는 것은 초자연적 영역에 속한 것이므로 자연적 이성. 자연에 속하는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이 이런 은사 문제를 용납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적 기독교, 지성적 기독교를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 은사 문제에 관해서 냉소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일축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경우 유교적 경향과 접목되어 예배 가운데 표현이 없는.. 경건한 예배, 거룩한 예배라는 것은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되도록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 이렇게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은사를 추구할 리도 없고 은사를 표현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는 그런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만, 유교적 경향이 있어서 점잖은 예배, 거룩한 예배.. 꼼짝 안하고 거룩하고 더 거룩한 사람은 눈을 감고..
그런 경향이 지금까지 있어왔죠. 형식주의적 기독교의 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 또 하나의 극단은 뭐냐면 감정주의적 기독교.
신비주의적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주의적 기독교가 머리로 추구하는 신앙이라면 감성적 기독교는 가슴으로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체험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가운데는 일종의 은사 과잉적 경향까지 갖습니다. 지나치게 은사에 매달리고 마치 은사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많았습니다. 은사가 많았지만 문제도 많았어요
은사가 꼭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건 아닙니다. 은사는 매우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지만 은사가 반드시 모든 것을 대답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은사주의적 기독교, 감정적 기독교 문화가 바뀌고 과거의 유교문화를 한국사회가 극복하면서 이런 새로운 시대의 문화가 접목되면서 요즘에 와서는 표현이 강조됩니다. 체험이 강조되고 표현이 강조됩니다. 표현하는 것이 아름답다. 어떤 책에 보니까 표현하는 여자가 아름답다. 과거에는 무표현, 표현하지 않는 것. 감성을 절제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요즘은 표현이 아름다운 것이다. 표현문화쪽으로 문화가 바뀌면서 자연히 교회의 예배 형식에도 상당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부터 시작해서 14장까지가 하나의 패키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전체가 은사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지요. 12장에 보면 은사의 리스트가 나왔어요. 여러 가지 종류의 다양한 은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다양한 은사들 가운데서 바울 사도는 두가지 은사를 특별히 끄집어내어서 14장에서 두 개의 은사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의 은사였습니다. 왜냐면 방언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는 눈에 띈단 말이죠. 쉽게 눈에 띄어요. 두드러진 현상적 은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배의 장에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바울사도가 고린도 전서 14장을 다루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14장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방언을 절대로 부인하면 안되죠. 그러나 방언보다도 예언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적 예배의 측면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나옵니다만 방언은 자기에겐 유익을 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뭐라는지 잘 모르니까 공동체적 예배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구체적 유익이 되기 힘들다. 그래서 예언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14장의 핵심입니다.
14장 1절 읽겠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뭘 할려고 하라? 예언을 하려고 하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우리가 본문의 가르침을 크게 한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입니다. 은사는 예배의 덕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1절부터 5절까지의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은사는 그것이 방언이든 예언이든 예배의 덕. 한걸음 더 나아가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인 교회의 덕을 위해서 은사들은 사용되는 것이 좋다. 바울은 먼저 방언문제를 다룹니다.
2절 읽겠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그 비밀을 말함이니라
방언문제를 둘러싸고 신학자들 가운데도 신랄한 논쟁이 있습니다. 방언이 하난가 둘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두가지 유형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가지가 아니라 두가지로 보여지는데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은 좀 다르지 않은가 보여집니다. 사도행전의 방언. 2장의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language예요. 그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연구해 보면 여러 지역에서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모르는 말이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들어왔고 베드로가 설교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알아들었다는거죠.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이예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언어입니다. 구체적 외국어예요. 우린 이따금 선교역사에서 그런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나 혹은 전도자가 다른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답답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갑자기 자기 입에서 자기도 모르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 앉아 있는 사람은 자기들의 언어로 정확히 알아들었다. 이런 기적들을 종종 볼 수 있어요. 이런 방언. 이것은 분명한 외국어의 방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은 그런 외국어 방언이 아니고 이것은 흔히 영음 방언이다. 라고 불리워집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냐면 14장 14절을 보면 내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래서 바울은 두가지 종류의 기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 영으로 하는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그냥 내 이성적 머리와 상식과 언어로 하는 보통 기도. 마음으로 하는기도...그러나 여기서 또다른 기도가 있는데 방언기도. 이것은 나의 영으로 기도한다..성령으로 말미암은 기도다. 그래서 흔히 이것을 영음방언 이렇게 표현을 하지요. 영음방언. 영으로 드리는 기도다.
