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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 /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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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잃어버린 신앙
누가복음13:6-9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쿠바 섬 해변 오막살이에 홀아비 어부 산티아고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노인이 하루도 빼지 않고 84일 동안 바다에서 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 긴 날을 온갖 고생을 합니다. 똑같은 날을 반복하는 가운데 이 노인은 무엇 때문에 이 고기를 잡아야 하며 이 고기와 자신과는 무슨 원수가 있기에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가만히 생각을 하게 되면서 어느새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85일 째 되는 날 드디어 엄청나게 큰 고기를 발견하고 3일간이나 씨름을 해서 그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배의 옆구리에다 달고 사투를 다해 육지를 향합니다. 그러나 들어오는 동안 그 고기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들의 습격을 받습니다. 마침내 육지에 다다랐을 때 그 거대한 고기는 온데 간데 없고 남은 것은 앙상한 물고기의 웅장한 뼈 밖에는 없었습니다. 어부의 끈기와 집념이 인간승리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마는 85일 간의 긴 기다림과 인내 끝에 물고기를 잡았으나 결과는 뼈뿐이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잠시 누리는 영광과 성공이 주는 기쁨은 한 순간이요, 사실은 허상에 불과함을 말해 줍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아무리 성공했다고 하나 마지막은 실패한 성공의 감정만 남을 뿐입니다. 지성과 야성의 작가 헤밍웨이는 노인의 최후를 결코 패배가 아니라고 강조하려하지만 헤밍웨이 자신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삶의 허무와 노년기에 겪어야했던 정신적인 위기를 감당 할 수 없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취와 기쁨 그 뒤에 그림자처럼 따르는 긴장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삶의 현장에서 몸부림쳐야하는 인생의 고뇌, 그 결과가 하얗고 앙상한 뼈뿐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어두운 분위기는 마치 인간의 능력을 보여주려 했던 젊은 날과는 달리 엽총 자살로 끝나버린 헤밍웨이의 인생 말로와 너무나 유사함을 알게 하는 작품입니다.
인생이 무엇이냐는 즉, <인생본질의 깨달음> 문제는 삶의 목적을 달리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현실의 찬란함이 곧 인생본질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실의 성공이 인간본질까지의 승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밤만 되면 거지가 되는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면서 지옥보다 더한 불행을 겪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이 오는 것이 두려워서 낮 생활도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24시간, 1년 365일, 그리고 평생을 통하여 지옥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황제의 지위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한편 밤만 되면 황제로 변신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순간순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황궁 근처에서 구걸하는 거지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밀어닥치는 한 낮의 세파가 아무리 거세더라도 견디고 나면 얼마 후에는 황제의 꿈에 빠져드는 밤이 온다는 생각 때문에 전혀 고통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매 순간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 중에서 정말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다만 본질이냐, 현실이냐의 문제 속에 어디로든 기울어지는 그 인격의 문제요, 또한 그 본질에 맞는 목적을 향해 살아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여기에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본질이 있고 그 본질에 따르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러기에 귀한 목적이 있다면 투자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희생도, 수고도 할 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최종 목적이 분명치 않다면 그것을 위해 수고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허무한 짓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본질과 그에 따르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주인이 왜 무화과나무를 심었겠습니까? 나무라 할지라도 각기 목적이 달리 쓰입니다. 어떤 나무는 정원에 심어놓고 바라보면서 상쾌함을 느끼는 관상수로, 어떤 나무는 곧고 길게 자라서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도 있고, 또 어떤 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 제 몫을 다하는 나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관상수로도, 재목으로도 꽃나무로도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아예 꽃이 없이 바로 열매를 맺는다고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아무것으로도 쓸모가 없다지만 이 무화과나무에게도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열매맺는 일입니다. 무화과는 열매를 따먹는 나무입니다. 참으로 달콤한 열매가 달리는 것이 무화과나무의 본질적인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무화과나무를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무화과나무는 서울, 경기 지방에는 거의 없고 저 남쪽으로 가면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지리 못 생긴 나무입니다. 그 나무 잎도 그저 보통 가랑잎처럼 동그랗게 예쁘지도 않고 또 자라는 모양도 재목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나무도 아닙니다. 비틀비틀하면서 옆으로 퍼져서 그 목재로는 아무짝에도 쓸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의 이유가 있다면 오로지 열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것에는 존재의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에게 목적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비록 늙어 할 일이 없는 인생으로 느껴지지만, 이 시간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여야 할 일이 남아있고 목적이 있기에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어 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필연이 있을 뿐 우연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 하나의 사건, 한 사람, 한 사람,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열매, 즉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인간 됨의 본질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 무화과나무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심어 놓은 것입니다. 