그것이 14장 2절에서는 이런 방언의 특성을 2가지 특성으로 말합니다. 2절에 보시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합니까 하나님께 합니까 하나님께 합니다. 방언은 기도다 이 말이예요. 방언은 기도고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기도다. 그것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또 이런 영음 방언의 또 하나의 특성은 2절에 보면 알아 듣는다고 했어요 못알아 듣는다고 했어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알아듣지 못하는게 정상이다. 지나가다 보면 방언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못알아 듣는단 말이죠. 그렇다고 내가 못알아 듣는다고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게 정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방언하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것을 기도의 유익이라고 하지요. 자기의 깊은 것을 사람들 앞에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에 자기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방언의 유익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14장에서 방언을 예언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은 대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절 같이 읽어요.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이요. 어떤 의미에서 대조입니까. 방언은 누구에게 합니까 하나님.. 예언은 누구에게 합니까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거예요 예언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사람에게 한다. 대상이 달라요 아까 방언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언은 어떨까요 알아듣지요 알아들으니까 알아듣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그래서 그것은 덕을 세운다 권면한다 안위한다 위로한다. 권면하고 때론 위로하고 때론 꾸짖고 책망할 수 있다. 권면한다..그래서 유익을 가져온다. 자, 방언이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방언을 부인하거나 무익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4절에 보세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 방언은 주로 기도의 영역이고 자기와 하나님 사이 일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굉장히 도움이 되나 알아듣는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도움이 안되다. 교회는 덕이 안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5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5절 읽습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방언이 이웃들에게도 유익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요? 통역하면 돼요. 그러니까 스스로 통역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통역하는 은사가 있어서 대신 통역해줌으로서 그 메시지를 듣게되는 경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라는 얘깁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개인적인 기도시간에는 방언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좋지만,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렇게 해야겠지만 예배를 위해 모였을 때는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 교회와 하나님 앞에 유익이다. 그런 얘깁니다. 그래서 은사는 예배의 덕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고 예배 공동체인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1절부터 5절까지의 가르침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 4장의 두 번째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는 예배에서 이해될 수 있게 전달되어야 한다. 은사가 예배의 장에서 사용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되어야겠다. 그래야 우리모두가 유익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다.예배는 공동체의 축제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은사는 예배에서 이해될 수 있도록 전달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다시한번 6절에서 또 방언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6절 읽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오
바울이 만약 내가 방언만 하고 다른 것을 안한다 방언만 하고 끝났다 그리고 계시가 없고 지식,예언, 가르치는 것이 없었다. 말을 아무것도 안했다면 나 혼자 방언하고 말고 내 말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면 여러분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바울은 분명히 방언을 말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증거가 있지요?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방언을 못하는 사람이 방언하지 말라고 그러면 지가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 하겠지만 바울은 뭐예요
방언을 하면서도 방언의 은사를 절제하라, 특히 공동체 예배에서는 사용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6절을 보면 방언하고 지식, 예언, 가르침, 말. 지식, 예언, 가르침, 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이 뭐예요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아들을 수가 있다. 구체적인 언어의 표현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계시이든 가르침이든 선포하는 예언이든 가르쳐 알아내는 지식이든 알아들을 수 있도록 표현되는 것이다. 표현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그러나 방언의 문제점은 통역없이 사용되는 경우에는 그것이 표현되지 않고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유익이 없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표현의 중요성. 3가지 케이스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7절 이하에 보면
혹 저나 거문고 같이 생명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 그 음에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것이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오. 악기를 예로 듭니다. 악기가 소리가 희미하면 올겐인지 피아노인지 피린지 알 수  없단 말이죠. 피리는 피리의 독특한 소리가 있고 피아노는 피아노의 독특한 소리가 있습니다. 자기소리 가지고 표현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는 악기 타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어요. 음악사는 자기 악기를 통해 표현을 하는 겁니다. 또 두 번째 실례. 특별히 그 중에서도 나팔의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8절.
만약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리오. 나팔에도 요즘 우리가 신명기, 새벽기도에 공부하고 있는데 용도가 여러 가지 있었죠. 전쟁도 있고 소집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밥먹으라는 나팔도 있고 나팔의 용도가 많습니다. 전쟁이 날 때 특별한 나팔의 소리가 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분명한 소리를 내서 듣는 사람들이 준비해야겠구나.. 그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죠. 세 번째 실례는 뭡니까.그 다음절
이와같이 너희도 혀로서.....
이번에는 일상 대화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화자가 대화하는 상대방이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느냐 저는 그 신학교 다니는 후배들이나 이런 사람들과 혹은 신학교 갈까말까 목사 될까말까 하는 사람들에게 표현력이 없으면 제발 되지 말라고 말립니다.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인데 제대로 표현을 해야지 혼자만 웅얼거리면 곤란하죠.
대화에 있어 표현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 악기이든 나팔이든 대화자이든 일상적 대화 이든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뭐가 중요하죠? 정확한 전달이 중요합니다. 정확히 전달될 때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고 의미를 느끼고 또 유익함이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13절 다시 방언의 예를 들고 있는데요 13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자는 통역할 것을 기도할지니
만약 내가 방언의 은사가 있고 통역의 은사가 없다면 기도하라. 그러면 내가 방언을 통해 이런 기도를 하고 있구나 스스로 안다면 좋죠. 또 누구를 위해 기도할 때 통역까지 할 수 있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제 아내를 보니 통역 스스로 하더라구요 방언하며 통역하고 스스로 전달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단 말이지요
1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계속적인 강조. 그 초점이 분명합니다. 초점이 뭡니까. 전달되어야 한다. 표현되어야 한다. 은사들이 예배의 장에서 사용될 때는 반드시 이해될 수 있는 방법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유익하지 못한다.
방언이 기도의 유익. 유익이 있지만 방언이 또 하나 불신자들에게도 유익이 있을 수 있는 측면이 또 하나 있다고 생각됩니다. 계속 읽어보면 또 하나의 유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22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때때로 방언은 불신자들에게 표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표적이 될 수도 있어요. 저 사람 분명히 말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까 저걸 보니 분명히 하나님 살아 계시는구나. 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을 보고 다 예수 믿는 건 아니예요. 그렇다고 해서 방언하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고 오라고 내가 하나님 살아계신거 보여준다고 방언을 하면 어 정말 뭔가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하나 이렇게 오는 반응도 있어요. 23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두가지 가능성이 다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때와 장소를 가려서 상대방을 보고 해야지 방언을 딱 했는데 남편보고 내가 방언 받았어. 하나님 살아계신걸 보여줄게 하고 방언을 했어요. 그리고 남편이 어떻게 나올까요 아..하나님 살아계셔 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쳤구나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참 성경이 균형이 있어요. 저는 진시는 균형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까 서론에서 이론적 기독교와 감성적 기독교. 머리의 기독교와 가슴의 기독교가 있다고 했는데 진리는 어떤게 진리일까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해요. 한쪽으로 너무 빠지면 안돼요. 저는 우리 교회에서는 머리와 가슴이 잘 조화된 신앙. 이것이 바람직한 건강한 모습의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극으로 가지 마세요. 너무 극단으로 가지 마세요.
자, 여기 예언에 관해서도 주로 방언을 많이 다루었습니다만은 예언도 엄격히 말하면 두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현재적 측면이 있고 미래적 측면이 있습니다.
예컨대, 구약의 예언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예언하던 구약의 예언자들.