열매가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해서 무화과를 심었는데 그 열매가 없다면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일 수 밖에요. 오늘 본문의 무화과나무가 바로 이런 처지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고 당장 찍어버린 것이 아니라 3년을 기다려 주었다가 그래도 열매가 없자 "찍어 버리라"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더 이상 무슨 변명도 불평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3년을 기다렸다는 사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려주십니다. 참아주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기다림이 막연히 기다리는 정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동적인 기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가꾸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열매 맺도록, 즉 깨달으며, 행동하며, 부지런하며, 진실하며, 겸손하도록 그리하여 마침내 열매맺도록 적극적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그 기간을 나의 편안함과 안락과 내 명예 내 세우는 데와, 내 체면 유지하는 데와, 남의 험담하는 데와, 잔소리하는 데와, 다른 사람을 은근슬쩍 밟아 누르는 데와, 괜스레 트집잡아 남 걸고 넘어가는 데와,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제고집만 부리는 데와, 양심에 벽돌 쌓아 가는 데와, 거짓말하는 데와, 게으른 습관을 나타내는 데와, 그 외에 신앙적이지 못한 악한 마음을 살찌우는데 사용했으니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말도 변명도 불평도 없는 것입니다. 이토록 본질적이지 못한 것에 목매고 사는데 정신 없느라고 정작 맺어야 할 열매는 몽우리도 틔우지 못하고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아닌 양 헛기침해대는 모습이 우리들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나쁜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사는 법칙인걸요. 그러나 그 속에 본질이 썩은 것은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용납지 않으십니다. 대가를 반드시 치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무화과나무가 잊지 말아야 할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자기를 포도원에다 심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보통은혜가 아닙니다. 포도밭에는 당연히 포도가 심어져야하는 자리 아닙니까? 더욱이 포도의 수확과 무화과의 수확은 비교 할 수가 없죠. 더군다나 무화과나무는 포도원의 모든 기운을 다 빨아먹습니다. 그 잎사귀는 아주 넓어서 포도원의 상당부분을 그늘지게 했을 것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라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고 쉬 이해도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오직 하나의 결론은 주인이 베풀어준 은혜 외에는 더 설명 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쓸모 없는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이 은혜 외에는 더 설명 할 길이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우리의 이 은혜를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은혜는 아직도 무화과나무가 잘리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하다 못해 일년 건너 한 해라도 열매를 맺어야 될 것 아닙니까? 삼 년 동안 단 한번도 쓸데 없는 이파리만 무성했지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거름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사랑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무화과나무는 자기의 본질을 망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관심과 사랑이 이 무화과나무만 못했습니까? 포도원주인이 무화과나무에 쏟아 부은 정성에 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울인 정성은 아마 견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은혜여도 보통은혜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본질 없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이고, 형식적이고, 마지못해 흉내나 내는 그런 생활 속에 열매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파리 한 마리가 그만 실수해서 하루살이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루살이들은 말합니다. "하루로 끝이니 잘먹고 잘살자." 그리고 죽습니다. 파리는 자기도 하루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삶을 하루로 잡고 준비하고 살면서 다른 하루살이들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하루살이들은 너무 짧은 인생이기에 남 생각은 전혀 안 했습니다. 오직 제 몸만 아꼈습니다. 그것을 보고 파리도 그들처럼 했습니다. 그 하루 동안에 가진 모든 것을 다 먹었습니다. 입을 옷도 가진 돈도 다 썼습니다. 저녁이 가까울수록 그는 더 열심히 가진 것을 탕진했습니다. 해가 넘어가더니 드디어 밤이 되었습니다. 하루살이들은 신음하며 쓰러졌습니다. 그도 피곤했습니다. 졸음이 왔습니다. 그는 다른 하루살이들처럼 누웠습니다. "잘먹고 잘 살았다" 생각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잠시 후에 그의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파리는 깨어났습니다. 두리번거리던 파리는 옆에 죽어있는 하루살이들을 보았습니다. 그제 서야 자기가 속은 줄을 알고 후회합니다. "속았구나. 나는 죽지 않았어 나는 이제 거지야." 그는 자기의 생이 하루 이상인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가진 것을 다 낭비해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종류의 삶을 삽니다. 그들은 죽지만 우리는 잠잘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이란 문을 통해서 다른 세상에 갔을 때 전혀 거기 살 준비가 안되어 있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썩어질 몸을 위해서, 썩어질 재산과 썩어질 명예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거기에 써버렸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급기야"세상에 속았구나! 나는 천국의 거지구나."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때의 부끄러움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존재들입니다. 본질을 알고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파리와 하루살이의 삶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 희생, 내 수고, 내 기도로 인하여 무슨 열매가 있습니까?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으로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이나 양심의 가책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나에겐 무엇 때문에 오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하루 하루의 유예기간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더 이상의 유예기간이 없이 바로 집행의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본질로 돌아가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가장 바람직한 삶의 자세인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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