그런데 우리는 예언하면 예.언.이니까 앞으로의 미래일을 말한다. 그것만 생각하지만 구약의 예언자들이 미래 얘기만 했습니까 현재 얘기도 했습니까. 예언서 읽어보셨어요? 미래 얘기 많이 해요 현재 얘기 많이 해요. 현재 얘길 많이 해요. 굉장히 많이해요. 현재에 특별히 그당시 사회의 불의한 것 잘못된 것. 막 책망하고 고발하고 규탄하죠.
예언의 현재적 측면이 은사로 나타난게 설교입니다. 설교도 예언이예요.
그러나 예언엔 미래적 측면도 분명히 있어요. 미래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올 일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을 경계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도록.. 물론 저는 성경말씀에 관한한. 성경말씀..진리 우리가 붙들고 믿어야 할 진리에 더 이상의 것은 없다고 믿어요. 이미 진리는 완성된 것입니다. 성경은 충분히 완성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나 역사 안에서 어떤 미래를 다급한 상황과 위기의 상황속에 앞일을 경계하는 예언은 아직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예언의 은사와 많이 혼돈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예요. 지식이란 것은 뭘 아는..상대방에 관해 뭘 아는 것이예요. 이건 예언보다도 지식의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동일하게 함께 사용하는 그런 은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설교 형태로 나타난 예언이든 아니면 어떤 개인을 돕기 위해서 주변의 사람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한 상대방의 상황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또 그에 관한 예언을 함으로서 그 미래를 guide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의 가능성은 현재의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요. 마찬가지로 예언도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기도 균형이 필요해요. 이미 주신 말씀에 원리를 붙들고 사는 것과 동시에 때때로 하나님이 예언이 발생하는 상황을 보면 대부분 위기의 상황 속에서 발생해요. 위기의 상황에서.. 너무 지나치게 성경말씀은 제쳐놓고 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의 도움으로만 지나치게 많이 의존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균형을 상실하기가 쉬워요. 그러다 보면 나중에 점보는 사람을 찾아다니듯 찾아다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명히 예언의 은사가 있어요. 또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통해서 내게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유익을 얻도록 그런 은사를 주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의 은사가 그런 것처럼 예언의 은사도 조심성스럽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서 잘 사용될 때에만 참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올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두가지를 추구할 경우에 방언과 예언 중 하나만 하나님이 주신다고 그러면 오늘 본문 전체의 가르침은 뭘 추구하는 것이 좋다는 거예요. 예언. 왜냐하면 그 동기가 뭐예요. 그것을 통해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이웃들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그거가지고 알아맞춰가지고 장사할려고 하는게 아니예요. 절대로 안돼요. 그것은 성경적 가르침하고는 달라요. 그것은 뭐냐하면 이웃들에게 도움을..유익을 끼치기 위한 동기로서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교회 공동체 유익을 주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달이 되기 때문이예요. 16절 읽겠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오
방언하면 아멘하고 싶어도 뭐라고 하는지 모르니까 옆에 사람이 방언하면 옆에 있다가 아멘! 뭔지 모르지만 아멘! 그럴 수도 있지만 정말 아멘이라고 하려면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참 옳습니다! 동의합니다! 동감합니다! 그런 진정한 마음으로 아멘! 그렇게 하는건데 자, 우리가 설교를 들었을 때 아멘이 되요 안돼요. 마음에 동감을 느끼십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돼요? 아멘.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아멘 하는게 나쁜게 아니예요 어떤 사람은 그냥 너무 우리 유교문화에 영향을 받아가지고 아멘!하면 방정맞은 것 같아서 아멘.. 아멘 하세요. 괜찮아요. 표현하는 것이 아름답다.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방정맞게 마시고 은혜스럽게 아름답게 하세요.
자, 설교나 예언은 그런 의미에서 아멘할 수 있기 때문에 덕이 된다. 축복이 된다. 자,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은사는 예배에서 질서있게 사용 되어야 한다. 26절부터 42절까지..
고린도 교회에는 이 은사로 말미암은 예배의 무질서한 현상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떤 무질서였습니까 일반적으로 세가지 경향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방언 때문이예요. 어떤 사람은 예배시간에 통역없이 방언을 막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방언이 터져나오니까 예배의 진행이 곤란했어요. 무질서가 생겼어요.
그 다음 예언이 문제가 되었어요. 30절 같이 읽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 지니라.
한사람이 예언하고 있는데 옆에서 나도 하나님께 받았다고 막 말한단 말이죠. 여기저기서 하는데 전혀  맞지않은 말들을 하니까 혼란이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몰랐어요.
전 특별히 초대교회 예배는 큰 예배가 아니고 작은 예배예요. 가정예배. 우리 목장모임과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이 많을 땐 한사람 한사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가 힘들죠. 우리가 목장 예배를 드릴 때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을. QT에 받은 은혜를 나눌 수도 있고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이 강력하게 주시는 부담. 지금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이런 부담을 주시는데 하며 나눌 수가 있어요. 그것도 예언의 형태예요. 이럴 때 차례대로 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막 해대니까 예배의 질서가 무너졌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 하나는 예배의 무질서는 예언이나 방언을 남자들이 많이 합니까 여자들이 많이 합니까. 여자들이 많이해요. 왜냐하면 여자들이 기도를 더 많이 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여자들이 더 기도할 시간이 많이 있고 기도하다보니까 이런 은사들을 받고 경험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것까진 괜찮아요. 그런데 은사를 활용할 때 활용의 경지를 넘어서서 남용하다 보니까 은사 받은 여성들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무슨 얘기가 나옵니까. 여성들에 대한 어떤 교훈이 나왔습니까. 몇절에 나와요? 30절에 먼저 알은 자는 잠잠할 지니라. 그러는데 하지만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상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나니 율법에 말한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특별히 35절이 아주 좋은데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니라. 너무 말을 많이하다 보니까 그것이 남용이 됐단 말이죠. 그러나 이것을 또 극단적으로 해서 교회에서 여자들은 기도해도 안되고 그렇게 극단. 또 하나의 극단. 11장 5절에 보시면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기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있다는 거예요. 반드시 수건을 쓰고.. 내가 하나님의 질서와 권위를 존중한다.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고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존중해주고 그 권위의 질서 안에 복종하면서 기도하고 예언하면 좋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기도나 예언. 11장 5절에 보면 기도와 예언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방언도 받고 기도하다가 예언을 받은 경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사들을 활용할 때 그러므로 질서있게 해야 된다. 공동체의 권위. 영적 지도자의 권위. 그 권위를 순종하고 질서를 따라 하는 것이 좋다. 결론이 어디 있습니까? 14장 마지막 절.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그런데 여기서 이 적당하게란 말을 한국교회 사람들은 남용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적당히 한다 그러면 뭐 엉터리로 한다. 그렇게 쓰여지는데 여기서 적당하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적당히라는 것은 아름답게 하라는 말이예요. 적당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예요. 여기서 적당하다는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잘 되면 아름답게 보여요. 그렇죠? 그런데 은사를 받은 사람이 은사를 무질서하게 남용하고 교회에서 그냥 문제만 자꾸 일으키고 그러면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름답게 보여요 추하게 보여요. 추하게 보이죠. 은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추하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은사를 잘 사용하게 되면 참 아름답고 하나님이 귀한 은사를 저 자매에게 주셨구나.. 그래서 은사가 정말 누가 보든 아름답게 사용될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런 의미예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다른 말로 아름답게 하고 혹은 은혜스럽게 하고 질서대로. 차례대로 하라. 그래서 어떤 권위 안에서 지도자의 권위 안에서 모든 것이 질서있게 사용될 때 이런 은사들은 나에게 유익이고 이웃들에게 유익이고 궁극적으로 교회에 덕을 세운다. 교회를 영광스럽게 한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깊은 기도 속에서 더 많은 은사를 경험하고 그러나 그 은사를 통해서 나와 이웃을 궁극적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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